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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인 역량 키우기에 일조…시행착오 끝에 길을 찾았다”

[청년희망] ‘농업마케팅플래너’ 창직한 농부릿지 조현준 대표

2016.08.18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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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고등학교 졸업, 스물의 나이에 조선소 입사, 그로부터 2년 후 전기기기 제조사로 이직, 스물다섯에 뒤늦게 대학 진학, 20대 후반 창업과 창직(創職)….

그의 20대는 남들과 조금 달라 보인다. 2006년 3월, 신입생이 된 친구들이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때 조현준(29) 농부릿지 대표는 부산 무지개공단에 위치한 조선소에서 용접을 하고 있었다. 공고를 졸업한 후 그의 첫 직장생활이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일찌감치 돈을 벌어야 했던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새벽 5시 현장으로 출근해 업무를 시작하면 밤을 꼬박 새운 채 철야작업을 했다. 퇴근은 다음 날오전에야 할 수 있었다. 2년 동안 조선소에서 혹독하게 훈련받은 그는 좀 더 여유로운 환경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운이 좋게도 글로벌 전기기기 제조사의 품질관리팀으로 이직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직장생활은 3년간 이어졌다. 회사가 수평적인 조직이었음에도 20대 초반의 그에겐 위계질서가 뚜렷한 조직체계가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 ‘아예 회사를 차려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해보는 건 어떨까.’ 자신의 성향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무작정 칼을 뽑고 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사업 아이템을 찾을 요량으로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2010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조현준 농부릿지 대표는 “농업마케팅플래너를 창직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청년들이 인생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걸 즐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현준 농부릿지 대표는 “농업마케팅플래너를 창직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청년들이 인생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걸 즐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도교수 덕분에 찾은 농업의 비전
농업인 맞춤 솔루션 서비스 기업 설립

그가 선택한 전공은 국제통상학. 창업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공부를 하던 중에 창업 아이템을 발견했는데, 뜻밖에도 ‘농업’이었다.

“지도교수님이 농업의 비전을 제시했어요. 진입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단 하고 나면 전망이 좋을 거라며 농업 관련 보고서를 주시더군요. 보고서를 살펴보니 한국의 농산물 해외시장 수출량이 점점 늘어나는 데다 파프리카, 토마토 등 수출품목이 다양하더라고요.”

농업에 뜻을 둔 그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대학 3학년 때인 2013년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그곳에서 매일 아침 끼니를 해결하고자 바나나, 토마토, 배, 사과, 포도 등 제철과일을 먹었는데, 한국의 과일보다 맛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때 조 대표는 국내 농업이 경쟁력을 갖고 있음을 확신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창업 준비에 돌입했다. 취업을 준비하던 동기들과 함께 공모전에 참가했는데, 가상의 프로젝트에 아이디어를 내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자신과 동기들이 갖고 있는 기획, 마케팅, 디자인, 홍보 등의 역량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그때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농업인에게 젊은 전문인력이 갖고 있는 역량을 발휘해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농사를 짓는 농부도 소비자에게 물건을 팔려면 기획을 하고 마케팅을 전개하며 홍보를 해야 하는데,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고 있던 터였다.

2014년 7월 1일 조 대표는 농업인 맞춤 솔루션 서비스기업 ‘농부릿지’를 설립했다. 동시에 그는 ‘농업마케팅플래너’가 됐다. 말 그대로 농업인을 위한 마케팅플래너가 도시의 청년 전문인력을 섭외해 농업인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농업의 ‘Nong’과 다리 ‘Bridge’를 결합한 ‘농부릿지’다.

자금이 문제였다. 5년간 직장생활로 벌어둔 돈은 등록금과생활비로 모두 사용한 후였다. 다행히 그를 살려준 ‘동아줄’이 있었다. 그해 12월 농부릿지는 고용노동부가 주최한 청년창직아카데미에서 금상을 받으며 활동비 600만 원을 확보했다.

이제는 아이템을 실전에 적용할 차례. 첫 프로젝트는 전북 장수에서 사과를 파는 농부가 의뢰한 사과 박스를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조 대표는 건국대 산업디자인과 학생들을 섭외해 사과 박스 디자인을만들었다. 장수 지역이 눈이 많이 내리는 특성을 감안해 사과 박스에 회색 바탕에 발자국이 찍힌 설원을 그려넣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이를 계기로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실패 후 찾아온 성공의 기쁨
남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선 얻을 수 없어

첫 프로젝트가 남긴 교훈은 또 있었다. 농업인의 주문을 디자이너는 알아듣지 못했고, 디자이너의 뜻을 농업인은헤아리지 못했다. 고민 끝에 ‘커뮤니케이션’이 해결방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농업에 필요한 모든 디자인을모은 마켓을 론칭하는 것으로 사업 방향을 대폭 수정했다. 조 대표는 올 4월 농업인 전용 오픈마켓‘디자인팜’을 문 열었다.

아이템의 문제점을 보완한 후 농부릿지는 시장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1억3000만 원에 달하고, 올 7월 기준으로 매출 1억 원을 달성했다. 세상에 없던 직업 ‘농업마케팅플래너’를 새롭게 선보인 지 이제 2년. 조 대표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평가는 시기상조지만 사업의 방향만큼은 제대로 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농부릿지는 실질적으로 농업인의 역량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소비자와 농업인 간의 간극을 줄이고 있으니까요.”

의미 있는 결실은 또 있다. 조 대표는 올 8월부터 사단법인 한국농식품법인연합회에서 서울산업진흥원의 도움을 받아 30명의 디자이너와 농업인을 서로 연결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 계획이다. 조대표는 이를 통해 농업 경쟁력이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

“제가 ‘농업마케팅플래너’라는 직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생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꿈도 없이 남들 따라 취업 준비를 하거나 자격증을 따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 대신 저의 성향을 분석하고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려 했습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방법은 사실 별게 아닐지 모른다.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조선소에서 근무하던 스무 살의 청년이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말이다.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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