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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부마항쟁, 역사의 지각생이었다”

정광민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 “가치와 의미 제대로 평가받아야”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2019.10.11

1979년 10월 15일 오전 부산대 도서관.
중간고사를 앞두고 시험공부에 매진하던 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유인물이 뿌려졌다. ‘현 독재 집권층은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물러나라’라는 내용의 ‘민주선언언문’이었다. 유인물에는 ‘도서관 앞으로 집결하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도서관 앞은 그야말로 한산했다.

다음날 16일 오전 9시 50분경 한 남학생이 부산대 인문사회관 306호 강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강단에 선 이 학생은 화폐금융론 수업을 기다리던 70여명의 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학우 여러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나가서 싸웁시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학생들은 의자를 박차고 너도나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전날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인문사회관 앞에는 순식간에 100여명의 학생이 모였다. 학생들은 어깨를 걸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학원사찰 중지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를 외치며 옛도서관(현 건설관)앞까지 행진했다. 학생들이 정문이 바로 보이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올 때는 무려 7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학생들은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저지하는 경찰을 뚫고 서면과 남포동 등 시내 중심가로 진출했고, 남포동 옛 시청 앞에는 2만∼3만 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합세했다. 밤 10시부터 통행금지를 실시한다는 당국의 발표에도 시위의 불길은 18일 마산까지 걷잡을 수 없이 타 올랐다.

시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민항쟁인 10·16 부마민주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시위의 불씨를 당긴 주역인 정광민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을 만나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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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 시위 불씨를 당긴 정광민 이사장이 당시 시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부마항쟁은 4·19,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과 함께 우리나라 4대 항쟁으로 불리고 있지만 유일하게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 않은 ‘주목받지 못한 역사’였다. 항쟁 40년만에 올해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는데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지금까지 4대 민주항쟁의 하나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국가기념일 제정이나 보상문제, 부마관련자들의 예우 등 제도적 기반이 다른 3대 민주화 운동에 비해 갖춰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름만 4대항쟁이었다. 부마관련자들은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 부분이 빠져있어서 그동안 ‘잊혀진 항쟁'이었는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로 들어가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 ”

-부마항쟁은 왜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졌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는 역사적인 한국 현대사의 격변과 관계가 있다. 부마항쟁이 터지고 12·12, 5·17, 5·18이 났다. 많은 시민이 희생당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다보니 부마항쟁을 공론화시키기 어려웠다. 특히 정치권이 5·18에 관심을 쏟으면서 부마항쟁은 5·18의 그늘에 묻혔다.

정치 지형적인 문제도 있었다. 부산은 3당 합당 이후로 보수적인 정치 지형이 절반이상을 차지했다. 여기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분위기와 향수도 적지 않아 부마항쟁을 전면에 내세우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부마관련 법을 만들고 국가기념일을 만드는것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마항쟁의 의미를 하대하는 지역적인 풍토도 있었다. 그런 영향으로 역사의 지각생이 됐다.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항쟁에 참여한 시민과 학생을 폭도로 칭하며 부마민주항쟁이 아닌 부마사태로 부르고 있는데….

“그렇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쓴 자서전에도 부마사태라고 썼다. 우익성향 사람들은 여전히 부마사태라고 한다. 항쟁이라는 용어를 정확히 쓰려고도 하지 않을뿐더러 강조를 하려고들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학생운동회를 중심으로 5·18 민주화운동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부마항쟁을 발견했고, 부산에서는 10주년인 1989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항쟁이라는 표현을 썼다. 법적으로 부마민주항쟁이라는 법도 있다. 사태라고 표현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격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면 그런 용어를 쓸수 없다.”

-당시 부마항쟁은 어떤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나?

“초기에 군사독재 폭압체제에서 항쟁의 깃발을 든 사람은 학생이었다. 20대의 어린 대학생들이 먼저 민주주의 횃불을 들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10월 16일 부산대에서 남포동까지 약 25km 정도 되는데, 긴 거리를 부산대에서만 끝낸게 아니다. 시민들과 결합한다는 목적으로 학생들이 부산의 끝에서 끝까지 가서 알렸다. 학생들과 함께 자영업을 하는 상인들, 노동자들, 화이트칼러 계층 등이 대거 참여했다.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박정희 체제의 최초의 시민항쟁이 됐다.”

-부마항쟁의 불씨를 당긴 장본인으써 그날의 상황을 떠올려본다면?

“22살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운동권과는 관계가 없었지만 경제사를 공부하면서 억압적인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자리잡았던 모양이다. 특히 야당총재를 제명한다든지, 악덕기업주가 판을 치고 노동자들이 투신자살을 하는 등의 현상을 보면서 ‘이것이 무슨 민주주의냐,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학우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공포정치의 분위기속에 누구하나 나서지 않았다. 그 와중에 도서관 앞에서 유인물이 뿌려졌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지만 수업시간에 학우들에게 유인물을 건네고,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선언문 내용은 지금봐도 대학 2학년생이 쓴것 같지 않다.

“내용이 다소 격하고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폐정 개혁안으로 유신헌법 철폐, 안정성장정책과 공평한 소득 분배, 학원사찰 중지, 학도호국단 폐지, 언론·집회 결사의 완전한 자유와 보장, YH 사건에서와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전국민에 대한 정치적 보복중지 등 7가지 개혁안을 적시한 것은 지금봐도 그 당시 선언문과는 차별화 됐던 것 같다. 경제학을 배운 사람으로서 경제재벌, 부익부 빈익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있었던 것 같다.

정광민 이사장이 당시 작성한 선언문
정광민 이사장이 당시 작성한 선언문

-경찰의 진압 과정은 어땠나?

“경험이 없으니 경찰도 우왕좌왕했다. 학생들이 부산대에서 가두진출을 하니 교내진입을 해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학생들이 시위를 이어가자 바리게이트를 치며 방어했지만 학생들의 시위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학생들은 차단이 되면 도망하고, 경찰은 연행하고 아수라장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이때 친구가 ‘광민아~너는 이제 피신해라’라며 도피를 권유하며 도피자금과 옷을 바꿔줬다.”

-어떻게 잡혔나?

“며칠 피신해 있다가 노모가 걱정이 돼 부산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는것도 한계가 있어 평소 도움을 받았던 교수님께 상담을 하러 갔더니 자수를 권하셨다. ‘자네가 일을 벌렸으니 수습하게’라는 말과 함께.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검은차에 후송돼 경찰서로 끌려갔다.”

정 이사장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지하실로 끌려가 하루종일 물 고문을 당했다. 수차례 고문에 실신이 반복되자 근처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정 이사장은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석방됐다. 하지만 5·17이 터지면서 시위 주동자로 블랙리스트로 올라가면서 또다시 2차례 실형을 살아야 했다.

-정신적 상이인정은 그 영향인가?

“고문에 의한 트라우마로 인정받았다. 경찰서와 병원 근처를 지나가면 머리가 아프고 심장이 두근거려 정신과 진료도 받았다. 진단에 의해 고문에 의한 트라우마로 인정받아 다행히 보상금도 받았다. 이번에 트라우마 인정을 받으면서 부마관련 심의를 청구한 상태다. ”

-일각에서는 5·18 유공자들과 동일한 혜택을 줘야 한다고 하는데.

“부마관련자들을 위한 부마 예우법을 만들어 유공자와 같은 혜택을 해줘야 한다는 요구가 많은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아직 뚜렷하게 합의된 움직임이 없다. 답보상태다. 국가기념일이 되고 부마관련자들이 연말까지 300명이 되면 목소리도 커지고 예우법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다. 특히 기념사업과 관련해서는 기념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산에도 창원에도 있어야 한다. ”

-부마항쟁이 현재인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기 바라나?

“지금 세대는 40대만 해도 부마항쟁을 잘 모른다. 지금의 민주주의가 되기까지는 민주화된 세상을 만들려고 목숨을 걸고 희생을 감내하면서 투쟁했기에 가능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제대로 기리고 계승하고 발전시킬 때 대한민국은 인간적인 나라, 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된다. 부마항쟁의 가치와 의미는 그러면에서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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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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