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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버럭! 공동체를 건강하게 한다

[김창엽의 과학으로 보는 문화] 디지털 분노

2017.06.16 김창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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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분노가 한 사회의 불의 척결 등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그 역기능도 적지 않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열린 ‘건강한 인터넷 세상 함께 만들기’ 거리 캠페인.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디지털 분노가 한 사회의 불의 척결 등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그 역기능도 적지 않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열린 ‘건강한 인터넷 세상 함께 만들기’ 거리 캠페인.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식구들 간에 어떻게 저럴 수 가 있죠? 돈이 없을 땐 차라리 문제가 없었는데, 정말 화가 나네요.”

최근 수십 억짜리 로또 당첨금을 둘러싼 가족 분쟁사건과 관련한 1심 판결을 전하는 인터넷 뉴스에 이런저런 분노의 댓글이 넘쳐난다.

“아이 아빠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최근 한 영화를 보면서는 눈가가 벌개지더라고요.” 한 젊은 주부는 남편에게 숨겨져 있던 ‘분노’를 발견하고 적잖게 놀랐다고 한다.

“당사자가 부인하는 상황이고, 사실로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익명의 악플들을 달아서는 안되잖아요?” 30대의 한 직장 남성은 최근 운동선수와 모종의 관계라는 한 여성 연예인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 놓는다.

우리 사회 도처에 분노가 넘쳐 난다. 정치 사회 경제 등의 공적 영역에서는 물론 친인척이나 지인, 친구간의 대화에서도 들끓는 분노를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히 분노의 시대라 할 만큼 여기저기서 분노가 분출하고 있다.

분노는 사실 우리 사회에만 가득한 게 아니다. 동서양, 빈국 부국을 가리지 않고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혹은 감지하기 어려웠던 분노들이 쏟아지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한 항공사가 초과예약이라는 ‘잘못’을 저질러 놓고, 탑승객을 기내에서 강제로 끌어 내리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퍼져나가면서 미국을 넘어 전세계에 분노가 홍수를 이루기도 했다.

과거보다 분노할만한 사안이 많아졌는지, 혹은 현대인들이 예전 사람들보다 관용이나 이해가 떨어져 쉬 분노하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확실한 사실은 현대인들의 분노 한 가운데 인터넷으로 특징 지워지는 확산 메커니즘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인들의 분노를 과거와 구분해 이름을 짓는다면, ‘디지털 분노’ 정도로 표현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디지털 분노는 국경을 초월하며, 젊은 세대에서 더 뚜렷하지만 중장년층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라는 점에서 세대도 뛰어 넘는다.

디지털 분노는 현 시대를 특징짓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분노는 그 자체로는 그다지 달가울 일 없는, 심리적 생리적 반응이다. 하지만 분노의 저변을 살펴보면 오히려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요소도 적지 않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분노는 보통 불의나 이익의 침해, 불평등한 처우 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분노의 감정은 대부분 공적 마인드, 즉 공동체나 한 사회 전체의 바른 작동을 가정하고 표출되곤 한다.

로또 당첨금을 둘러싼 남의 가족간 분쟁에 대해, 사적 이익을 기준으로 한다면 타인들은 분노할 이유가 없다. 또 이미 유명을 달리한 한 인간의 삶을 담은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동시에 분노하는 건 개인의 이해타산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현대인들의 분노가 잦다는 것은 그렇다면, 사회적 정의의 실현 같은 공공선이 과거에 비해 후퇴하거나 많이 무너졌다는 점을 반증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실감나게 공유할 수 없었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사안들이 물론 인터넷이라는 존재를 통해 널리 부각되고 있다는 점도 빠뜨릴 수는 없다.

19세기 영국의 급격한 공업화에 대한 분노를 담은 화가 마틴 존의
19세기 영국의 급격한 공업화에 대한 분노를 담은 화가 마틴 존의 ‘세상의 종말’. (사진=아트리뉴얼 닷 오그)

현대인들의 분노의 대부분이 ‘디지털 분노’라 하더라도, 분노의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디지털 분노의 대다수는 ‘제3자의 분노’지만, ‘당사자 분노’ 또한 드물지만 관찰된다. 제3자의 분노란 나와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없음에도, 예컨대 세월호 유족들이 공정하지 못하게 처우 받는 등의 상황에서 표출되는 분노이다. 당사자 분노란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침해 받거나 자존심 등 정신적 침탈에 대해 반응하는 형태로 흔히 나타난다.

인터넷 등에 댓글 혹은 답글의 형태로 표출되는 분노는 전형적인 제3자의 분노이다. 나와 직접적인 이해가 없음에도 왜 사람들은 분노할까? 상당수 과학자들은 집단의 이익과 생존을 지키기 위한 본능의 하나로 인간이 분노 메커니즘을 진화시켜 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인간이 군집을 이뤄 수렵하던 옛날 옛적에 누군가 사냥감을 공정하게 배분하지 않았다면 그에 대해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이 분노했다는 것이다. 먹을 거리를 제대로 나누지 않고 독식하거나 과다하게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자를 응징함으로써 집단 전체의 생존과 존속 확률을 높이려 했다는 얘기이다.

앵그리 아시안 맨(http://www.angryasianman.com/)이라는 블로그로 인기를 모으는 미주 한인 필 유씨를 표지 모델로 한 잡지. 유씨는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적 문화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 인물로 유명하다.
앵그리 아시안 맨(http://www.angryasianman.com/)이라는 블로그로 인기를 모으는 미주 한인 필 유씨를 표지 모델로 한 잡지. 유씨는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적 문화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 인물로 유명하다. (사진=코앰)

디지털 분노 가운데 대부분이 제3자의 분노라는 점에서 이런 해석은 의미심장하다. 예를 들어 빈부의 격차가 확대일로에 있는 공동체 혹은 사회라면, 분노의 총량이 더 클 수 밖에 없는 여건이라는 식의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한 사회의 분노가 더 커졌는지 혹은 별 변화가 없는지를 계량해 비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격차 확대가 한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약화시키고, 그로 인해 분노하기 쉬운 여건이 조성될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물론 분노는 일차적으로 각 개인의 감정이자 정서의 반영이어서 절대적으로 수치화하는 등의 접근은 어렵다. 똑 같은 사안, 똑 같은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분노하는 정도는 개인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리적 심리적 반응은 호르몬의 변화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분노 역시 호르몬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분노는 세로토닌(serotonin)이라는 호르몬의 영향을 적잖게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로토닌 호르몬이 부족하면, 똑 같은 사람이라도 더 분노를 조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분노는 종종 불의를 참지 못하거나 정의감의 발로인 때가 많은데, 이런 호르몬의 영향을 감안하면 똑 같은 사람이라도 세로토닌의 과소 여부에 따라 분노의 정도 혹은 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한편 세로토닌은 공격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호르몬이기도 하다.  좀 과다하게 단순화하면, 걸핏하면 싸우기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만성적으로 세로토닌 결핍 상황 아래 놓였다고도 할 수 있다.

디지털 분노가 한 사회의 불의 척결 등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그 역기능도 적지 않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걸핏하면 아주 심한 언사를 동원해 거의 무조건적으로 그 누군가를 혹은 한 사회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 이는 개인적인 공격성향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는 설령 온전히 이성적 판단에 따라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표출만큼은 감정적 형태를 띠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정당한 분노’마저도 그 표적이 되는 사람 혹은 집단의 입장에서는 공격 당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공격은 또 다른 공격, 즉 새로운 분노를 흔히 유발한다. 잘못은 잘못대로 시인한다 하더라도, 잘못을 지적한 상대나 집단에게 최소한 불편한 감정을 갖기 쉽다는 말이다.

특히 현대들에게 잦은 디지털 분노는 그 표출이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인 형태이며, 익명성을 띠는 경우가 많다. 눈에 보이는 상대의 분노를 대했을 때와 알지도 못하는 그 누군가의 분노 혹은 공격적 언사를 접했을 때 감정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분노는 그러고 보면 양날의 칼과 같다. 불편부당이나 불의를 향한 분노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지만, 정당하지 않은 분노는 사회에 해악이 된다. 인터넷 문화의 시대, 디지털 분노는 어쩌면 이제 일상의 일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개인과 공동체의 웰빙, 나아가 바람직한 문화 형성에 분노 매니지먼트가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한 시점이 아닐까. 

김창엽

◆ 김창엽 자유기고가

중앙일보에서 과학기자로, 미주 중앙일보에서 문화부장 등으로 일했다. 국내 기자로는 최초로 1995~1996년 미국 MIT의 ‘나이트 사이언스 펠로우’로 선발됐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문화, 체육, 사회 등 제반 분야를 과학이라는 눈으로 바라보길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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