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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한국인 의식주 변천사] ⑦ 주택의 변화

자고나면 지어지는 아파트…한국인 삶을 180도 바꿨지

2015.06.30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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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1%대의 초저금리 시대라고 하네. 당연히 집 사려는 사람도 늘겠지. 무슨 말이냐면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더 떨어지면 월세보다 매매값이 싸져 매수 여건이 더 좋아지지 않겠어? 월세가 늘면 전세가 위축되고 매매가 늘어날 테니 집을 사는 게 낫겠지. 하지만 우리가 금리 따져가며 집을 살 기회가 언제부터 있었겠나. 그저 등 따습 게 누울 공간만 있으면 부러울 게 없었지.

우리나라에 언제나 집은 부족했어. 광복이 되자 일본식 ‘다다미’ 집이 점점 사라지고 온돌이 복권됐지만, 집이 없어 1년에 몇 번씩 이사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지. 통계자료를 보면 이유를 알 거야. 광복 직후 남한 총인구는 1589만 명이었는데 북에서 월남해오고 만주나 일본에서 동포들이 귀국해 불과 1년 만에 400여 만 명이 늘어 났어. 좋은 일이었지만 주택 사정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그 무렵 서울 후암동과 이태원 일대에 판자촌과 천막촌이 들어서며 ‘해방촌’이 만들어졌지.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사진=동아DB)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사진=동아DB)

6·25전쟁으로 주택난은 더욱 심해져 서울에서는 집 한 채에 보통 8명 정도가 살았어. 전쟁이 끝나고 1956년까지 전국에 걸쳐 재건주택, 복구 주택, 외인 주택이 들어섰지. 당시의 재건 주택은 자재가 부족해서 흙벽돌로 지었는데도 서민에겐 선망의 대상이었어.

스물세 살 때인 1957년이었나? 우리 집은 좀 형편이 나았던지 ‘ICA 주택’에서 살았어. 그게 뭐냐고? 산업은행이 국제협동조합연합회(ICA)의 자금을 융자받아 서울의 부암동이나 화곡동에 지은 소규모 주택들을 그땐 그렇게 불렀어. ICA 주택은 나중에 민영주택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0년대 후반까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지.

그러다 아파트 시대가 시작됐어. 첫 아파트는 1958년 고려대 앞에 지은 종암아파트야. 17평 규모로 152가구였던 아파트 준공식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어. 준공식 날 구보 씨도 라디오에서 그 뉴스를 들었으니까.

최초의 민간 아파트가 나온 이후 아파트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늘어나게 됐지. 대한주택공사가 1962년에 지은 마포아파트(450가구)를 시작으로 대단지 아파트가 늘어났고, 1964년에 지은 마포2차아파트는 계단식 설계로 거실과 베란다를 도입한 최초의 아파트로 알려져 있어. 1966년부터 1971년 사이에 지어진 한강맨션아파트는 중산층의 아파트로 인기가 대단했지.

1958년 이승만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가 된 서울 종암아파트 건설 현장을 건축주인 조성철 중앙산업주식회사 사장(오른쪽)의 안내를 받으며 둘러보고 있다.(사진=동아DB)
1958년 이승만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가 된 서울 종암아파트 건설 현장을 건축주인 조성철 중앙산업주식회사 사장(오른쪽)의 안내를 받으며 둘러보고 있다.(사진=동아DB)

언제나 방과 집이 부족…
거주 아닌 투자 개념은 바뀌어야

1970년대 초반까지 서울시영아파트도 약 2만 가구가 건설돼 주택난 해소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해. 그 과정에서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발생해 ‘불도저 시장’이라던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책임을 지고 장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어.

김 시장은 “피와 눈물이 어린 충정으로” 사과한다는 사과문을 광고(동아일보 1970년 4월 9일자)로 내기 도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안전하고 완벽한 공사보다 어떻게 해서든 한 채라도 더 늘리겠다는 의욕이 부른 참사였어. 이 밖에도 도심재개발 사업이 이뤄져 세운상가아파트, 낙원상가아파트, 대왕상가아파트 같은 복합 건물이 생겨났지.

시골에서도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에 걸쳐 지붕 개량 운동이 펼쳐졌어. 초가집, 굴피집(굴참나무 껍데기로 지붕을 얹은 집), 너와집(기와 대신 얇은 돌조각이나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집) 같은 전통 지붕이 모두 헐리고 함석, 슬레이트, 시멘트 기와 같은 자재로 지붕이 바뀐 거야. 초기엔 집채는 그대로 두고 지붕만 바꾼 경우가 많아, 대통령이 “초가지붕만 개량하는 건 바지저고리에 중절모 쓴격”(동아일보 1978년 2월 2일자)이라고 지적했다는 기사도 있어.

시골 사는 친구한테 들었던 말인데, 예비 며느릿감이 재래식 화장실과 부엌을 고치지 않고 지붕만 바꾼 낡은 집을 보고 나서 결혼을 안 하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부랴부랴 집까지 수리했다는 거야. 혼담이 오가다 지붕만 개량했다는 문제로 틀어지는 커플들이 많았을 때야.

1970년대엔 연립주택이 대세였지. 단독주택과 아파트의 장점을 골고루 갖춘 연립주택은 자기 소유의 땅과 정원을 가질 수 있어 처음엔 아파트보다 더 인기를 얻었어. 대개 2층이었는데 서양의 타운하우스를 응용해 부엌과 화장실은 1층에, 2층엔 거실과 방이 있었어.

1970년대부터 강남 개발이 본격화돼 아파트가 주거 공간이 아닌 투기의 수단으로 떠올랐어. 1960년대 중반 ‘파고다’ 담배 한 갑이 50원이었는데 그때는 담배 4갑이면 강남 땅 한 평을 살 수 있었지. 그런데 강남 개발 이후부터 완전히 달라졌지. 압구정동이나 잠실에 아파트가 속속 들어섰지. 대한주택공사나 민간 건설회사가 아파트 단지를 많이 지어 아파트가 전국으로 퍼져나갔어.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그 무렵 아파트로 이사한 구보 씨의 18번 노래도 윤수일의 ‘아파트’(1982년)였어. 이 노래를 부르다 보면 왠지 도시에 사는 쓸쓸함 같은 게 느껴졌어.

1977년의 해방촌 풍경.(사진=동아DB)
1977년의 해방촌 풍경.(사진=동아DB)

그 후 ‘빌라’가 등장해 인기였는데, 고급 내장재로 마감한 고급 연립주택이라고나 할까. 1989년 4월부터 분당을 비롯한 5개 신도시에 건설된 아파트 200만 가구는 우리나라 주택보급률을 86%까지 끌어올렸다고 해. 이때부터 고층 아파트가 유행이었어. 2002년 10월 완공된 서울 도곡동의 ‘타워팰리스’는 아파트의 고층화와 고급화를 상징하며 주상복합아파트 시대를 열었지. 그 이후는 다 알 거야.

주택이란 게 뭐겠어. ‘머무를 주(住)’와 ‘집 택(宅)’을 합쳤으니 사람이 들어와 사는 집을 말하는 거겠지. 그런데 아파트는 한국인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렸어. 집을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공간이 아닌 투자개념으로 보는 분들이 많아. 하우스(House)가 주거 공간이라는 밋밋한 의미라면, 홈(Home)은 ‘가정’이라는 뜻을 강하게 담고 있어. 가족과 머무를 방 한 칸이면 모두가 행복했던 광복 직후의 그 시절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해. 그때의 집안 풍경이 정녕 ‘스위트 홈’이 아니었을까 싶어.

※ 이 시리즈는 박태원의 세태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년)의 주인공 구보 씨가 당시의 서울 풍경을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살아온 지난 70년의 기억을 톺아본 글이다.

글 ·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전 한국PR학회장)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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