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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수험생활 10년…나의 부끄러운 경험담

김성민/지방소방사(2010년 합격)

2011.06.15 김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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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부~~~웅!!!
“출항!!”
웅장한 원양어선의 뱃고동소리를 뒤로 하고, 갑판 위에 부동자세로 선 나는,
조금씩 멀어져가는 부두 위에 남겨 둔 미련과의 작별을 고하며,
그렇게 검푸른 바다 위에 내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다짐하며,
한동안 밟지 못할 육지를 그렇게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각 자의 자리에서 불철주야 하나만을 바라보며 수험생활 하시는 여러분들께 주제넘게 이렇게 ‘합격수기’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저는 수험생활 동안 고시, 7급, 9급.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합격수기를 섭렵하려 했습니다. 사람마다의 공부방법과 생활패턴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없이 나약하고 자기 합리화를 정당화하려는 저의 위선 속에서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이들의 위대했던 여정 속 인내, 열정, 눈물, 또 인내를 가슴으로 느끼며 더 큰 내가 되기 위해 환골탈태하는 번데기의 위대한 몸짓을 써내려가고자 합니다.

이 글은 여러분들에게 올바른 공부 방법을 제시함이 절대 아닙니다. 10년간의 수험생활 속에 느끼고 배웠던 제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담입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고 저처럼 바보 같은 시행착오를 덜 겪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리는 부끄러운 저의 흔적입니다.

2. 여정의 시작, 무늬만 수험생(2001년~2003년)

2001년 7월.
여자 친구를 소개해 드리려 집으로 데려간 어느 날,
“결혼?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네 직업이 무엇이더냐?” “네 한 몸뚱이도 책임지지도 못하는 녀석이 무슨….”
냉철하시고 완고하신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이 한마디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내가 결혼하려면 아버지께서 인정하시는 안정된 직장이 필요했던 것. 그 길로 바로 노량진으로 향해 국어·국사·사회·영어 기본서 4권을 구입하고 첫 페이지를 넘기며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뭐~ 별거 아니네.”

내가 살고 있는 집 앞의 독서실을 베이스캠프 삼고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것이 나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건 그땐 알지 못했다. 훗날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의 모든 독서실의 총무를 했기 때문에….

하루에 2~3시간 공부. 그래도 정신 못 차리며 남은 시간들은 화려하게 보냈다. 난 수험생이고 곧 있으면 합격할 거라고.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왔는지, 무늬만 수험생이었던 나는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화려했던 2002년도는 한·일월드컵과 함께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갔고, 자기 자신도 책임지지 못했던 나는 2003년 결혼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아프게, 점점 지치게 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도 일을 해야 했기에 해외 특송 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밤에는 집 앞 독서실에서 그래도 수험생이라고 공부를 했다.

한 달을 독서실 등록하고 직장 마친 뒤 매일 공부한다고 했지만 몸은 퍼지고 잠에 취해 허우적대다가 책장만 흥건히 적시고 집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3.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2004년)

2004년 여름, 와이프 몸에 이상이 있었다. 3주간의 청원병가가 승인이 났다. 와이프는 처가댁에 가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 처해야만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듯이 나에게는 뒤늦었지만 3주간 내 가정, 와이프의 쾌차를 위해 서툰 몸짓으로 처음 독서실 책상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고 공부를 했다. 워낙 공부가 몸에 습관이 되지 않아서 30분조차 앉아 있는 것이 힘들었다.

사실 처음에는 엉덩이만 질펀하니 붙이고 있자, 10분만 더∼ 30분만 더∼1시간만 더∼ 그렇게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순간적으로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치는 것이었다.

‘내가 인식하던 인식하지 못하던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그렇게 책과 씨름을 하며 2004년 경기도 소방운전직 시험을 봤다. 그때는 대형면허만 취득하면 응시가 가능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2004년이 마지막 운전직 공채였다. 얼마나 무식하게 공부를 했으면 시험과목 중에 자동차구조원리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정말 시험보기 전날까지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이 처음 행정학 보실 때처럼….

문제는 그것이 필기시험 전날까지 이해를 못하고 멍한 상태로, 기본서를 보고 있으면서도 20번만 눈도장 찍고 가자, 내 자신과의 약속, 20회독, 정말 미친 사람처럼 이 악물고 20회독을 마쳤다. 물론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시험 당일.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에 응시했다. 문제를 풀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득점하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문제의 자동차구조원리가 술술 풀리는 것이었다. 그냥 기본서에서 본 것이 그대로 문제가 되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필기시험에 93.33점을 받아 합격했다. 체력장도 붙고 면접까지 다가가니 20명의 동점자가 있었다.

면접시험을 보기 3주전인 2004년 10월 말. 나의 희망인 아들 녀석이 태어났다. 반드시 붙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긴 것이다.

하지만 필기커트에 걸려 불합격 했다. 감상적인 사치를 누릴 시간이 없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다. 정말 조금만 더…. 그 길로 바로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집으로 향했다.

4. 전업 수험생 그리고 좌절(2005년~2008년)

* 2005년 2월 11일~2005년 8월(경찰시험 준비)

한 집안의 가장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갓난아기와 와이프를 뒤로 하고, 경상북도의 어느 시골 고시원에서 짐을 풀었다. 무거운 고시원 분위기와 낯선 환경에서 오는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공부계획을 작성했다. 하지만 난 그 때 소방이 아닌, 경찰시험을 준비했다. 소방에 깊은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아서….

제정신이 아닌 녀석이 무슨 이성적인 생각이 있었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안 됐지만 공부는 정말이지 열심히 했다. 아니 그냥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식사시간만 빼고 고시원 독서실에서 12시 잘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공부를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해야 만 내 아픔이 치유될 것 같아서, 낭떠러지 절벽에 썩은 동아줄을 잡고 있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책상 위에 놓인 와이프와 아가사진을 보며….

* 2005년 8월~2006년 5월(노량진 입성, 소방직)

제정신을 조금 차리고 노량진이란 곳에 입성했다. 국어, 영어를 정공법으로 독파하기로 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 아들 돌잔치가 다가왔다. 직장도 없는 아빠가 돌잔치 내내 가슴으로 울면서 아들의 돌잔치를 치러주고 도망치듯 바로 노량진으로 내려왔다. 빨리 끝내야만 했다.

집 안팎으로 계속 일이 생겼지만 무책임한 나는 애써 외면했다. 1기통 자동차의 엔진으로 6기통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가는 그 길을 따라가려 하고 있었다. 단 1%의 가능성만 믿고….

4월에 본 서울 시험. 합격을 위해 간절히 한 공부의 시간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불합격을 확인했고 형편없는 국어 점수에도 덤덤했다. 위기가 찾아 온 것이다.

* 2006년 5월~12월(신림동, 이재현 선생님을 만나다)

경기도 소방공채가 8월에 있었다. 변화의 필요성으로 신림동에 입성했다. 방향타를 잃고 망망대해를 해매는 나의 모습 속에서 수험생활의 멘토가 절실히 필요했다.

5월 남부에서 이재현 선생님의 실강을 들었다. 선생님과 무조건 친해지려고 했다. 수업 시작 전과 수업 끝나고 큰 목소리로 인사하기, 쉬는 시간 마다 질문거리 만들어서 찾아가기 등 그렇게 선생님과 점점 친해지면서 큰 힘을 얻었다.

하지만 내 자신의 힘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자신한 시험보기 일주일 전에 생긴 일이었다. 그렇게 시험을 본 시험의 결과, 남들이 어렵다는 영어를 95점 맞았지만, 그렇게 발버둥을 쳤던 국어의 충격적인 점수를 털어내지 못했다. 결국에는 4개월간 폐인생활로 들어간다.

* 2007년 1월~9월(닥치는 대로 각종시험 응시)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마음만 급해지고 허둥지둥 중심을 못 잡고 있었다.

국회사무처 10급 방호직(100:1), 10급 사무보조직, 조무직, 시·도 소방직 시험 등 닥치는 대로 봤다. 난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남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흔히 얘기하는 것 같던 ‘1문제 차이로 떨어졌어.’ 하지만 직접 국회방호직, 사무보조직 모두 1문제 차이로 연이어 낙방을 하니 원 투 스트레이트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니야 애써 외면했지만 눈을 돌려 바라본 나의 가정은 아빠의 존재도 알지 못하는 아들 녀석의 가슴을 울리는 울음소리뿐이었다.

* 2007년 9월~12월(자동차 영업사원)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이미 이성을 상실한 나는 또 다시 시골 고시원에 들어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던 중 아들녀석이 나에게 다가왔다.

“어부어부~ 나랑 놀아. 가치”

왈칵~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그래 내가 네 자랑스러운 아버지였지. 아버지….

이 못난 나를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따라오는 아들 녀석. 아들 녀석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 이제 시험 준비 안 할래. 너 돈벌어다 줄께. 아주 많이….”

그렇게 문을 두드린 자동차 영업. 하지만 순진했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남들과 다른 영업을 하기 위해 스파르타쿠스 코스프레를 주문하고 영업을 했다. 주문한 옷이 도착하기 하루 전, 이 삶은 나의 삶이 아니란 걸 깨닫고 도착한 스파르타쿠스 옷은 최종합격한 후에 개봉하기로 다짐을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5. 어둠의 터널 속 그 끝에서 한줄기 빛을 보다(2008년~2009년)

정신을 차리고 내 위치를 확인하니 33살. 소방응시 연령 마지막이 (군 2년 이상 2년 연장) 35세. 2년 남았다. 이젠 경제적으로도 한계가 온 상황. 아기 기저귀 값이라도 보태며 공부를 해야 했다.

하늘이 내게 정말 소방관을 하라는 계시일까? 대형면허를 가지고 2년 이상 경력을 쌓으면 소방운전 특채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길로 마을버스 회사에 이력서를 들고 뛰어갔다. 온종일 운전대를 잡느라 몸은 비록 피곤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최소한의 역할을 하고 있음에, 그리고 2년 후의 나의 마지막 희망 때문에 매일매일 행복하고 감사하게 생활했다.

그러던 중 버스를 운전하면서 두 번의 인사사고를 경험한다. 물론 사고가 나면 버스공제조합에서 보험처리를 해 주지만 그렇게 되면 운전기사는 바로 해임이 되고 마는 상황. 힘이 없는 영세한 마을버스기사일수록 더욱 그렇다. 정말 나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까지도 담보를 하면서 하는 일을 하면서 죽을 뻔한 사고를 2번 당하니 운전대 잡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죽어도 2년 경력은 채워야 했기에 다른 곳을 알아보다 자체소방대에서 운전원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운 좋게 그 곳으로 이직해 남은 경력을 무사히 채웠다.

6. 나이제한 마지막에 본 마지막 시험 그리고 영광의 순간(2010년)

이제 종착점에 왔다. 내 나이 35세. 나이제한에 걸려 더 이상 수험생활을 하고 싶어도 이젠 하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해서 지나간 시간을 너무나도 잡고 싶고 되돌리고 싶었다. 그래 이제 마지막 연소의 시간이다. 내 모든 걸 다 쏟아붓자. 다 던지자.

2010년 3월 20일(토)

전날 시험장에 내려가 근처 여관에서 잠을 청했지만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잠을 설쳐 2시간 밖에 못 잤지만 이상하게 이상하게 기분은 최상이었다.

시험시작 종이 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그리고 성호를 그었다. 이게 내 마지막 시험이구나.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마지막 시험을 치렀다. 시험 끝나는 종이 울리고 감독관이 시험지와 OMR카드를 걷고 수험생들이 차례로 나간 그 자리에 한동안 멍하니 홀로 앉아 있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끝이구나.’ ‘하고파도 더 이상 할 수 없구나.’

눈을 돌려 창 밖을 보니 비가 내리는 창 밖. 희뿌연 풍경을 배경삼아 나의 지나간 10년간의 수험생활들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 내 모든 걸 다 던졌어. 완전연소했어. 그럼 됐어. 고생했어. 수고했어.’

그렇게 나는 나에게 칭찬과 위로를 하며,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속.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7. 10년간의 항해를 마치고 또 다시 새롭게 출항하는 배 위에서(2010년~)

10년간의 수험생활들을 남들에게 알린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못다 한 얘기도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를 지탱해 주는 간절한 꿈을 가지고 오늘도 희망을 노래하는 우리들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주변의 수 없는 사람들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루를 시작할 때 비장하게 시작했고, 처절하게 살려고 노력했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가장 결정을 잘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에 따르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용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현명하게 포기할 때, 성공한 사람들은 미련하게 참았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졸렬했던 삶의 흔적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절했던 10년간의 소중한 교훈을 가슴에 안고 이제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새롭게 항해하려 합니다. 항상 겸손하고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공직자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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