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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설명하는 사리

1993년 11월 10일 거행된 조계종 성철 종정 다비식에서 석가모니 이래 가장 많은 사리가 나와 불교계와 일반인의 관심을 모았다. 성철 종정 장례 위원회가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성철 종정의 법골로부터 모두 110과(顆)의 사리가 최종적으로 수습되었는데 사리들은 콩알 크기로부터 쌀알 반 쪽 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사리들은 정골(頂骨: 머리) 부분에서 50~60과를 비롯, 법체의 각 부분에서 고루 나왔는데 분류하지 않은 정골과 재 속의 것 80~90과를 합하면 공식 발표보다 훨씬 많은 모두 200과 가까이 된다고 한다.

'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최초로 사리가 전달된 것은 신라 진흥왕 10년(549년)으로 ‘양나라에서 사신으로 입학승 각덕과 함께 파견하면서 부처의 사리를 전하자 왕은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 나아가 맞이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의 오대산 태화지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불정골( 부처님의 정골 뼈)와 치아사리 등 백 개와 부처님이 입었던 가사 한 벌을 가져왔다고 한다. 자장법사는 사리를 황룡사 탑과 태화사 탑, 그리고 통도사 불단에 나누어 봉안했다.

진신사리 봉안한 사찰 불상 따로 모시지 않아

현재는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오대산 상원사 등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데, 진신사리는 불상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를 봉안한 사찰에서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이 가운데 양산의 통도사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불보(佛寶) 사찰로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대웅전 뒤편에 금강계단을 설치하여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 두고 있다. 율사(律師)의 상징인 자장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탑 속에 안치하지 않고 계단이라 이름 붙인 부도와도 같은 장소에 모신 점도 큰 의미가 있다.

양산 통도사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통도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으므로 불상이 없다.


조선왕조 초기에도 사리 신앙은 왕실을 중심으로 매우 성행했는데 태조 이성계는 1393년 4월에 정릉의 흥천사에 사리각(舍利閣)을 건설하고 7일 기도를 올렸는데 이때 사리 4과가 분신(分身, 몸을 나누어서 화현하는 것)하여, 불당을 유동에 건립하고 사리를 봉안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1398년에는 명나라 태조가 사리를 구하기 위해 황엄을 사신으로 보내자 왕은 각 도감사에 명하여 사리를 구하도록 명했는데 충청도에서 45과, 경상도에서 164과, 전라도에서 155과, 강원도에서 90과를 모으는 등 모두 800과를 도금한 금은합 속에 넣어 보냈다고 한다.

특히 세조 때에는 사리에 관한 여러 기록이 전한다. 개성 연복사의 승려가 사리라고 진상한 함을 열어 보니 좁쌀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세조 10년(1464)에는 삼각산 장의사에서 사리가 분신하므로 백관이 서한을 올려 경하했더니 이날 오색구름이 나타났다고 한다. 세조는 원각사를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으며 양평의 용문사를 중창하고 사리탑을 세웠으며 양주에는 수종사를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웠다. 세조가 세운 사리탑은 수십 개에 이른다.

우리나라 역대의 고승 가운데는 구산 스님의 53과를 필두로 1966년에 송광사에서 열반한 효봉 스님 34과, 자운 스님 19과, 탄허 스님 13과, 학명 스님 10과, 청담 스님 8과, 혜운 스님 20과, 금담 스님 4과, 성철 스님의 스승인 동산 스님과 용성 스님이 각 2과의 사리를 남겼다. 2003년에도 정대스님으로부터 120과의 사리가 나왔고 좌탈입망(좌선한 채로 열반에 드는 것) 상태로 입적한 서옹 스님은 4과가 나왔다.

반면에 지난 1982년에 입적한 경봉 스님을 비롯, 만공스님 등은 사리를 남기지 않았으며, 은허 스님은 법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있지 사리에 구현된 것은 아니라며 자신의 입적 후에 사리 수습을 못하게 했다. 2004년 11월에 입적한 조계종 원로 석주(昔珠, 봉은사 조실) 스님의 다비식에서도 스님의 뜻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다.

'신체' 의미하는 Sarira’에서 유래

<사리의 기원>

불교에서는 왜 사리를 중시하게 됐을까. 그러한 의문은 사리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면 쉽게 풀린다.

사리(舍利)는 본래 ‘신체’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Sarira’에서 유래했는데, 이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여 사리라(舍利羅)라고 하였다가 줄여서 사리라 부르는 것이다. 사리라는 본래 ‘몸’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복수형으로 되면 신골, 유골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리는 본래 몸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인체를 화장하고 난 뒤에 남겨진 뼈 전체 또는 가루가 된 뼛조각까지 폭넓게 포괄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리는 단순히 죽은 자의 몸을 가리키거나 또는 그 뼈를 부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처를 향한 믿음이 충만한 불자들은 사리의 의미를 좀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강우방의 글을 인용한다.


해인사 성철스님 사리탑, 성철스님의 유해에서 수많은 사리가 쏟아져 나와 200과를 훨씬 넘어서게 되자 그 수효를 헤아리기를 포기했다.


‘석가모니는 약 40년간 거리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여든 살에 인도 북동부의 쿠쉬나가라에서 생애를 마쳤다. 석가모니의 시신은 이웃 부족인 말라족이 인도 장례 풍습에 따라 화장하였고 화장 후에 얻은 유골로 탑을 세우려 했다. 석가모니의 화장 소식은 이웃 부족들에게 전해져 여덟 개의 부족이 석가모니의 유골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석가모니의 유골은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졌고 각 부족이 각각 탑을 세웠는데 이를 근본팔탑(根本八塔)이라 한다. 그런데 유골의 분배가 끝난 후 석가모니의 열반 소식을 들은 모라족이 석가모니의 화장터에 남아 있는 재를 가져가 유골 대신 넣은 재탑(灰塔)을 세웠고 각 부족에게 원만하게 석가모니의 유골을 분배한 드로나라는 바라문은 석가모니의 유골을 담았던 병(또는 항아리)을 가져가 유골 대신 병을 넣은 병탑을 세웠다.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기원전 273〜232)은 석가모니의 무덤 여덟 기를 발굴하고 그 안에 있던 석가모니의 유골을 나누어 통일 왕조 영토 곳곳에 무려 8만4천 기의 탑을 세웠다. 이후 탑(스투파)은 석가모니의 유골 즉 사리를 봉안하는 구조물에서 나아가 석가모니의 실재로 인식되었다. 즉 아소카왕의 8만4천 탑 건립에서 진정한 분사리의 원리가 확립됐다.

(중략) 사리는 탑을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건이며 사리 봉안은 탑의 존재 이유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많은 승려들이 앞 다투어 사리를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간 이유이다.’

이런 전통에 연유하여 사리를 숭배하고 공양하는 사리신앙, 즉 탑 신앙이 생겨났으며 부처의 진신사리를 보는 것은 부처를 친견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자리 잡는다. 처음에는 부처의 사리만을 봉안했으나 나중에 불경과 고승의 사리를 모신 불탑도 세워지게 되었다. 사리는 단순히 몸 또는 뼈를 의미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매우 소중하게 모시게 된 이유라고 박경준은 설명했다.

부처의 사리를 진신사리, 불경을 법(法)사리, 고승의 사리를 승사리로 구분하는데 이 중에서 승사리를 모신 탑은 부도(浮屠)라 하여 일반 불탑과 다른 형태로 제작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 후반이지만 부도가 만들어진 것은 신라 하대인 9세기부터이다. 사리는 다비전의 전신사리(全身舍利)와 다비 후의 쇄신사리(碎身舍利)로 구분되는데, 다비 후 나오는 구슬 모양의 유골은 쇄신사리를 뜻한다. 사리는 크기도 다양하지만 색깔도 황금색, 검은색, 붉은색, 흰색 등이 뒤섞여 영롱한 빛깔을 띤다.

물에 넣으면 가라않지 않고 중간에 뜬다

마곡사의 철환 스님은 사리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들었다. 사리는 불에 타지 않으며 부서지지도 않고 물 속에 넣었을 때 가라않지도 않은 채 중간에 떠 있다는 것이다.

사리의 수습 절차는 다비(茶毘)의 마지막 의식에 해당한다. 다비란 불교계의 장례법으로 정착한 화장의 팔리어 원어가 ‘자피타(jhapita)’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다비에 의한 장례법이 인도 불교 이래 불교적 전통이 된 요인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추정한다. 첫째 아열대성 기후라는 인도의 기후적 특성 때문에 시신의 부패를 막는데 다비가 적격이며 둘째 부처님의 장례를 다비했으므로 셋째로 부처님의 사상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다비가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비에는 땅‧불‧물‧바람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신을 다시 원류로 보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004년11월 석주스님 다비식, 석주 스님의 뜻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다(사진 석동빈).


신라 하대인 9세기는 당나라부터 선종(禪宗)이 들어온 때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중심으로 선풍(禪風)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선문을 대표하는 조사(祖師)의 설법이나 교훈을 어록으로 남기고 입적한 뒤엔 장골처(藏骨處)에 조형물을 남겨 추앙했다. 이것이 부도였다. 부도는 다른 석조물과는 달리 탑비(塔碑)가 반드시 별도로 갖춰져 있기 때문에 주인공의 생애와 행적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문화상을 알 수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 가장 오래된 부도는 통일신라시대의 흥법사 염거화상탑(844년)이며 이외에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접탑(861년), 쌍봉사 철감선사탑(868년) 등이 유명하다.

1998년 11월 성철 스님의 입적 5주기를 맞아 완성된 사리탑은 높이 3.5미터이며 탑 주위는 지름 24미터의 원형 참배대를 설치했다. 성철 스님의 뜻에 따라 조각하지 않고 높이하지 않고, 복제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단 위에 두개의 반구(半球)와 한 개의 구를 포개 놓았다. 이에 대해 성철 스님 평소의 뜻과는 달리 사리탑을 너무 거창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리석을 정밀하게 다룰 수 없어 일본 기술을 빌려온 것도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부처님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리가 나온 성철 스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사리탑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사람도 있다. 사실 성철 스님이 입적한 후 사리를 보기 위해 하루 2만 명 이상의 참배객이 몇 시간씩 기다렸던 사실을 보면 이해가 된다.

석탑 사리봉안 1층 탑신으로 위치 정착

<사리를 어디에 모실까?>

엄밀한 의미에서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안전하고 영구적으로 보관하기 위한 구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탑의 어느 부분에 사리를 봉안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 단원은 강우방의 글을 인용했다.

인도의 스투파는 안다 내부까지 이어진 야슈티(찰주) 아래에 석가모니의 사리가 봉안된다. 중국에서는 목탑의 경우 심주(心柱) 아래에 봉안되는데 지표 아래에서 3미터 가량 깊이에 거대한 심초석을 두고 그 위에 심주를 세우므로 모두 탑의 지하에 봉안하는 지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엔 목탑·석탑·전탑의 사리 봉안 위치가 모두 다르며 매우 다양하다.

목탑의 경우 심주 아래에 사리를 봉안하는데 심주 바로 밑에 석함(石函)을 두고 그 아래에 사리를 안치하는 방식, 백제의 제석사지 목탑터의 경우처럼 심초석은 지표로 올라오고 그 위에 심주를 세우는 방식이며 마지막으로 심주가 2층 탑신부터 올려져 있는 예로 쌍봉사대웅전이 유일한 예이다.

석탑의 경우에는 사리의 봉안 장소에 일정한 규칙이 없는 듯 보일 정도로 석탑의 여러 군데에서 사리함이 발견되는데 큰 틀에서의 규칙은 있다. 초기 석탑인 경우 목탑 관습에 따라 찰주가 끝나는 3층 탑신에 사리를 안치했으며 그 후 시대가 흐르면서 2층 지붕돌과 탑신돌을 거쳐 1층 탑신으로 사리 봉안의 위치가 정착된 것으로 추정한다. 예외적으로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김천 갈항사지 삼층석탑과 울산 청송사지 삼층석탑의 경우에는 기단에 사리를 안치했고 익산왕궁리오층석탑처럼 기단과 탑신부에 사리를 나누어 안치한 경우도 있다.

지표에 설치되는 목탑 심초석의 경우나 탑 안에 사리가 안치되는 석탑은 모두 돌 자체에 사각 혹은 원형의 사리공을 파고 그 내부에 사리를 봉안했다. 목탑의 심초석에 판 사리공은 모두 사각이고 석탑도 초기 석탑은 사각으로 파여졌으나 9세기 이후의 석탑은 원형이다.

인체 속의 결석, 사리를 인체 속의 결석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사리는 결석이 아니라는 견해가 유력하다(사진 전세일).


전탑의 경우 안동 임하사 전탑 터에서는 특이하게 심초에 사리를 안치했지만 대부분의 전탑은 별도의 석함을 제작하여 그 안에 사리와 공양물을 넣은 후 다시 그 함을 벽돌로 된 사각의 공간 안에 넣었다. 특이한 것은 벽돌로 탑을 쌓으면서 마련된 사각의 공간 안에 그대로 사리와 공양물들을 넣어도 되는데, 굳이 석함을 만들어 그 내부에 사리를 넣었다는 점이다.

이는 처음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할 때 ‘돌-동-은-금-수정’의 순서대로 넣어 봉안했던 전통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목탑의 심초석과 석탑의 사리공은 외함(外函)의 기능을 겸하고 있으며, 전탑에서 석함을 따로 만들어 넣은 것은 이러한 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의학계에선 일종의 담석이나 결석으로 파악

<사리의 정체>

사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현재로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자료가 많지 않으므로 모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태조 이성계가 어느 날 대신들에게 사리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하고 묻자 하륜이 대답했다.

“정신을 수련하면 정기가 생기고 정기가 쌓이면 사리가 생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다의 조개에도 보주가 있고 뱀에게도 명월주가 있으니 조개와 뱀이 무슨 도가 있어 그런 구슬이 생기겠습니까?”

당시 불교를 배척하는 국시를 의식하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태조는 신덕왕후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왕후의 원찰인 흥천사에 불사리를 모시고 명복을 빌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조개의 몸 안에 모래알, 알, 기생충 같은 것이 들어가면, 진주층과 같은 물질인 진주질(眞珠質)로 이것을 둘러싼다. 이렇게 해서 생기는 것을 천연 진주라고 한다. 진주가 생기는 상세한 원인은 아직 밝혀져 있지 않았으나 진주질을 분비하는 외투막의 세포가 들어온 물질을 싸서 펄삭(Pearl sac)이라는 자루 모양의 조직을 만들어 둘레에 진주질을 분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 생기는 사리를 진주가 생기는 것과 유사하다는 해석은 수많은 사리가 한 사람의 몸에서 생기는 것을 감안할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반면에 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리를 몸의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일종의 담석이나 결석으로 파악하고 있다.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대부분 유기물로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등 생명현상과 관여하는 물질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들 유기물질은 다비식과 같은 고온의 불길에서는 모두 연소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불길 속에서도 남을 수 있는 것은 무기물로 이루어진 뼈와 약간의 칼슘 성분으로 구성된 오색영롱한 사리뿐이다.

연세대학교의 이무상 교수는 사리 자체를 분석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칼슘을 많이 포함한 신장의 결석이나 담석이 사리가 됐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콜레스테롤로 이뤄진 담석은 노란 색깔

‘우리 몸에서 가장 흔한 무기물이 칼슘이고 이 칼슘이 고열 속에서 다른 유기물질과 결합하여 어떤 화학변화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뼈를 제외하고 우리 몸에 생길 수 있는 무기물로는 콩팥의 결석이나 간이나 쓸개, 기관지에 생기는 담석 등이 대표적이다. 콩팥 결석이나 담석은 모두 칼슘을 포함하며 나이가 많아질수록 잘 생기며 사실 돌 자체는 우리가 밥 먹고 사는 동안 계속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병률이 30%, 증상이 있는 유병률이 8%나 되기 때문에 매우 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쌍봉사 철감선사탑(국보 57호), 신라시대 부도 중 조각과 디자인이 화려한 최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의학계에서는 정좌한 채 몇 년씩 움직이지 않고 수행하는 스님들은 영양상태도 좋지 않고 신진대사가 원활할 수 없기 때문에 결석이 생길 수 있는 확률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성철 스님도 15년간을 앉아서 잠을 잤기 때문에 유래 없이 사리가 많이 나왔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전세일 박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몸 안에 생기는 결석(돌멩이)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 몸 안에서 돌멩이(結石)가 생긴다. 모래알도 생기고 자갈, 조약돌도 생기고 주먹만한 돌덩어리도 생긴다. 가장 흔히 생기는 장기가 담낭(쓸개)과 콩팥이다. 콩팥에서 방광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요로라고 한다. 이 요로에 모래알이나 자갈돌이 생겨 있는 것을 요로결석이라 부른다. 요로결석은 비뇨기과에서 발병 빈도가 높은 중요한 질환으로 전체 환자의 12%나 된다.

(중략) 쓸개에 생기는 돌을 담석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콜레스테롤로 이뤄진 담석은 색깔이 노랗고 사이즈가 크며 가장 흔한 편이다. 칼슘이 주성분으로 이뤄진 담석은 검정색이 나타난다. 그리고 칼슘과 단백질이 섞여서 생긴 담석은 갈색을 띤다. 담석의 자극으로 염증이 생기는 것을 담낭염이라 하는데, 이런 경우는 오른쪽 가슴 밑과 바른쪽 어깨에 심한 통증을 호소하게 된다. 담석으로 인한 통증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하다.

(중략) 이빨에 생기는 돌은 치석이라 한다. 음식을 섭취한 뒤에 치아에 부착되는 치태(dental plaque)와 침샘에서 분비되는 무기질이 합해져서 돌멩이가 생성된다. 침샘에 생기는 돌이 타석(唾石)이며, 귀밑샘, 턱밑샘, 혀밑샘 등에 생길 수 있다.

위장에서도 돌멩이가 생긴다. 이런 위석(胃石)은 이물질이 위내에서 지속적으로 응결되어 생성되는 것이다. 주로 우리가 삼킨 식물섬유, 모발(털), 약물, 면(솜), 플라스틱, 종이 부스러기 등에서 돌이 생겨난다.

통풍도 일종의 돌멩이이다. 요산이 축적돼 돌처럼 딱딱해지는데 가장 흔히 생기는 부위는 엄지발가락이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사리(舍利)도 역시 돌인데, 우리나라 성철 스님에게서는 130여개의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사리가 결석이라는 설명은 위에서도 지적되었지만 매우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리가 나온 스님은 모두 입적하기 전까지 결석으로 고통을 호소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성철 스님의 경우 목 부위에서 나온 수많은 사리가 결석이라면 거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수행 많이한 스님에게서 나와

서울대학교의 서정돈 교수도 사리가 결석이라는 의견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표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담석 또는 결석론도 사리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저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담석 등의 칼슘 성분은 뼈보다도 열에 약하기 때문에 이 가설에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시신을 단시간에 고열에서 처리하는 화장의 경우는 아주 큰 뼈를 제외하고는 모두 타버리지만, 그보다 긴 시간 동안 태우는 다비 의식의 경우 어떤 요인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비식의 경우도 사리가 보통 사람에게서 거의 나오지 않고 수행을 많이 한 스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다비 의식에 어떤 요인이 있다면 다비식을 치른 거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리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정액 축적설도 있지만 그것도 근거가 매우 미약하다. 정액 축적설은 성생활을 하지 않고 참선으로 평생을 수행한 스님을 화장할 때 사리가 나온다고 알려진 통설인데 여승이나 평범한 불자로부터 사리가 나온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송림사전탑유리배사리장치(보물 325호). 송림사 5층 전탑의 이층탑신에서 나온 것으로 금으로 된 기단 위에 녹색의 투명 유리잔을 두고 금으로 만든 지붕을 씌운 전각의 모양을 하고 있다(국립경주박물관).


사리의 양이 법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은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사리의 양과 수행의 정도를 결부시키는 것은 사리가 한량없는 육바라밀의 공덕에서 생기며 매우 얻기 어렵고 으뜸인 복전이라고 설한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사리공양에 의한 공덕의 유무 문제는 초기 불교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속설과는 달리 일부 불교계에서는 수행 정도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승으로 알려진 스님으로부터 사리가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1989년에는 평신도인 85세의 할머니로부터 사리가 77과나 나온 예도 있다.

1994년에는 교통사고로 숨진 75세의 할머니가 경남고성 공설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는데 불자가 아닌 이 할머니의 몸에서 청색, 황색, 회색, 흑색을 띤 400 여과의 사리가 나오기도 했다(일반 사람들에게도 사리와 유사한 것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사리는 아니라는 설명도 있음).

이와 관련하여 공주 영명사의 정법 스님은 평신도나 일반인에게서 사리가 나오는 것은 전생에 그만큼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하튼 사리가 대중의 관심을 많이 끌게 되자 사리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과학자들은 인체에서 추출한 유기물이나 무기물을 고열로 처리해보면 무언가 단서가 잡힐 것이라며 실험을 역설했다.

반면에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사리를 굳이 과학적으로 분석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사리에 대한 분석이 사리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믿음에 손상을 줄 것이라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자의 호기심이 이러한 주장에 귀를 기울일 리 만무이다. 드디어 사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도되었고 인하대의 임형빈 박사가 사리 1과(顆)를 분석하여 결과를 발표했다.

‘지름 0.5센티미터 정도의 팥알 크기 사리에서 방사성 원소인 프로트악티늄(Pa), 리튬(Li)을 비롯하여 티타튬, 나트륨, 크롬, 마그네슘, 탈슘, 인산, 산화알루미늄, 불소, 산화규소 등 12종이 검출되었다.

사리의 성분이 일반적으로 뼈 성분과 비슷했으나 프로트악티늄, 리튬, 티타늄 등이 들어있는 것이 큰 특징으로 사리의 굳기 즉 경도는 1만5000파운드의 압력에서 부서져 1만2000천 파운드에서 부서지는 강철보다도 단단했다. 특히 결석의 주성분은 칼슘, 망간, 철, 인 등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고열에 불타 없어지며 경도도 사리처럼 높지 않아 사리는 결석이 아니다.’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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