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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산가족협회 심구섭 회장의 가족 생각, 고향 생각

“명절에 더 그리운 어머니…목이 메이고 가슴이 먹먹해져요”

위클리공감 2015.09.26

‘어머니는 1967년 6월 21일 북한의 집에서 뇌출혈로 애석하게도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동생들은 아직 살아 있다고 하고요. 분단 세월 45년(편지 받은 해 기준)에 우리 가정이 아직도 헤어져 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반드시 통일이 되어 가족의 재결합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남북이산가족협회의 심구섭(81) 회장이 내민 한 장의 오래된 편지. 찢어진 곳을 테이프로 붙인 편지 곳곳에 번진 눈물 자국에서도 오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죽은 줄 알았던 북한의 남동생이 미국 국적을 가진 고향 선배를 통해 그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를 받은 때가 1992년.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정평군이다.

남북이산가족협회 심구섭 회장.
남북이산가족협회 심구섭 회장.

“펑펑 울었습니다. 열네 살 때 헤어진 어머니가 그저 살아계시기만을 바라왔는데, 돌아가실 때 제 이름을 부르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서 편지에 지금도 그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그가 간직한 마지막 가족사진은 1948년 추석을 지내고 남한으로 내려오기 직전 고향에서 찍은 것이다. 어머니와 장남인 그 자신, 세 살 터울의 남동생과 열 살 어린 여동생, 집에서 살림을 돌보던 식모아이까지 사진으로 남았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아버지가 북한 치하에서 반동으로 찍혀 1946년 먼저 남한으로 가셨어요. 반동가족으로 살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남한으로 내려오기 보름 전쯤 찍은 사진이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이 되고 말았지요.”

곱게 쪽진 머리를 한 사진 속 젊은 어머니는 동생에게 별세 소식을 듣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그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 역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속에 간직한 큰아들 모습이 열네 살 까까머리 중학생 그대로였을 것이다.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 심구섭 회장 부모님, 할머니, 남동생이 함께 찍은 사진.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 심구섭 회장 부모님, 할머니, 남동생이 함께 찍은 사진.

1946년 찍은 가족사진
곱게 쪽진 젊은 어머니

어머니는 장남인 그와 여동생을 남한으로 데리고 나오면서 둘째 아들은 그대로 고향에 남겨두고 왔다. 그래서 어머니가 남동생을 마저 데려오겠다고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고향으로 향한 것이 남에는 아버지와 장남이, 북에는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이 남게 되는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때는 전쟁이 날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어요. 며칠이면 어머니가 남동생 데리고 내려오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6·25전쟁이 나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된 겁니다.”

심 회장은 이산가족을 세 가지 부류로 분류했다. “6·25전쟁이 나기 전 38선을 넘어온 사람들, 흔히 말하는 ‘삼팔따라지’가 있고 전쟁 때 내려온 피난민이 있어요. 그리고 요새 나온 탈북자들입니다.”

그는 고향인 정평군의 신상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얼마 안 돼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후 아버지가 남하해 살고 계시던 강원도 강릉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됐을 때 6·25전쟁이 발발해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 그리고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이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북진을 시작했을 때 그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학도병에 참전했다.

심구섭 회장이 고향을 떠나기 보름 전쯤 촬영한 가족사진. 아버지는 이미 남한으로 내려가 부재 중인 가운데 심구섭 회장과 어머니, 남동생과 어린 여동생, 집에서 살림 돌봐주던 식모아이까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심구섭 회장이 고향을 떠나기 보름 전쯤 촬영한 가족사진. 아버지는 이미 남한으로 내려가 부재 중인 가운데 심구섭 회장과 어머니, 남동생과 어린 여동생, 집에서 살림 돌봐주던 식모아이까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고향에 너무나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꼭 뵙고 싶었지요.”

하지만 끝내 고향에 닿지 못했다. 군 생활이 1년쯤 됐을 때 학도병들에게 학교에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강릉으로 돌아가 복교를 해 학업을 계속했고, 이후 공무원이 되어 오랫동안 공직에 있다 퇴직했다. 남한으로 와 강릉농업학교 교사를 하다 강릉의 영동신문사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한 부친은 다행스럽게 북한의 아들, 딸 생존 소식을 들으신 뒤 돌아가셨다.

“원래 고향 지인들을 통해 전해 듣기를 제 동생의 시신을 어머니가 거둬가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동생은 죽고 어머니는 살아계시리라 싶었는데….”

동생 편지를 통해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은 지도 벌써 20여 년이 지났지만, 심 회장은 어머니 이야기에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메었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밥 한 끼도 해드린 적이 없다는 게 가슴에 너무 맺혔어요. 그래서 북한 출입이 가능한 선배를 통해 동생에게 돈을 보내 어머니 비석을 세워드리도록 했습니다. 북한에는 돌 비석이 없어 시멘트 비석을 세워드렸어요. 장남이 세워드린 것이라고 비석에 새겨넣고요.”

지인을 통해 북한의 동생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몇 년 뒤, 중국인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누군가를 바꿔주었다.

“저 학섭입니다.”

심 회장의 부탁을 받은 중국인 지인의 초청장을 받아 북한에 사는 동생이 중국으로 나온 것이다. 이름을 확인한 뒤 서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흐느낌밖엔. 결국 울음을 달래느라 일단 전화를 끊었고, 10분 뒤 다시 전화 통화를 했다.

중국까지 동생이 나왔다는데, 어떻게든 만나고 싶었다. 당시가 한·중 국교 수교 전이어서 심 회장은 2주를 기다려 중국 비자를 받아 중국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났다. 50년 만에 상봉한 두 형제는 공항에서 그저 끌어안고 눈물부터 흘렸다. 그 모습을 중국인 지인이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심 회장은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북한의 남동생이 손글씨로 적어 보낸 새해 연하장.
북한의 남동생이 손글씨로 적어 보낸 새해 연하장.

남북이산가족 상봉 앞서 생사 확인 시급
한 번의 만남으로 그치지 않아야

심 회장은 1998년부터 자신과 같은 이산가족들을 위해 남북이산가족협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이 협회는 2012년 2월 법인으로 승격했다.

협회가 하는 업무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이산가족의 교류, 생사 확인, 편지 왕래 등의 활동이고, 둘째는 북한에 있는 이산가족에 대한 물품 지원이며, 셋째는 그동안 남북 간 합의된 상봉 행사를 통해 이산가족 상봉을 한 사람들 간의 편지와 물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곳 협회에서 모은 편지나 물품을 중국으로 보내 북한으로 들여보내면 한 달이나 한 달 반 쯤 뒤 북한의 가족에게 전달되어 답장도 온다고 한다.

“이번에 남북 간 합의로 이산가족 상봉이 1년 8개월 만에 재개된다는 소식이 무척 반갑습니다. 고령의 이산가족들을 생각해 더 많은 이산가족이 상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심 회장은 “지금 이산가족 6만5000명 가운데 90세 이상이 6300명이며, 80세 이상은 더욱 많다”면서 100~200명씩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생사 확인부터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그리고 편지 교환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편지 교환이 어려우면 남북한이 합의해 일종의 규격엽서를 만들어 간단한 소식이라도 주고받게 해야 합니다.”

이미 상봉 행사를 가진 이산가족에 대한 공적인 후속조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북한 합의된 상봉 행사를 통해 만난 사람이 남북한 합해서 3900명입니다. 모처럼 만난 사람들이 계속 편지를 주고받고, 물건을 교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 없이 일회성으로 만난다면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산가족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생사 확인부터 해주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심 회장은 2남 1녀를 두었다. 고향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 속 어머니는 여전히 검은 머리를 하고 있지만 자신은 이제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설날, 추석날이면 새벽에 혼자 일어나 조용히 문밖에 나가요. 그리곤 멀리 북녘 하늘을 바라보지요.”

심 회장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센치해지네(우울해지네)” 하며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 고향에 가면
하고 싶은 소망 한가지

“저희 어머니는 기독교 신자였어요. 광복 전 경성사범 등과 함께 3대 여고로 꼽히던 함흥 영생여고를 졸업하셨지요. 가장 기억나는 어린 시절 추억이 눈 오던 크리스마스 날 어머니께서 찬송가를 부르시던 모습이에요.”

부친이 광복 이후 남하해 어머니가 반동가족이라고 찍혀 고생을 하셨는데, 그가 인민학교(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해 어머니가 반동가족임에도 대표 연설을 하게 해드린 게 어머니 살아생전 유일한 효도를 한 기억으로 남는다고 했다.

그리고 추석만 되면 그의 가슴에 되살아나는 추억이 하나 있다.

“고향을 떠나온 게 추석 지나서였어요. 어머니께서 저와 여동생을 데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를 찾아 뭔가 적은 종이를 그릇에 담아 땅에 묻으시며 언젠가 제가 다시 고향에 오게 되면 파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두 분 묘소 앞에 엎드려 ‘언제 우리가 만날 날이 다시 오겠습니까’ 하며 슬피 우셨습니다. 언젠가 고향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를 찾아야지요. 그리고 어머니께서 땅에 묻으신 그릇을 찾아내야지요.” 

9월 9일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 남북이산가족 생사확인추진센터에서 실향민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추첨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사진=동아DB)
9월 9일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 남북이산가족 생사확인추진센터에서 실향민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추첨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사진=동아DB)

‘이산가족 생사 확인 의뢰서’ 교환

남과 북은 9월 15일 판문점에서 ‘2015년 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우리 측 250명, 북한 측 200명)에 대한 생사 확인 의뢰서를 교환했다.

이는 지난 9월 7~8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가진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에서 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 일정에 합의함에 따른 것이다. 남과 북은 10월 20~26일 금강산에서 남북 각각 100명이 상봉하기로 하고, 거동이 불편한 상봉자에 한해 1~2명의 가족이 동행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인선위원회를 열어 고령자와 직계가족 우선으로 상봉 후보자 500명을 선발하고, 본인 의사 확인과 건강검진을 거쳐 생사 확인 의뢰 대상자를 250명으로 압축했다.

정부와 적십자사는 북측으로부터 전달받은 생사 확인 의뢰자 200명 명단을 기초로, 지방자치단체 및 경찰청 협조를 받아 국내에 흩어진 이산가족들을 찾게 된다, 북측이 보내온 생사 확인 의뢰자 명단은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reunion.unikorea.go.kr)과 대한적십자사 누리집(http://www.redcros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과 북은 이산가족의 생사와 주소를 확인한 후 오는 10월 5일 회보서를 교환하고, 10월 8일 최종 명단을 확정해 교환할 예정이다.

한편 금강산에서 열리게 될 이번 추석 계기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 준비를 위한 시설점검단이 9월 16~17일 금강산 지역을 방문했다. 점검단은 통일부 등 당국자와 현대아산 기술자 등 14명으로 구성됐으며 이산가족 면회소, 외금강호텔, 금강산호텔 등 이번 상봉 행사에 사용되는 시설의 제반 사항을 점검했다. 정부는 시설점검단의 확인 결과를 바탕으로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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