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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서 가장 기억할만한 <춤>그림은?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③ 이중섭 VS 마티스

2014.06.27 변종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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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에서 ‘춤’을 주제로 한 유명한 그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루벤스의 <춤추는 농부들>, 놀데의<황금 송아지를 둘러싼 춤>, 로트렉의 <물랭루주에서의 춤>, 뭉크의 <생명의 춤>, 드가의 <무대 위의 무희>, 마티스의 <춤Ⅱ> 등이 떠오른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을 꼽는다면 마티스의 <춤Ⅱ>일 것이다. 야수파의 대표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춤Ⅱ>는 <춤Ⅰ>과 함께 ‘단순한 형태와 세 가지 색만으로도 가장 조화로운 장식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마티스의 회화론이 실현된 그림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루벤스 <춤추는 농부들>, 놀데 <황금 송아지를 둘러싼 춤>, 로트렉 <물랭루주에서의 춤>, 뭉크 <생명의 춤>, 드가 <무대 위의 무희>, 마티스 <춤Ⅱ>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루벤스 <춤추는 농부들>, 놀데 <황금 송아지를 둘러싼 춤>, 로트렉 <물랭루주에서의 춤>, 뭉크 <생명의 춤>, 드가 <무대 위의 무희>, 마티스 <춤Ⅱ>

그렇다면, 한국미술에서 마티스의 <춤Ⅱ>와 비교할만한 그림은 어떤 것이 있을까?

아마도 ‘한국의 야수파화가’, ‘춤 그림’, ‘비슷한 구성’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이중섭(1916~1956)의 <가족의 춤>일 것이다. <가족의 춤>은 <황소>시리즈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지만, 이중섭이 그림에 담고자한 세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한국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이중섭과 마티스의 예술인생을 ‘춤’이라는 같은 주제의 작품으로 들여다보자.

■ 즉흥적 표현 VS 의도적 구성

왼쪽 : 마티스 <춤Ⅱ>, 1909-1910, 260×391cm, 캔버스에 유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 오른쪽 : 이중섭 <춤추는 가족2>, 1953-1954, 22.7×30.4cm, 종이에 유채
왼쪽 : 마티스 <춤Ⅱ>, 1909-1910, 260×391cm, 캔버스에 유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 오른쪽 : 이중섭 <춤추는 가족2>, 1953-1954, 22.7×30.4cm, 종이에 유채

두 화가의 그림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춤의 형태이다. 두 그림 속 인물들이 추는 춤은 원무(圓舞)이다. 원무는 동·서양을 떠나 춤의 가장 원시 형태로 힘과 정신의 화합, 조화를 의미한다.

여기에 벌거벗은 몸은 태초 인간의 본바탕을 상징하며 순수한 자연회귀를 뜻한다. 두 그림 모두 즐거움에 취한 춤의 정수를 표현하고 있지만, 마티스의 춤이 어떤 의식이나 주술 동작에 가깝다면, 이중섭 그림의 춤은 그야말로 가까운 사람끼리 어울리는 즐거운 놀이 동작에 가깝다.

두 그림의 차이는 조형성에서 두드러진다. 마티스의 ‘춤’이 색의 조합, 인물배치, 동세 등 모든 구성과 표현이 철저히 계획한 의도의 결과물이라면, 이중섭의 ‘춤’은 즉흥적 감흥, 즉 내면의 감정에 충실한 그림이다.

이중섭은 의도한 구성보다는 가족과 춤추는 즐거운 장면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가족이라는 일체감과 억지 없는 춤동작이 어울려 화면전체가 흥겹고 생동감이 넘친다. 마티스 춤의 템포가 ‘조금 느리게(Andantino)’나 ‘보통 빠르게(Moderato)’라면, 이중섭의 춤은 ‘조금 빠르게(Allegretto)’나 ‘빠르게(Allegro)’로 느껴진다.

이 같은 차이는 마티스가 추구한 색의 조화나 장식성보다 이중섭의 강렬한 붓 터치와 즉흥적 감흥이 관람자의 마음을 일순간 동요시키는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 생동감은 이중섭 작품에 나타나는 예술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중섭 <춤추는 가족1>, 1953-1954, 41.3×28.9cm, 종이에 유채와 에나멜
이중섭 <춤추는 가족1>, 1953-1954, 41.3×28.9cm, 종이에 유채와 에나멜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2>와 마티스의 <춤Ⅱ>가 지닌 정감의 차이는 같은 주제를 그린 전작에서도 드러난다.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1>은 가로형의 <춤추는 가족2>와 다르게 세로형이지만, 인물구성이나 위치에는 큰 변화가 없다.

<춤추는 가족1>의 두드러진 특징은 붓보다 나이프를 활용해 그린 점이다. 그래서 인물과 배경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대신 붓과는 다른 표층의 독특한 질감 맛을 지녔다.

결과적으로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1>과 <춤추는 가족2>는 같은 주제지만, 화면방향, 질감, 표현방식 등에서 각기 개별성이 뚜렷한 그림이다.

마티스 <춤Ⅰ>,1909, 250.7×390.1cm, 캔버스에 유채, 뉴욕현대미술관
마티스 <춤Ⅰ>,1909, 250.7×390.1cm, 캔버스에 유채, 뉴욕현대미술관

반면, 마티스의 <춤Ⅱ>는 <춤Ⅰ>과 연계성이 깊다. 구도, 크기, 방향, 색채, 동세, 기법 등 조형요소가 특별한 차이 없이 하나의 틀로 양식화한 느낌이 짙다. 마티스의 그림은 즉흥적으로 감정을 표출하기보다 감각을 응축시켜 의도한 조형양식으로 구성한 셈이다.

■ 그리움의 표상 VS 실험적 구성회화

이중섭과 마티스 그림의 조형양식 차이는 그림제작 동기와도 연관 있다.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은 제작시기로 볼 때 6·25전쟁 기간 피란생활의 힘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이후 그린 그림이다.

이중섭은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한국에 홀로 남아 그림을 그렸다. 제주도 서귀포와 부산 범일동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은 긴 여운을 남겨 이중섭이 1953년부터 1956년 죽기 전까지 제작한 모든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춤추는 가족>은 이중섭 개인의 삶에 바탕을 둔 ‘그리움의 표상’이다.

마티스의 <춤>은 주문제작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1909년 러시아 최고의 미술품 애호가로 유명했던 섬유왕 세르게이 시추킨(Sergei Ivanovich Shchukin)이 자신의 저택 계단 벽을 장식할 기념비적 그림을 마티스에게 주문했는데, 그 결과물이 <춤>이다.

마티스의 <춤>은 카탈루냐인 어부들이 해변에서 춤추는 모습의 기억, 또는 러시아발레단 과 연관이 있지만, 핵심은 독특한 조형성에 있다.

<춤>은 극단적인 조형성으로 당대 미술계의 혹평은 물론 그림을 주문한 시추킨마저 불쾌함을 느낄 정도로 철저히 마티스 양식의 그림이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에 ‘퇴폐미술’로 낙인찍혀 고난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현대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인정받으며 <춤>의 예술성을 재평가 받은 것에서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당대의 평가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마티스의 <춤>은 색의 조화를 탐구한 ‘실험적 구성회화’이다.

왼쪽 : 마티스 <달팽이>, 1953, 색종이, 287×288cm / 오른쪽 :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 1951년 합판에 유채, 56×92cm
왼쪽 : 마티스 <달팽이>, 1953, 색종이, 287×288cm / 오른쪽 :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 1951년 합판에 유채, 56×92cm

마티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 상황을 겪었지만, 예술의 목표를 눈으로 느끼는 아름다움보다 관람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에 두었다. 그가 미술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기쁨, 환희, 순수, 평온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이중섭도 마찬가지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시대 상황으로 고향을 잃고, 가족과 이별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언제나 꿈과 희망이 가득한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과 마티스의 ‘춤’ 그림은 작품제작 시기와 제작 동기가 다르고, 작품 크기도 수십 배 이상 차이가 난다. 하지만 두 그림에는 시공간을 초월한 닮은 점이 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과 ‘약동하는 생명의 리듬’이다. 두 그림이 지닌 진정한 힘이다.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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