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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열차표를 끊으며

2019.08.21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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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 년에 두 번 꼭두새벽에 일어나 여행사에 간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다. 설과 추석 열차표를 예매하는 일은 가장인 나의 몫이다. 손놀림이 빠른 아들에게 인터넷으로 예매해보라고도 해봤고 나도 시도해봤지만 원하는 시간의 차표를 구하는 게 결코 녹록치 않았다. 차라리 내가 조금 고생해도 여행사가 가장 확실하고 편했다. 코레일 조사를 보면 온라인 예매 비율이 93%라는데, 나는 왜 그 축에 끼지 못하는가 자책도 해봤지만 이 과업도 나름 재미있다.  

사실 ‘열차(列車)’보다는 ‘기차(汽車)’라고 말해야 왠지 더 정감이 있다. ‘고향 가는 열차’보다는 ‘고향 가는 기차’가 느낌이 더 오지 않는가. ‘열차표’보다는 ‘기차표’가 더 친근하다. 군대 가는 건 김민우의 노래 때문에 ‘입영열차’로 굳어졌지만, 코레일이나 언론도 이제 기차라고는 잘 안 쓴다. 어릴 적 고향 동네에서 뛰놀던 칙칙폭폭 증기기관차가 그립다.  

나는 집에서 그닥 멀지 않고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승차권 판매 대리점 여행사를 찾아내 매번 그리로 간다. 추석 경부선 예매가 시작된 8월 20일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다행히 그 이른 시간에 다니는 버스가 있다. 버스 안에는 의외로 열 명도 넘는 승객이 앉아있다. 슬금슬금 그들을 곁눈으로 살피며 상상해 본다. 하루 노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는 별로 없다. 무슨 일을 하는 분들이기에 이 새벽부터 움직여야 할까.

여행사에 도착한 시간은 5시 40분. 여행사는 문을 열지 않았고 사람들은 도착한 순서대로 정직하게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나는 열네 번째였다. 몇몇 아주머니는 얼마나 일찍 서둘렀는지 아니면 밤을 새웠는지 아예 여행사 건물 로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다. 한 여행사를 정해서 오래 다니다보면 낯이 익은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고 그들의 고향이 어딘지도 안다. 서로 눈인사를 나누며 그간 잘 지내셨냐며 아는 체를 한다.

이번 추석부터는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 코레일이 발권 시간을 오전 8시로 한 시간을 당겼다. 예전 같으면 세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는데 한 시간을 벌어줬으니 다행인데, 왜 시민 편의의 이런 행정을 진작 하지 않았을까.

순서는 적어놓았으니 문제는 이제부터다. 두 시간 이상을 어떻게든 혼자 보내야 한다. 책을 가져온 적도 있고 휴대폰으로 뉴스를 따라잡으며 시간을 보낸 적도 있지만 왠지 편치 않고 산만하다는 걸 체험적으로 안다. 나는 도시의 새벽 풍경을 택한다. 기실 이른 새벽 도심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여행사 근처에 큰 공원이 있다. 이름도 날렵한 보라매 공원이다. 새벽 6시의 공원은 부지런하고 소박하고 건강한 시민들로 나름 부산했다. 

이어폰을 끼고 원형 운동장을 몇 바퀴씩 걷는 아주머니, 숲 속에서 주먹으로 배를 연신 두드리는 아저씨, 나무 등걸에 등을 비벼대는 할아버지, 뒤로 걷는 할머니, 단체로 소리를 질러가며 아침 체조하는 사람들, 유니폼 차림에 신나는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을 하는 동호회원들…. 이상한 팔 동작을 하며 원을 그리며 수련하는 파룬궁파 같은 이들이 나를 보고 손짓을 한다. 공원 축구장에는 조기축구회 회원들이 운명의 일전을 벌이고 있다. 공원에는 대체로 중년 이상의,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손을 꼭 잡고 산보하는 노부부의 표정은 행복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나온 분들도 여럿 봤다. 화장실은 깨끗하고 냄새가 나지 않았다.

붉은 꽃을 터뜨린 배롱나무 아래 벤치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아침 수다를 즐기고 계셨는데, 엿들어보니 나이 먹으며 키가 자꾸 줄어든다는 이야기였다.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소녀 같다. 곳곳에는 이름 모르는 빨강 노랑 파랑 보라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아직 늦더위는 남았지만 새벽 바람은 이미 온도와 결이 다르게 얼굴을 쓰다듬는다.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은 잊지 않고 배설물을 치웠고, 자원봉사자 같은 분들이 휴지나 쓰레기를 치웠다.    

여행사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부지런한 야쿠르트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고, 식당 앞에서 양파와 감자 박스를 내리는 알통 나온 젊은 반트럭 기사를 만났다. 해장국집을 빼고는 식당들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지만,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과 찜질방과 커피점이 있다. 참 살기 편한 나라다. 두어 평 남짓한 작은 커피점에서는 알바생 같은 청년이 열심히 커피를 내리면서 망고스무디를 만들고 있다. 아메리카노가 1,500원이니 참 싸다. 커피점도 오늘 새벽은 열차표 예매객  덕분에 특수다. 큰 길에는 비로소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으로, 지하철 역으로 앞만 보며 총총 걸어가고 있다. 그래, 나도 수십 년 동안 그랬지.

발권 30분 전에 여행사에 돌아오니 30명 정도가 줄을 서고 있었다. 왠지 미안했다. 슬며시 내 순번에 가서 줄을 섰다. 여행사 직원이 귀성열차 번호와 원하는 시간 세 개, 출발역, 도착역, 탑승객 수를 적어 내라며 미리 준비한 표를 일일이 나눠줬다. 8시가 가까워지자 긴장감이 돈다. 다들 여행사 데스크 앞에 번호에 맞춰 줄을 가지런히 섰다. 8시 3분 전, 여행사 여직원은 연신 손가락 운동을 하며 모니터를 뚫어지게 응시한다. 마치 전투를 앞둔 전사처럼 결연한 표정.

8시 정각 다다닥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한쪽에서는 그토록 기다리던, 고향역 이름이 선명한 열차표가 프린트돼 나오고, 그 옆에서는 요금을 계산한다. 나는 이번에도 내가 원하는 날짜와 시간의 차표를 끊을 수가 있었다. 동반석까지 성공해서 15%나 할인받아 의기양양했다. 승차권을 손에 받아쥔 이들의 마음은 벌써 고향역에 가있다. 표정이 밝고 푸근하다.  

나는 아들로서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오늘 미션을 실수 없이 완수했다.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어머니 저 차표 잘 끊었어요.” “그래, 새벽에 나오느라 참 애썼구나.”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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