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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형제’에 대해 알지 못한 두세 가지 것들

[영화 A to Z, 시네마를 관통하는 26개 키워드] ⓛ Lumiere Brothers(뤼미에르 형제)

2020.06.05 이지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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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프랑스, 이 두 나라에서 영화는 서로 다른 관행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동전 주입식 ‘페니 아케이드’를 통해 번졌던 것과 달리,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는 좀 더 부르주아적 위치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호텔 스크리브’로 변한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는 세계 최초의 ‘영화 공개 상영회’를 진행했다. 시네마토그라프의 준말인 ‘시네마’의 역사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파리에서는 ‘카페, 공연장, 카지노, 후원자들의 모임’ 등지에서 영화를 상영했다. 그런 점에서 당대 프랑스의 영화 소비문화는 다소 계급적인 측면을 보인다.

미국의 상영 시스템이 니켈로디언 등 ‘고정 장소’에서 진행되었던 비교해서 유동적으로 장소가 바뀌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영화 카메라 및 영사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Personen, Portrait, Portr, Mann Mikroskop, Brille, Oberlippenbar,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영화 카메라 및 영사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Personen, Portrait, Portr, Mann Mikroskop, Brille, Oberlippenbar,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시네마토그라프의 유용성

상영회 이후로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이 개발한 시네마토그라프 장치를 무려 200대나 동시에 주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운영자들을 모집해 촬영 기술을 전수하는 과정을 거쳤다. 빠른 시간 안에 영화가 세계시장을 겨냥한 ‘사업’이 될 것을, 그들은 예측했던 것 같다.

형 ‘오귀스트’와 동생 ‘루이’가 개발한 시네마토그라프는 한 마디로 실용적 장치였다. 이미지를 ‘촬영하고, 현상하고, 영사하는’ 과정을 이 한 대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아침에 촬영한 영상을, 당사자의 코앞에서 밤 시간에 상영하는 것이 가능했다. 피사체로 렌즈 앞에 선 사람들은 감탄했으며, 높은 비용을 지불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프로젝터, 스크린, 검은 방, 그리고 방 안에 열 명, 백 명, 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프로젝터가 켜졌고, 스크린이 밝아졌고, 이미지가 춤췄다. 그렇게 천 명의 사람들이 하나가 됐다”

오귀스트 뤼미에르의 회고록을 살피면, 그들이 예측한 시네마의 가능성이 단지 산업적 측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집단 인식’ 능력을 갖춘 영화 상영 시스템이, 기존의 사진 재현기술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그들은 보았던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을 ‘예술’로서 영화의 첫 걸음이라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 ‘리옹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과 ‘열차의 도착’

공식적인 ‘세계 최초의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리옹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년작)이다. 그리고 이들 형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열차의 도착>(1896년작)이다.

다소 단정적으로 들리지만, 이 두 가지 내용은 학문적 합의가 이루어진 기록이다. 그럼에도 세부 내용은 논란이 있다. 공인된 ‘뤼미에르 형제 전문가’ 베르나르 샤르데르의 언급을 중심으로, 몇 가지 숨겨진 이야기들을 적는다.

① 뤼미에르 형제의 초기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예표'로 자주 언급된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 ‘아니다’. 우리가 본 화면들이 모두 리메이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형제가 처음에 찍은 <리옹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는 공장 앞을 지나는 ‘마차’가 등장한다. 이후의 또 다른 버전에도 마찬가지로 마차가 지나간다.

하지만 현재 남은 버전들은 모두 ‘공장 밖을 나오는 사람들’만 출연한다. 최초의 다큐멘터리 버전은 사진만이 남아있다.

② 뤼미에르 형제의 프레이밍은 한 마디로 '천재적'이었다. 1966년 파리 박람회에서 <열차의 도착> 촬영 당시를 구성한 ‘기차역 도면’이 전시된 적 있었다.

이 문서를 토대로 카메라 위치를 가늠하면, 완성된 프레이밍이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현명한’ 선택이란 점이 드러난다.

사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에서 카메라는 전부 ‘픽스’되어 있다. 대신 프레임 속 인물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특히 <열차의 도착>에서, 열차 사이즈는 롱쇼트에서 미디움쇼트를 거쳐, 클로즈업에 가까운 화면으로 변화한다.

③ <달나라 여행>(1902년작)을 찍은 조르주 멜리에스의 촬영방식과 뤼미에르 형제의 촬영방식은 서로 정반대에 가깝다. 멜리에스는 세트를 만들어서 ‘정면’에서 화면을 찍었다. 그의 프레이밍은 전적으로 가상의 배경을 이용했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현실을 이용했다. 그리고 깊이를 강조했다. 당시 촬영 오퍼레이터 교육은 루이 뤼미에르가 맡았는데, 그는 사진미학의 핵심인 ‘소실점의 신성불가침한 규칙’을 강조했다고 한다.

④ ‘프로젝션’이란 특이점을 제외하면 ‘세계 최초의 영화’ 타이틀은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필름’을 이용한 무빙 이미지는 프랑스의 ‘루이 르 프랭스’와 미국의 ‘에디슨’이 뤼미에르 형제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참고로, 루이 르 프랭스는 미스테리한 실종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때 그의 죽음이 에디슨의 모략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종 시점이 미국에서 필름을 시연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⑤ 오귀스트 뤼미에르는 이후 영화를 그만두고 ‘의학자’의 길을 걸었다. 2차 대전 이후 그는 생체의학자로서 ‘결핵, 암, 신경증, 피부병, 천식, 고혈압’ 등 의학 분야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또한 의료 장비 개발에도 업적을 남겼다. 훗날 자신의 영화 열정이 ‘과학적 호기심’에 가까웠다고 오귀스트는 자서전에 고백한 바 있다.

사진업에 몰두했던 아버지 ‘앙투완 뤼미에르’에게 이어받은 사진촬영 기술을 토대로, 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를 위한 현대예술의 길을 제시했다.

그들이 만든 한 컷짜리 짧은 영상물을 보면서 영화의 본질에 관해 생각한다. 초기영화의 형식과 프레임, 담대한 여백의 아름다움이 ‘영화란 무엇인가’를 되뇌게 만든다.

깊이에의 매혹, 모두를 아우르는 환각의 힘이 ‘빛’을 통해 전해진다.

이지현

◆ 이지현 영화평론가

2008년 '씨네21 영화평론상'으로 등단했다. 씨네21, 한국영상자료원, 네이버 영화사전, 한겨레신문 등에 영화 관련 글을 썼고, 대학에서 영화학 강사로 일했다. 2014년에 다큐멘터리 <프랑스인 김명실>을 감독했으며, 현재 독립영화 <세상의 아침>을 작업 중이다. 13inoch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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