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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두 번의 글에서 자서전은 위업을 이루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데서 출발한다고 썼다. 그건 전기에 불과할 뿐이다. 자서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흔들리지 않고 핀 꽃은 없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유일한 삶을 살았다. 자서전을 쓸 충분한 자격과 스토리가 있다.
자서전의 진정한 의미는 나 자신과의 진솔한 내면의 대화다. 잘 살았든 못 살았든 나와 내 삶을 성찰하는 것이다. 삶의 황혼에서 나 자신과 주변과 화해하고 나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은 출생-성장-출가-출사-은퇴의 연대기처럼 쓰지 말고, 삶의 특별했던 순간의 희로애락이나 인연, 나와 내 삶을 규정하는 소주제별로 쓰는 게 좋다고 했다.
이제 형식 이야기다. 자서전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고민하는 건 내용과 함께 형식이다. 대체로 나를 주어로 삼아 작문 위주로 쓰려고 한다. 하지만 자서전에 형식이나 규칙이 있는 건 아니다. 어떤 형식이든, 누구의 도움을 빌리든, 무얼 첨부하든, 편하고 다양하고 진솔하게 나를 회상하고 내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으면 된다. 자서전도 읽는 재미가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편지 형식도 좋다. 수신인은 각 장(章)이나 소재나 사건 별로 다를 수도 있고, 작정하고 한 사람에게만 보내는 형식이어도 좋다. 대화체나 독백체처럼 될 것이다. 부모를 회고할 때는 부모님 전상서도 좋고, 내 자식이나 배우자, 친구나 친지, 은사나 은인,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사람,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 평생 미워한 사람, 크게 신세 진 사람, 용서를 구하고 싶은 사람, 이제는 가슴 속 응어리를 털어놓고 싶은 사람 등등, 평생 그런 사람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자서전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꼭 내가 다 채워야 할까. 그렇지 않아도 상관 없다. 내 가족, 친지, 친구, 특별한 인연을 맺은 사람이 나에 대해 회상하는 글을 받아 실으면 자서전이 풍부해질 것이다. 글을 써준 사람도 보람을 느낄 수 있다. 3인칭 화법도 괜찮다. ‘나’가 ‘그’가 되는 것이다. 나 자신과 내 인생을 마치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듯 묘사하는 것이다. 나를 타자화하면 내가 객관화된다.
자서전을 글로만 채울 이유도 없다. 시각물이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내 앨범 속의 사진들, 또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내 사진을 구해서 적절히 안배하거나 별도로 ‘사진으로 보는 내 인생’ 코너를 만들어 보자.
내가 나온 사진이 아니면 뭐 어떤가. 내가 즐겨 가던 장소, 평생 단골 음식점, 애지중지한 물건, 배우자와 첫 데이트를 한 곳, 허니문 장소의 과거와 현재, 평생 내 발이 되어준 자동차나 자전거, 평생을 아낀 만년필 같은 문구류, 나와 오랜 세월 함께 한 반려동물, 어릴 적 일기장이나 그림, 내가 쓴 글, 내 졸업논문, 학창시절 성적표나 상장, 내가 쓰거나 받은 편지, 성탄카드나 생일 축하 카드, 감사패나 공로패, 자격증, 여권, 휴대폰 속 내 전화번호부, 나를 움직인 책이나 영화, 공연 포스터도 좋다. 이런 것들이 바로 나를 설명하는 것이다. 거기에 의미 있는 설명을 달아보자. 후대가 나를 글로 추억하는 것보다 더 애틋한 마음이 들 것이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터뷰 대상이 돼보자. 내 친구나 가족이 나를 인터뷰해서 쓰는 것이다. 자서전은 꼭 책이어야 할까. 오디오나 비디오는 어떨까. 매일매일 조금씩 나의 육성으로 내 삶을 녹음하거나 휴대폰 동영상으로 독백을 남겨도 좋다. 집안의 주요 행사에는 동영상들을 찍지만 온전히 사적인 나의 영상은 거의 없다. 날을 잡아서 내 일상을 영상으로 남기는 것이다. 노래방에서 18번을 노래하는 모습, 운동이나 취미에 몰두한 모습은 어떤가. 녹음이나 영상은 자서전의 부록으로 만들 수도 있다.
자서전도 기본적으로 글쓰기 행위다. 창작이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자서전은 문학작품도 백일장도 아니다. 카톡을 할 줄 알면 글을 쓸 줄 아는 것이다. 그래도 글쓰기에 대한 책 몇 권 정도는 읽어보는 게 좋다. 글쓰기 교본은 거의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쉽고 간결하고 재미있고 진솔하게 쓰라고. 자서전을 쓰면서 당신의 작문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질 게 틀림없다.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노동이다. 매일매일 집필 시간을 정해 몰입하는 게 완성하기 수월하다. 데드라인을 정해 놓는 게 좋지만 분량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20페이지도 좋고 100페이지도 좋다. 자서전 제목을 인상적으로 잘 달아보자. 나와 내 인생을 꿰뚫는 한 마디, 한 구절이 강렬하다.
출판은 가족이나 친지 친구에게 나눠줄 백 권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전문 출판사에 갈 필요도 없다. 소량의 책을 편집하고 만들어주는 곳은 많다. 능력이 있다면 인터넷 공간에서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혼자 제작할 수도 있다.
자, 이제 즐거운 자서전 출판기념회나 파티가 당신을 기다린다. 아마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열어주지 않을까.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젊은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부모님의 인생을 존경했다면 자서전 쓰기를 권유하고 그 과정을 도와드리라고. 고희(70세)나 희수(77세), 미수(88세) 잔치를 자서전 출판기념회와 겸하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
자서전을 써본 사람들의 경험을 들으면 자서전 쓰기의 긍정적 효과는 생각보다 엄청나다. 노년의 외로움과 우울증이 사라졌고 심지어 난치병이 호전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자존감이 살아났고, 집중력이 높아졌고, 행복을 느꼈고, 스스로 할 일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고 한다.
자서전을 완성한 후에는 삶의 의욕과 활력을 더 얻었고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안정된 노후를 보냈다. 자서전은 어찌 보면 책으로 남긴 묘비명이다. 불행히도 당신에게 치매가 와서 당신의 존재와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려도 자서전은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삶이 어땠는지를 말해줄 것이다.
◆ 한기봉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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