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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르네상스 도시성벽으로 둘러싸인 풋치니의 고향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이탈리아/룩카(Lucca)

2018.10.05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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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지방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달려 1시간 여 만에 룩카 역에 도착했다. 이탈리아에서 룩카(Lucca)는 도시이름이고 루카(Luca)는 사람이름이다. 피사 가까이에 있는 조그만 도시 룩카는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서 관광객들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곳은 풋치니의 고향이니 오페라 팬들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베르디, 바그너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그의 오페라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미를 다루고 있는데 애절하고 우아한 선율과 함께 관현악을 매우 효과적으로 도입해 장면마다 적절한 색채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또한 그의 무대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은 극적 효과를 계산하여 관객을 감동시킨다.

공원화된 룩카의 도시 성벽. 성벽 너머로 산 마르티노 대성당의 종탑이 보인다.
공원화된 룩카의 도시 성벽. 성벽 너머로 산 마르티노 대성당의 종탑이 보인다.

역 밖으로 나오면 붉은 벽돌로 세운 우아한 르네상스 성벽과 마주친다. 룩카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4킬로미터가 넘는 이 도시성벽은 너무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500년 전에 세워졌다고 믿기 힘들 정도이다. 그것은 성벽을 쌓은 후 외부의 침입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 도시성벽을 따라 산책로와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룩카는 이 성벽이 있었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었으며, 옛날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룩카 시내에는 주변의 피렌체, 피사 같은 도시와는 달리 우리 눈을 압도하는 규모의 건축물은 별로 없지만 큰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아기자기한 맛을 골목 구석구석에서 느낄 수 있다. 룩카의 구심점은 산 마르티노 대성당이다. 12세기 말에 세워진 이 성전은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물 중에서 걸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풋치니 가문이 4대에 걸쳐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던 산 마르티노 대성당.
풋치니 가문이 4대에 걸쳐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던 산 마르티노 대성당.

바로 이 성당에서 풋치니 가(家)는 4대에 걸쳐 오르가니스트로 활약했다.

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이던 풋치니의 아버지는 풋치니가 다섯 살 때에 죽었고, 그 후임으로 풋치니의 외삼촌이 임명되었다.

단, 어린 풋치니가 자라면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그 당시 집안의 직업을 자식이 꼭 이어 받는 관습이 있었는데, 예술적인 재능을 요하는 분야는 특히 더 했다.

그리고 어린 풋치니가 미래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는 것은 풋치니가(家)의 음악가들이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 마르티노 대성당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미터 정도 거리에는 풋치니가 태어나 소년 시절을 보낸 집이 있고 그 앞 광장에 풋치니의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이 집은 그의 어머니가 죽은 후에 팔렸다가, 풋치니가 유명해진 다음 다시 구입한 것으로 지금은 풋치니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풋치니는 이곳에서 1858년에 태어났다.

그는 평범한 소년으로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제자한데서 음악을 배우지만 이 선생은 교육자로서 성격이 좋지 않은데다가 교육방법도 너무나 엄격했기 때문에 오히려 풋치니의 음악적 성장을 저해할 정도였다.

풋치니의 음악적 잠재력을 믿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아버지의 다른 제자인 안젤로니에게 보냈는데 그의 교육방법은 완전히 달랐다. 안젤로니는 먼저 풋치니의 개성을 파악하고 나서 그가 음악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했다.

풋치니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집 앞 광장에 세워진 풋치니 기념상.
풋치니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집 앞 광장에 세워진 풋치니 기념상.

안젤로니의 덕택으로 풋치니는 16세쯤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하여 산 마르티노 대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게 되고 또 오르간으로 작곡하기도 했는데 이때 그의 피 속에는 드라마의 재능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안젤로니는 이를 간파하고 그를 베르디의 오페라 세계로 인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풋치니는 피사에서 공연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보러 자그마치 32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걸어갔다. 이 오페라를 보고 풋치니의 마음속에는 무의식중에 싹트고 있던 오페라에 대한 숨겨진 열정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성벽 밖의 세상으로 눈을 완전히 돌리게 된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성벽 안의 시가지가 그가 상상하던 세계의 전부였다.

풋치니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풋치니의 초상화와 책상.
풋치니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풋치니의 초상화와 책상.

그는 1880년에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해 퐁키엘리의 지도를 받게 되고 밀라노에서 갖은 고생 끝에 명성을 얻은 다음에는 밀라노 음악원 교수직 등과 같은 공식직함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룩카 서쪽근교 토레 델 라고(Torre del Lago)라고 하는 인적이 드문 호숫가 마을에서 1891년부터 30년 동안 아무런 공식기관에 적을 두지 않고 철저하게 자유인으로 살았다.

그러니까 그는 자연으로 둘러싸인 그 곳에서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는 대부분 그 곳에서 완성했다.

*Puccini는 이탈리아 현지 발음에 따라 ‘푸치니’가 아니라 ‘풋치니’로 표기했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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