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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길섶엔 젊음이 핀다, 섬맛은 덤

[김준의 섬섬옥수] 전남 여수 개도

2017.08.07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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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는 가막막과 여자만으로 드는 길목에 여러 섬을 아우르는 섬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먼 바다에서 들어오는 거친 파도를 막아 주는 역할도 한다. 개도가 있어 안섬이 편안하다.
개도는 가막만과 여자만으로 드는 길목에 여러 섬을 아우르는 섬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먼 바다에서 들어오는 거친 파도를 막아 주는 역할도 한다. 개도가 있어 안섬이 편안하다.

한 평생 살아가는 데 최고의 경험을 말할 때 ‘인생’이라는 말을 곧잘 쓴다. 인생 영화, 인생 사진, 인생 친구 등등. 내게 그런 ‘인생 막걸리’가 있다. ‘개도 막걸리’다.

정말 오래전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해돋이 장소 향일암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돌산도 남쪽 끝까지 가는 길이 지금처럼 좋았던 것도 아니고 호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았다. 춥고 배고픔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여수에는 섬 막걸리가 유명하다. 그 중 하나는 개도막걸리이며, 다른 하나는 낭도젓샘막걸리이다. 특히 가장 힘들고 배고프고 어렵던 시절에 마셨던 ‘개도막걸리’는 내게 ‘인생 술’이 되었다.
여수에는 섬 막걸리가 유명하다. 그 중 하나는 개도막걸리이며, 다른 하나는 낭도젓샘막걸리이다. 특히 가장 힘들고 배고프고 어렵던 시절에 마셨던 ‘개도막걸리’는 내게 ‘인생 술’이 되었다.

대학시절 이야기이니 30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다. 일주문을 지나 첫머리 상가를 돌아 내려오는데 ‘개도막걸리 있습니다, 따뜻한 홍합국 있습니다’라는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렸다. 절집아래서 할 말은 아니지만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었다. 모두 호주머니를 털어 차비만 남기고 막걸리를 시키고 홍합국과 깍두기로 배를 채웠다. 생각해보니, 그 맛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인생 맛’이 되었다.

개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에 있는 섬이다. 여수에서 돌산도 금오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이다. 백야도로 화정면사무소가 옮겨지기 전까지 면소재지였다. 지금도 그곳에는 8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가 있다. 큰개라 부르는 북쪽 일부를 제외하고 암석해안이 절벽을 이루고 있다. 이런 곳을 ‘비렁’이라 한다.

주변에는 고흥반도와 마주하는 적금도를 시작으로 둔병, 조발, 낭도, 사도, 추도, 상화도, 하화도, 백야도, 개도 등 보돌해 섬들과 자봉도, 월호도, 대두라도, 나발도, 화태도, 대횡간도, 소횡간도 등 돌산도 앞에 섬들이 별처럼 내려 앉아 있다. 여수다도해다. 이곳은 멸치, 문어, 갈치, 장어, 고등어, 새조개 등 어패류가 풍부한 황금어장이다. 여수 맛을 책임지는 섬이자 바다다.

소가 걷던 그 길이 명품길이다

개도 트레킹 코스가 개통되면서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사실 금오도 비렁길이 섬 여행객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게 되면서 여수지역 시민사회와 여수시가 ‘제2 비렁길’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주목한 곳이 개도였다.

개도는 금오도만큼 큰 섬은 아니지만 못지않는 자연과 섬살이를 간직한 곳이다. 몇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트레킹 코스가 개통되었다. 비렁길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이 땔감을 구하기 위해 오가던 길, 소를 몰고 다니던 길을 정비해서 만들었다. 개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길이라 이름도 ‘개도 사람길’이라 했다.

‘개도 사람길’이 금오도 비렁길 못지않게 인기다. 비탈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지고 소를 몰고 넘던 길이다. 그 길에서 소를 볼 수 없지만 여행객들은 길을 걸으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개도 사람길’이 금오도 비렁길 못지않게 인기다. 비탈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지고 소를 몰고 넘던 길이다. 그 길에서 소를 볼 수 없지만 여행객들은 길을 걸으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이 길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화산선착장에서 능선을 타고 천제봉과 봉화산을 거쳐 정목마을가지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었다. 새로 개통한 트레킹 코스보다는 난이도가 있었지만 등산객들이 꽤 찾는 산행길이다. ‘개도 사람길’은 화산선착장에서 호령마을까지, 그리고 호령마을에서 배성금까지 이어지는 두 개의 길이 마련됐다.

이중 호령마을에서 시작되는 코스는 예로부터 소몰이를 하던 코스다. 사실 모전과 호령마을 뿐만 아니라 개도에 대부분 마을은 밭에 고구마를 심어 식량을 하고 절간고구마를 말려 주정공장에 팔아 돈을 마련했다. 그 고구마를 심던 밭은  모두 그냥 서있기도 힘든 경사가 심한 밭이다.

트랙터는 말할 것도 없고 경운기로 들어가서 밭을 갈 수 없다. 오직 소를 이용해 쟁기질을 해야 한다. 그때 쟁기를 지게에 지고 소를 몰고 오가던 길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한두 마리 소를 키워야 했고, 아이들은 으레 소에게 먹일 풀을 베고, 여름철이면 소를 몰고 산으로 풀을 뜯기러 오가던 길이기도 했다.

모전마을과 호령마을, 개도 사람길 1코스 끝지점이자 2코스 시작점이다.
모전마을과 호령마을, 개도 사람길 1코스 끝지점이자 2코스 시작점이다.

‘큰개’를 열면 안 될까

화산선착장에서 월항마을로 가려면 지나야 하는 곳이 ‘큰개’다. 한 세대 전에는 이곳이 갯벌이었다. 지금은 소와 염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지만 당시에는 화산리와 신흥리 수 백호가 큰개에 기대어 살았다.

특히 낙지, 파래, 모시조개가 지천이었다. 섬 전체  500여 호가 살 때 300여 호는 큰개로 먹고 살았다. 쌀밥이 먹고 싶었던 섬사람들은 화수분처럼 갯것을 주던 갯벌을 막았다. 밀가루 배급을 받아 4만여 평의 땅을 만들었다. 그런데 물이 문제였다. 땅은 만들었지만 농사지을 물이 없다.

요즘 염전이나 농지로 조성된 땅을 자연습지로 되돌리는 자연화가 주목을 받고 있다.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기도 한다. 큰개는 여수시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제방의 수문만 열면 시나브로 염생식물과 갯벌생물들이 서식할 수 있는 곳이다.

얼마가 갯벌이 넓고 컸으면 이름도 ‘큰개’라 했을까. 이곳 갯벌에서 개도 주민들이 파래뜯고, 낙지잡고, 조개를 캐서 먹고 살았다. 갯밭보다 쌀농사를 짓는 논을 원해 간척은 되었지만  논도 얻지 못하고 낙지도 잃었다.
얼마가 갯벌이 넓고 컸으면 이름도 ‘큰개’라 했을까. 이곳 갯벌에서 개도 주민들이 파래뜯고, 낙지잡고, 조개를 캐서 먹고 살았다. 갯밭보다 쌀농사를 짓는 논을 원해 간척은 되었지만 논도 얻지 못하고 낙지도 잃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인위적으로 염생식물원을 만들고 갯벌학습장을 조성한다는데 이곳은 그대로 활용이 가능할 것 같다. 마을주민들과 여수 청년들이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자꾸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있던 것의 쓰임새를 바꾸고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고민해야한다. 그 대상으로 큰개처럼 주민들의 삶과 애환이 그대로 녹아 있는 장소가 적격이다.

개도가 명소로 꼽는 자갈밭, 해수욕장, 얼굴바위, 선녀탕, 거북바위, 미륵바위는 어디나 있다. 그렇지만 모전 멸치잡이, 개도 막걸리, 여석 석장승, 화산 큰개 등 섬 주민들 삶의 흔적이 있는 곳은 개도 뿐이다.

그래서 ‘개도 문화유산’이라는 문패를 달아야 한다. 주민들 누구나 아는 이야기, 주민들도 할 말도 많다. 누구라도 붙들고 물어보면 열이면 열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 소재들이다. 이렇게 좋은 소재와 이야기를 두고, 여행객도 외면하고 주민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만드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 것일까.

개도 밭은 기름지다. 오죽했으면 ‘개도는 돌도 오줌을 싼다’고 했을까. 비탈 밭에 고구마를 심어 식량을 했다. 지금도 고구마를 심어 식량을 하고 소주공장에 팔기도 한다.
개도 밭은 기름지다. 오죽했으면 ‘개도는 돌도 오줌을 싼다’고 했을까. 비탈 밭에 고구마를 심어 식량을 했다. 지금도 고구마를 심어 식량을 하고 소주공장에 팔기도 한다.

벅수야, 보고 싶다

내가 개도를 찾는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벅수’때문이다. 여수에서는 장승을 ‘벅수’라고 부른다. 여석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벅수 2기가 있다. 지역에서 확인되는 여석이라는 숫돌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마을 쪽을 바라보는 할머니벅수와 바다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벅수의 눈길도 새겨 볼 일이다.

안살림을 맡아야 할 할머니는 아무래도 마을 살펴야 했고,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던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바다를 살펴야 했을까. 특히 할아버지 벅수는 타원형의 눈, 삼각형의 코, 입을 벌려 활짝 웃는 표정이 인상적이다. 할머니도 눈과 코는 같은 형상이지만 이가 빠진 것이 친근함을 더한다. 예전에는 당제를 지낼 때는 벅수 앞에 제물을 차리기도 했다.

장승은 벅수라는 이름 외에도 장생, 미륵, 당산, 할매, 할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대표적으로 전북 부안, 남원, 순창, 전남 나주, 무안, 영암, 경남 사천, 대전 등에 남아 있다. 여수에는 선소, 망미산, 연등동, 동산동,  여수에는 벅수골이라는 지명 있을 정도 친근하며, 모두 25~30개의 벅수가 있다.

할아버지 벅수(왼쪽)와 할머니 벅수.

여수에서는 장승을 ‘벅수’라 부른다. 할아버지 벅수(왼쪽)와 할머니 벅수.

사모관대를 한 벅수들이 많지만 개도 벅수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모두 민머리다. 그리고 할아버지 벅수에는 여수 다른 벅수처럼 ‘남정중(南正重)’, 할머니 벅수는 ‘화정려(火正黎)’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연원을 사마천의 ‘사기’에서 찾는다. 창궐하는 질병을 잡고자 힘이 센 중(重)과 여(黎)에게 남정과 화정이라는 자리를 주어 힘으로 하늘과 땅을 나누어 놓도록 했다.

그리고 ‘중’에게는 신(神)으로서 하늘을, ‘여’에게는 ‘민(民)’으로서 땅을 관장케 했다. 그 뒤로 하늘과 땅이 서로 간섭을 하지 않고 질병도 맥을 추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여수 벅수는 천지를 관장하는 신이요 악귀를 쫓는 벽사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장승은 경계 표시, 신앙 등의 의미로 읽힌다. 바다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섬과 바닷가 사람들의 안녕, 외부에 들어오는 적들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의 상징이다.

여수청년들이 섬으로 들어왔다. 섬살이를 살펴보고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다. 여행객들이 여수를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젊은 기획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수를 꾸꿈스럽게 살펴보기 때문이다.
여수청년들이 섬으로 들어왔다. 섬살이를 살펴보고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다. 여행객들이 여수를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젊은 기획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수를 꾸꿈스럽게 살펴보기 때문이다.

생기발랄 도시 청년들

개도 선착장에서 여수의 젊은 친구들 20여 명을 만나기로 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청년들을 섬에서 만난 적이 있던가. 여수에서 청년으로 살아보겠다고 머물거나 들어온 친구들이다. 기특하게 새로운 상품을 기획하면서 아이디어를 얻겠다고 섬으로 들어온 것이다. 배를 처음 타 본 사람도 있다니, 섬에 와본 사람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선착장에서 만나 간단하게 소개를 하고 섬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했다. 함께 걷는 길은 여석마을로 이어지는 ‘개도 사람길’이다. 1코스 화산선착장에서 여석마을을 지나 모전과 호령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2코스는 호령마을에서 배성금까지 이어지는 비렁길 코스다. 청년들과 여석마을까지 걸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말없이 함께 걷기도 했다.

벅수를 닮고 싶은 여수젊은이, 손에 든 ‘안녕 여수’라는 손팻말도 여행객들에게 선보일 상품 중에 하나다.
벅수를 닮고 싶은 여수젊은이, 손에 든 ‘안녕 여수’라는 손팻말도 여행객들에게 선보일 상품 중에 하나다.

역시 젊음은 좋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천방지축이다. 즐겨야 한다. 그곳이 젊은이들 놀이터가 되어야 한다. 디자인을 하고 싶은 청년, 음악을 하는 청년,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 멋진 셰프를 꿈꾸는 청년…. 하고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다양하다. 이게 청년이다. 다양성이다.

여름으로 달리는 섬길은 생명으로 충만했다. 마치 여수청년들의 출발을 응원하듯 말이다. 아이디어도 다양하다.

즉석에서 찍는 사진과 놀이도 유쾌 발랄하다. 그래야 한다. 책상에 앉아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기성세대와 다르다. 여행을 즐기고 작은 것에도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환호성이다.

청년의 귀향

모전마을 자갈밭에 돌 구르는 소리는 그 자체로 여행객 발길을 잡는다. 그곳이 주민들에게는  낭장망으로 잡은 멸치를 말리는 건조장이다. 언덕에는 멸치를 삶는 가마가 있다. 모전 마을  생업이 멸치였던 적이 있다. 막 잡아온 멸치를 가마에 넣고 천일염을 몇 주먹 집어 넣고 꼬들꼬들하게 삶은 멸치 맛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갈밭에서 귀향한 섬 청년이 섬을 찾은 청년들을 만났다. 귀어 10년차 김영호가 주인공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간극장’에도 출연했다. 이곳에서 공개 구혼을 한 후 결혼까지 한 당찬 청년이었다. 그리고 형까지 귀향을 권해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멸치잡이를 하고 있다.

청년들이 귀향한 섬 청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질문도 이어지고 답변도 길었지만 진지하다. 섬은 그들의 것이다. 미래의 가치이기에 청년들이 기획하고 만들어야 한다.
청년들이 귀향한 섬 청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질문도 이어지고 답변도 길었지만 진지하다. 섬은 그들의 것이다. 미래의 가치이기에 청년들이 기획하고 만들어야 한다.

어렸을 때는 눈만 뜨면 섬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 소원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부모님의 바람대로 직장생활도 도시에서 했다. 늘 불안하고 녹록치 않은 도시생활에 연속이었다. 살아서는 섬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말라 하셨던 아버지 눈치를 보다 30대 초반에 귀향을 했다.

고향은 편안했다. 도시처럼 얄팍하지도 각박하지도 않았다. 나이가 들어 일손이 필요한 아버지가 오히려 아들을 반겼다. 낭장망 멸치잡이 가업을 잇고 있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단다. 이제 그는 여수의 젊은 청년들을 유혹하고 있다. 섬과 바다가 얼마나 큰 기회의 장소인지 청년들에게 힘주어 말한다. 섬청년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자갈밭에 뒹군다.

섬으로 들어와 아이디어를 찾겠다는 청년이나 이를 기획한 사람의 발상이 흥미롭다. 섬은 미래다. 기성세대의 개발 대상이 아니다. 토건은 더욱 아니다. 섬 생태와 문화를 청년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이유다. 섬과 바다는 미래가치이기에 그들의 몫이기에.

청년들에게 섬은 교실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젊은이에게 개발된 섬이 아니라 생각할 섬을 물려주어야 한다. 여수가 그랬으면 좋겠다. 젊은이의 생각을 가로막는 것을 치우는 일이 기성세대가 할 일이다.
청년들에게 섬은 교실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젊은이에게 개발된 섬이 아니라 생각할 섬을 물려주어야 한다. 여수가 그랬으면 좋겠다. 젊은이의 생각을 가로막는 것을 치우는 일이 기성세대가 할 일이다.


김준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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