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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새 지평
이란 전쟁이 미·중 관계에 미친 영향과 한국의 대응
베이징 미·중 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그 동력이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것인가와 그 경우 남북 관계 재개로까지 파급될 것인가에 있다…북·미와 북·일 간에도 비핵화와 관계없이 관계 정상화를 지지한다는 태도를 표명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여겨진다. 홍현익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을 쉽게 납치한 데 이어 역시 중국에 석유를 대량 수출하는 이란에 친미 정권을 세워 석유를 장악하고 대중 전략 우위를 다진다는 생각에 별 명분 없이 이란을 공격했다가 곤경에 처하고 있다. 중국에 유리한 이란 전쟁 영향 미국은 이란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수십 명의 지도자들을 제거했을 뿐 정권 교체에 실패했고 뒤늦게 핵 문제 해결을 전쟁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미국을 믿을 수 없는 이란은 호응하지 않고 있다. 공급망 불안정과 유가 상승으로 이스라엘을 제외한 전 세계인들의 원성도 샀다. 미국의 석유 대기업들도 큰 적자를 보았고, 석유 통제로 중국을 옥죄려던 계산은 착각이었다. 중국은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이고 이란 석유 수출의 90%를 수입해 왔지만, 그간 미국의 봉쇄에 대비해 에너지 자급률을 높여왔다. 원자력, 태양광, 풍력 개발로 에너지 자급률이 80%가 넘는 데다 러시아, 중앙아, 말레이시아 등과의 에너지 협력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혀도 결정적인 피해를 보지는 않는다. 반면, 중국은 다양한 이득을 얻어왔다. 군사적으로 한국의 사드, 패트리어트, 일본의 31해병원정대의 전부 또는 일부가 중동으로 이전됐다. 아태지역 미국의 대중 억제력이 약해졌고 한국과 일본의 대미 동맹 신뢰도 저하됐다. 미사일 등 소진된 무기를 보충하려면 수년이 소요될 것이다. 미국은 별 명분 없이 이란을 공격해 국가신인도도 추락했다. 이란의 대미 공격 임박 징후가 없는 상황에서 더구나 미국-이란 협상이 진전되는 가운데 이란을 공격했기에 신뢰하기 어려운 나라가 됐다. 미국이 폭격으로 무고한 170여 명의 어린이들을 희생시키고 사과도 하지 않은 반면, 중국은 조용히 평화적 해결과 국제법 존중을 주장했다. 중국의 대만 공격 시 미국은 저지할 적당한 명분을 찾기도 어려워졌다. 미국은 상의 없이 시작한 이 전쟁을 돕지 않았다고 나토 동맹국들을 비난하고 보복관세를 물리며 독일에서 미군 감축에 나섰다. 글로벌 사우스는 물론이고 나토 지도자들도 위험분산과 실리 추구를 위해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유가 급등으로 대체 에너지 수요가 커져 중국이 선점하고 과잉생산으로 비난받던 전기차·태양광·배터리 부문이 호황이다. 중국 건설업체는 전후 막대한 이란 재건 수요의 최대 수혜자로 예정돼 있다. 정부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해 해상운임 급등과 물류 적체라는 이중고를 겪는 자동차 수출업계를 위해 현장 밀착 지원에 나섰다. 사진은 3일 경기도 평택항에 수출용 자동차 선적 작업이 진행 중인 모습.(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미·중 정상회담 전망 무기 생산이 시급한 미국은 이에 필요한 희토류를 독과점하고 있는 중국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더구나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휘발유 등 미국의 물가 상승은 최저 지지율로 난처한 트럼프 대통령을 더 압박하고 있다. 어쨌든 미국은 오히려 최근 첨단 기술 및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대중 신규 수출 통제 조치 부과에 나서고, 중국의 이란 석유 수입업체들을 제재하며 중국계 은행에도 2차 제재를 시사하는 등 공세를 취하고 있다. 이에 중국도 제재 금지령으로 대응했다. 여러 정황상 미국이 정상회담에서 중국을 압박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란 전쟁에서 명예로운 철수의 명분을 얻기 위해 이란을 설득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따라서 이란 전쟁의 향배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이 또 연기될 수도 있겠지만, 예정대로 이달 중순 성사된다면 양측은 미국의 대중 경제·무역 제한 조치를 완화하고 작년 10월 부산 정상회담 합의의 후속 조치와 양국 관세 전쟁의 휴전 연장 등에 합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대응전략 베이징 미·중 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그 동력이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것인가와 그 경우 남북 관계 재개로까지 파급될 것인가에 있다. 이번 전쟁으로 북한의 핵 집착이 더욱 커진 것이 난관이다. 핵심은 우리가 북한이 주장하는 두 국가론과 비핵화에 대해 현실적이고 전향적인 태도와 정책을 취하느냐에 달려있다. 먼저, 한국과 미국이 북한에게 현실에 상응한 지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비핵화도 필요하지만 일단 이를 전제조건화하지 않고 북한이 핵을 동결하면 사실상의 두 국가를 용인할 수 있다는 태도로 관계를 재개하고 진전시키는 것이 현명하다. 양측 간 신뢰가 쌓이면 궁극적으로 비핵화 문제가 해결된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또 북·미와 북·일 간에도 비핵화와 관계없이 관계 정상화를 지지한다는 태도를 표명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여겨진다. 끝으로 미국도 터부 없이 대화하는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착실히 단계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홍현익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27년 간 세종연구소에서 북핵문제, 남북관계, 한미동맹, 한러관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한국의 국가안보와 국가전략을 연구했다. 한반도 정세 안정과 평화 구축 및 평화통일을 위해 화해와 공동번영 및 국익 극대화를 지향하는 실용외교를 주창해왔다. 국정기획위원회 외교안보 분과장을 맡았다.
2026.05.06
홍현익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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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경제다
연속 충격에 따른 가계 경제의 좀비화 막아야
재정 부담 없이 불공정한 조세체계의 정상화를 통해 가계소득을 제도적으로 강화하지 않는 한 이번 충격이 끝난 후 우리는 0%대 성장의 시대를 맞이하고, 가계 가처분소득은 후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올해 1분기 성장률 1.7%(전년 동기 대비 3.6%)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2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이후 반등했던 2020년 3분기 성장률 2.2%를 제외하면 16년 만의 최대치였다. 더구나 이란전쟁에 따른 에너지 및 원자재 대란 속에 거둔 성적이기에 많은 국민에게 1분기 성장률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반도체 호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대한민국 경제는 반도체를 빼놓으면 얘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코스피 붐부터 244조 4000억 원의 국민연금 운용수익에 힘입어 역대 최대로 증가한 지난해 국가 순자산(약 180조 원), 처음으로 2000억 달러를 돌파한 분기당 수출액 등 모두 반도체의 산물이다. 특히 1분기에 기록한 무역흑자 504억 달러는, 그 이전 최고 기록인 302억 달러를 200억 달러 이상 넘은 규모이고, 연간 무역흑자 기준으로도 500억 달러가 넘었던 해는 여섯 번뿐이었다.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 야적장의 컨테이너 모습. 2026.4.1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AI 투자 열풍에 따른 반도체 붐은 사실 예고된 것이다. 2022년 말 챗GPT 등장 이후 2년 만에 대만 가권지수가 두 배(105%) 상승했고, 올해도 이미 약 33% 상승했다. 대만 가권지수 상승의 중심에는 2023년 이후 376% 상승한 TSMC가 있듯이, 반도체 붐은 대만 경제를 신세계(?)로 이끌었다. 반도체 붐에 힘입어 2023~2025년 3년간 대만의 연평균 성장률은 5.0%에 달했다.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 4만 585달러)이 한국(3만 6855달러)을 추월한 배경이다. 한국이나 대만 모두 2만 달러대에서 3만 달러대로 점프하는 데 10여 년 걸렸으나, 한국은 2014년 이래 12년간 3만 달러대에 머물러 있지만, 대만은 2021년 3만 달러대에 진입한 이후 반도체 호황 덕에 4년 만에 4만 달러대로 진입했다. 올해는 4만 5273달러를 전망하고 있는데 이런 속도면 1~2년 내에 5만 달러도 돌파할 기세이다. AI 열풍이 데이터센터 규모 경쟁으로 확산하며 뒤늦게 불이 붙은 한국 메모리 반도체의 붐이 한국 1분기 성장률이었다. 반도체는 1분기 수출을 전분기보다 16%나 끌어올렸고, 무역수지는 무려 83%나 증가시켰다. 1분기 성장률 1.7% 중 1.1%포인트가 그 결과물이고, 설비투자 성장기여도 0.2%포인트도 대부분 반도체 붐의 산물이다. 그런데 한국 수출이 4%도 성장하지 못했던 2023년 이후 2025년까지 대만 수출은 33% 이상 증가하였으나, 올해 1분기 수출은 지난해 4분기에 비해 대만이 4.4% 증가하였고 한국은 15.9%나 증가했다. 이처럼 반도체 수출의 높은 증가율은 지속될 수 없다. 전분기 대비 대만의 수출 증가율은 지난해 2분기에 18.7%로 정점을 찍은 후 3분기와 4분기에는 각각 10.2%와 10.7%로 하락했고, 올해 1분기에는 4.4%까지 급감했다. 반도체에 대한 수요는 지속할 수 있어도 성장률이 계속 증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이미 1%대에 진입한 상태이고, 계속 하락하고 있기에 이대로 가면 조만간 '일본화'를 의미하는 0%대로 진입하는 것도 불가피하다. 수출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이기 때문에 내수 강화만이 성장률 하락을 막을 수 있다. 표 1을 보면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가계소비가 크게 훼손된 한국과 달리 대만은 가계소비 추락을 막은 결과 한국보다 두 배 이상의 성장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가 관리에서도 지난 10년간 한국의 소비자물가는 23% 상승했으나 대만은 16%에 불과했다. 한국과 대만 모두,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가계소비 약화가 성장률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으나,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과 대만의 차이는 가계소비 하락의 차단 여부에서 결정됐다. 표 2는 AI 붐 이후 한국과 대만 경제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반도체 수출 붐에 의해 새로운 기록을 보일 한국의 성장률이 최근 대만의 성장률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표 1 한국과 대만의 연평균 성장률과 연평균 전체 가계소비 증가율(%), 표 2 AI 붐 이후(2023~25년) 한국과 대만 경제의 비교. 가계소비와 내수의 중요성은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표 3은 한국과 일본과 미국, OECD 평균을 비교하였다. 한국은 세계화-외환위기-금융위기-코로나 팬데믹과 러·우전쟁 충격이 있을 때마다 성장률이 약 2%포인트씩 하락하였고, 그 중심에 가계소비 하락이 있었다. 쉽게 예상하듯이, 가계소비 하락은 가계 가처분소득 하락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금융위기 이후(2008~2019년) 가구당 실질 가처분소득은 연평균 1.19%였으나 코로나 팬데믹 이후 0.46%로 급락하였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성장률이 1%대로 하락한 배경이다. 한국 경제는 일본의 길을 밟고 있고, 이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서 외부 충격이 있을 때마다 내수와 가계 희생으로 대응한 산물이다. 참고로 일본 전체 가구의 실질 가처분소득의 연평균 증가율은 금융위기 전(1994~2007년) 0.47%에서 금융위기 이후(2008~2019년) 0.15%, 그리고 팬데믹 이후(2020~2025년) -0.47%로 추락해왔다. 그 결과가 '잃어버린 34년'이다. 반면, 표 2에서 보듯이 미국이 팬데믹 이후 금융위기 이후보다 성장률이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가계소비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계소비의 회복은 연평균 2.2%에서 2.4%로 증가한 실질 가처분소득 증가의 산물이다. 표 3 한국-일본-미국-OECD 평균의 연평균 성장률과 전체 가계소비 증가율(%) 이제 한국 경제는 새로운 충격을 맞이하고 있다. 2025년 트럼프 관세에 이은 2026년 이란전쟁은 공급 충격이라는 점에서 2020~2021년 코로나 팬데믹에 이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의 공급 충격과 유사하다. 문제는 대외 충격의 빈도가 지난 20년보다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성장률이 3%대에서 2%대로 하락하는 데 6년이 걸렸으나 2%대에서 1%대로 하락하는데 4년으로 줄어든 배경이다. 이란전쟁 등 '트럼프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에너지 대란에서 식량, 원자재 대란 등으로 발전할 이란전쟁 충격은 길게는 2년 이상 지속할 것으로 예상한다. 1%대 성장률이 무너지면 가계 경제는 사실상 좀비화된다. 1분기 가구의 월평균 실질 소비지출(367만 원)이 1년 전보다는 약 6만 원 정도 증가했음에도 2019년 1분기의 369만 원에 미달하는 현실이 비현실적 1분기 성장률 속에 가려진 부분이다. 1분기 자영업자 월평균 실질 소매판매액이 1년 전보다 약 15만 원 증가했으나 2022년보다 18만 원 이상 부족한 배경이다. 노동자의 올해 1~2월의 월평균 실질급여가 2022년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월급쟁이 급여는 이미 멈추었다. 문제는 물가 공포가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1회성 지원으로 물가 부담의 일부를 완화하는 것은 본질적 대책이 아니다. 재정 부담 없이 불공정한 조세체계의 정상화를 통해 가계소득을 제도적으로 강화하지 않는 한 이번 충격이 끝난 후 우리는 0%대 성장의 시대를 맞이하고, 가계 가처분소득은 후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자 최배근 경제연구소 이사장. 건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사학회 회장, 민족통일연구소 소장, 대안학교인 민들레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누가 한국 경제를 파괴하는가, 화폐 권력과 민주주의 등이 있다.
2026.05.04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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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일의 미래
미토스와 한국의 보안
보안은 미토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제 인공지능을 전제하지 않거나, 인공지능이 없이는 대응할 수 없다. 사후 대응에서 동시성 방어로 전환해야 하고, 뚫린다는 것을 전제로 정책을 짜야 한다. 1년에 한 번 인증으론 당연히 안 된다.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미토스 얘기를 할 차례다. 그전에 프로야구 얘기부터. 20년 내리 꼴찌를 하고 있는 팀이 있다고 하자. 내내 같은 감독이었다. 구단에서 그 감독을 이번 시즌에도 또 쓰겠다고 한다면 팬들 마음이 어떨까? 롯데와 한화 팬들은 이 마음을 아주 잘 알 것이다.(심지어 올해 롯데는 '봄데(봄+롯데)'도 없어졌...) 20년째 내리 꼴찌를 한 이유가 뭔지, 그 이유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됐는지, 그래서 무얼 바꾸면 달라질 건지, 어떻게 바꿀 건지, 내년 시즌 상대 팀의 전력은 어떤지, 그래서 우리는 뭘 하려고 하는지. 팬들이 이런 리포트를 먼저 내놓으라고 요구한다면 그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케이(K)-푸드, K-뷰티, K-팝 등 'K-열풍'이다. 한국을 찾는 해외관광객 수도 갈수록 늘고 있다. 2025년에는 1850만 명을 돌파, 역대 최고 기록을 깼다. 한국 화장품을 찾고, 한국 먹거리를 찾고, 한국 패션을 찾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계적인 한국 쇼핑몰이 하나도 없다. 알리니 테무니 중국 쇼핑몰이 하루가 다르게 한국시장 점유율을 높이는데 어째서 한국 쇼핑몰은 하나도 해외로 나가지 못할까? 한국 쇼핑몰은 휴대폰 본인 인증을 요구한다. 그게 없으면 인증서를 보여달라고 한다. 해외 신용카드나 페이팔과 같은 글로벌 결제 수단을 지원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니 해외에서 K-푸드, K-뷰티, K-팝을 사고 싶어도 살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안 팔겠다는데… '액티브엑스'는 아주 쉽게 말하면 브라우저에서 PC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읽고 프린터를 쓰고 컴퓨터의 설정을 변경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문제는 설치에 동의하는 순간 내 컴퓨터의 관리자 권한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내 컴퓨터의 모든 정보가 넘어간다. 잠깐 놀러 온 친구에게 집안의 모든 키를 죄다 넘겨준 꼴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5년 전인 2011년 윈도8부터 액티브엑스 기술을 퇴출했다. 계속해서 액티브엑스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것은 대한민국의 보안당국이다. 공인인증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공인인증서는 애초에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채택한 것인데, 그걸 쓰기 위해 가장 보안이 취약한 액티브엑스를 남겨달라는 것이다. 무슨 이런 보안당국이 다 있지? 지난달 18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제25회 세계 보안 엑스포(SECON 2026)& 제14회 전자정부 정보보호 솔루션 페어(SECON 2026)에서 관람객들이 전시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구라제거기'가 세계 최고의 보안컨퍼런스 USENIX Security '25에 논문으로 채택됐다. 논문제목은 '과유불급'. 한국의 강제 설치 보안 소프트웨어들이 오히려 PC의 공격 표면을 넓히고 시스템을 더 취약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밝힌 논문이다. '구라제거기'는 은행이나 관공서에 접속하면 깔기를 요구하는 숱한 보안프로그램들을 한 번에 지울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그램의 이름이다. 그게 다 '구라(거짓말)'라는 것이다. 은행이나 관공서에 접속할 때마다 5~10개의 서로 다른 업체가 만든 키보드 보안, 방화벽, 백신 등 보안 프로그램이 설치된다. 그 결과? 해커로서는 이제 윈도 자체의 취약점을 찾을 필요가 없다. 설치된 10개의 프로그램 중 가장 실력이 낮은 업체가 만든 프로그램의 구멍 하나만 찾으면 PC 전체의 권한을 단번에 탈취할 수 있다. 보안을 위해 설치했더니 되레 '수십 개의 뒷문'을 열어준 꼴이다. USENIX Security '25 논문에 따르면 한국 보안 프로그램들을 전수 조사한 결과 이미 10년 전에 해결된 버퍼 오버플로우 등 아주 기초적인 취약점이 여럿 발견됐다. 맙소사… 게다가 이런 관행이 몹시 나쁜 것은 사용자로 하여금 습관적으로 '예'를 클릭하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용자들은 무언가 설치하라는 팝업이 뜨면 내용도 보지 않고 '확인'이나 '예'를 누르는 습관이 있다. 보안 정책이 사용자를 '무조건적인 수용'에 길들여 버린 것이다. 무슨 이런 보안당국이 다 있지? 2026년의 대한민국 공무원들은 여전히 모바일로 일을 하지 못한다. 클라우드도 제대로 못 쓴다. 클라우드 정책을 펴는 담당자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써본 적도 없는 일을 정책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물론 보안당국때문이다. 영국정부가 '클라우드 퍼스트'를 내세운 게 2013년이다. 그 13년 뒤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클라우드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무슨 이런 보안당국이 다 있지? 이제 미토스 얘기를 할 시간이다. 미토스는 앤트로픽이 만든 최신 인공지능(AI) 모델이다. 압도적인 해킹능력을 가지고 있다. 단 몇 초 만에 수십 년간 발견되지 않았던 제로데이 취약점을 찾아낸다. 앤트로픽에 따르면 모든 주요 운영체제(OS)와 브라우저에서 수천 개의 고위험 취약점을 순식간에 발견했다. 그래서 보안은 미토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제 인공지능을 전제하지 않거나, 인공지능이 없이는 대응할 수 없다. 사후 대응에서 동시성 방어로 전환해야 하고, 뚫린다는 것을 전제로 정책을 짜야 한다. 1년에 한 번 인증으론 당연히 안 된다. 실시간 상태 검증이 가능해야 한다. 보안 상태는 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로 상시 공개할 수 있어야 하고, 개방형보안통제평가언어(OSCAL, Open Security Controls Assessment Language)와 같은 국제표준을 사용해 인공지능이 자동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기계가 읽을 수 있고, 상호 운용이 가능하며 인공지능을 활용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 감독을 데리고? 그 보안당국이 또 이걸 한다고? 사이버 보안을 국가정보원이 맡을 수도 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맡을 수도 있고, 새 환경에 맞게 새로운 기관을 만들 수도 있다. 그 전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다. 지금까지의 보안정책이 왜 이렇게 해괴하게 흘러올 수 밖에 없었는지, 어떤 가버넌스상의 잘못이 이러한 문제들을 방치해 왔는지, 그래서 그걸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고치려고 하는지를 먼저 얘기해야 한다. 국정원과 과기정통부가 각기 이런 보고서를 만들면, 그 보고서를 놓고 최고의 민간 전문가들이 함께 토론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정부 안에서 부처끼리만 깜깜이로 협의한 채 어물쩍 넘어가선 절대로 안 된다. 우리는 이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숱한 피해를 감내해 왔다. 우리는 가을야구를 하고 싶다. 한국의 세계적인 쇼핑몰이 K-푸드, K-뷰티, K-팝을 즐겁게 파는 걸 보고 싶고, 혈압이 오르지 않은 채 인터넷 뱅킹을 해보고 싶다. 이게 그렇게 큰 꿈인가.◆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KTH, 엠파스 등 IT 업계에서 오래 일했으며 현재 녹서포럼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IT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21년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눈 떠보니 선진국, 박태웅의 AI 강의 등이 있다.
2026.04.29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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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코리아의 글로벌 전략
캐나다 잠수함 사업, 한국 방산 '대박' 넘어선 전략적 도약 기회
캐나다 잠수함 사업은 한국의 방산, 산업, 자원, 외교, 안보 전략 전체를 한 단계 끌어올릴 드문 기회다…이 사업은 단지 잠수함 몇 척의 수주가 아니라 한국이 해양 방산, 자원안보, 산업협력, 글로벌 안보 연계 그리고 해양 국방력 투사 강화를 하나의 전략으로 결합할 수 있는지를 가르는 시험대다.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 지원이 집중되는 가운데,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이 주도하는 '팀코리아'가 약 60조 원 규모의 캐나다 초계잠수함사업(CPSP) 수주전의 최종 단계에서 독일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스(TKMS)와 경쟁하고 있다. 이 사업은 캐나다의 노후 빅토리아급 잠수함을 대체하고 최대 12척 규모의 잠수함 전력을 새로 구축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건조비만 약 20조 원 수준이지만, 향후 30년간의 유지·보수·운영(MRO) 비용까지 포함하면 전체 사업 규모는 60조 원 안팎으로 커진다. 2026년 중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이 예정된 가운데, 한국은 잠수함 성능과 건조 기간뿐 아니라 현지 생산, 기술 이전, 산업 협력, 장기 정비체계까지 묶은 패키지형 제안을 제시했다. 반면, 독일 TKMS 진영은 폭스바겐의 이탈로 절충교역 공조에 균열이 생겼다. 곽광섭 해군참모차장이 지난달 25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해군기지에서 열린 '도산안창호함(SS-Ⅲ) 한국·캐나다 연합협력훈련 출항 환송 행사'에서 승조원을 격려하고 있다. 3천t급 잠수함 1번함인 도산안창호함은 오는 6월 예정된 한국·캐나다 해군 연합협력훈련 참가를 위해 대한민국 잠수함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한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러나 이번 수주의 의미는 단순한 방산 수출 실적이나 또 하나의 '대박'에 그치지 않는다. 캐나다 잠수함 사업은 한국의 방산, 산업, 자원, 외교, 안보 전략 전체를 한 단계 끌어올릴 드문 기회다. 핵심은 네 가지다. 첫째, 한국 방산이 비로소 '토털(종합) 패키지' 구조로 완성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 방산 수출의 주력은 K2 전차, K9 자주포, K239 천무 다련장 등 육상 무기체계였다. 반면, 해양무기체계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조선 역량과 잠수함 건조 능력을 갖추고도 대형 수출 성과가 제한적이었다. 호주 호위함 사업 실패와 폴란드 오르카 잠수함 사업 좌절은 그 한계를 보여준 사례다. CPSP 수주는 이런 구조적 약점을 돌파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육상 중심의 수출국에서 벗어나 잠수함과 수상함까지 포괄하는 국가가 될 때, 한국 방산은 비로소 육해공 전 영역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글로벌 탑(Top) 4~5위 방산국으로 자리 잡게 된다. 둘째, 이 사업은 캐나다와의 전면적 산업·자원·기술 협력을 여는 계기다. 캐나다는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희토류 등 한국이 구조적으로 부족한 전략자원의 주요 공급 기반이 될 수 있는 나라다. 동시에 인공지능(AI), 청정에너지, 첨단 제조 분야에서도 중요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한국은 방산 협력을 매개로 자원안보와 공급망 안정, 첨단산업 협력을 동시에 묶을 수 있고, 캐나다는 한국의 제조·조선 역량을 유치해 산업 재도약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노바스코샤의 조선산업과 온타리오의 배터리·자동차·수소 생태계, 앨버타의 석유·가스 산업이 한국 기업들과 결합하면 이는 단순한 무기 구매가 아니라 사실상의 산업동맹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전략자원을 확보하고, 캐나다는 제조 역량을 흡수하는 구조다. 셋째, 가장 큰 의미는 안보와 외교 차원에 있다. 캐나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자 주요 7개국(G7) 해당하며, 인도·태평양과 유로대서양을 연결하는 핵심 북미 국가다. 잠수함 도입과 30년 MRO 체계는 단발성 거래가 아니라 운용, 정비, 훈련, 교리, 산업기반을 장기적으로 공유하는 구조를 뜻한다. 이는 한국이 미국 일변도의 안보 연계 구조를 넘어, 핵심 NATO 국가와 실질적 전략자산 관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 폴란드, 루마니아 등 동유럽 네트워크에 더해 캐나다까지 연결된다면, 한국은 서방 안보 네트워크 안으로 더 깊이 진입하게 된다. 이는 동맹의 대체가 아니라 안보 기반의 다층화며 사실상의 준동맹적 확장이다. 또한 캐나다의 전략적 범위를 기존 유럽 중심에서 동아시아로 확장시켜 주게 된다. 넷째, 이러한 협력은 인도·태평양에서 한국의 안보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미국에 대한 전략적 레버리지도 강화한다. 최근 미국은 자국중심주의의 압력 속에서 기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안정적으로 떠받치지 못하는 모습을 반복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캐나다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호주 등과의 안보·산업 협력을 확대하면, 이는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의 협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방위비, 통상, 기술통제, 공급망 재편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한미군 감축과 같은 핵심 현안에서 한국은 더 넓은 전략적 선택지를 갖게 된다. 물론 과제는 남아 있다. 북극해와 극한 환경에서의 운용 경험 부족, 한국 해군의 근해 중심 작전 범위, NATO 비회원국이라는 제도적 한계, 무엇보다도 한국 해군의 역량 부족은 여전히 약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답보 상태인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 한국형 차세대구축함(KDDX) 사업과 급감하는 해군 장교, 부사관 병력 상황이 뼈아프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CPSP는 더욱 중요하다. 이 사업은 단지 잠수함 몇 척의 수주가 아니라 한국이 해양 방산, 자원안보, 산업협력, 글로벌 안보 연계 그리고 해양 국방력 투사 강화를 하나의 전략으로 결합할 수 있는지를 가르는 시험대다. 물론 한국 해군이 한반도 근해에서 인태-유럽 해양으로 투사력을 확대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지금 캐나다에서 벌어지는 것은 단순한 계약 경쟁이 아니다. '글로벌 Top 10 코리아'의 새로운 미래 지평을 열 수 있는 경쟁이다.◆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UCLA 정치학 박사로 혁신 과학 시대의 정치적 新舊 난제에 천착하는 융복합정치학자다. 국내·국제정치의 상호작용, 글로벌 안보컨버전스, AI 정치와 정책을 연구한다. 주요 저서로는 피크코리아(Peak Korea)가 출간됐으며, 그 국제편에 해당하는 세계에서 한국은 얼마나 쓸모있을까?를 집필 중이다. 또한 Global Expansion of Korea's Defense Industry는 2026년 출간 예정이다.
2026.04.24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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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균형
고등교육 시대 지방의 일자리 만들기
해방 이후 이촌향도는 서울뿐 아니라 동남권 산업도시로도 향했다. 중화학공업화가 만든 제조업 일자리가 지방 성장을 이끌었지만, 대학진학률 76% 시대에 그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지방에 필요한 건 생산직이 아닌 연구개발·창업 중심의 지식기반 일자리이며, 이를 위한 혁신생태계 조성이 선결 과제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한국인들은 해방 이후 열심히 이촌향도를 해 왔다. 서울·수도권 사람들은 이촌향도를 으레 '시골에서 서울로'라고 읽지만, 역사적 현상은 달랐다. 사람들이 서울로만 향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북상하지 않고 동진하여 동남권으로 향했다. 두 갈래 물결이 있었다. 첫 번째는 경공업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주인공 오애순의 큰아버지는 애순이더러 부산의 섬유·신발·가발 공장으로 가라고 압박한다. 마산의 한일합섬, 부산이나 대구의 섬유업체들은 1960~1980년대 젊은 여성 노동자들을 빨아들였다. 서울에 평화시장 전태일과 여공의 이야기가 있다면, 마산에는 전국 팔도 소녀들이 고향 흙으로 조성한 '팔도 잔디'의 사연이 있다. 본격적인 동남권 이주를 만든 두 번째 흐름은 1973년 중화학공업화다. 포항·울산·거제·창원·광양·여수에 포스코를 시작으로 자동차·조선·석유화학·방산 사업장이 들어서면서 전국의 청년 남성들이 산업도시로 몰려들었다. 성실하게 일하면 "쨍하고 해 뜰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였다. 중화학공업화 이전에는 공대를 나와도 할 일이 없었지만, 이제는 공고·전문대 출신 기능인력 모두가 현장에 빠르게 투입됐다. 당시 과기처 보고서에는 인원 부족 타개가 가장 시급한 사안으로 등장한다. 국방만큼 산업화가 중요하다 보니 병역특례 혜택도 많았다. 공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현장에 투입된 청년이 40년씩 회사를 지켰고, 직업훈련소에서 몇 달 교육을 받은 이들도 곧바로 1인분을 해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처우가 개선되면서 고임금·높은 근속·성과급·복지를 누리는 '중공업 가족'의 신화가 완성됐다. 상경한 사람들과는 다른 경로로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창출됐고, 그게 지방 도시 성장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1970년대식 방식은 가능하지 않다. 대기업이 고용하려는 인원의 구성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2024년 현대자동차그룹은 2026년까지 8만 명 고용을 약속했는데, 6만7천 명이 사무직 또는 기술직·연구개발직이었다. 나머지 1만3천 명도 생산직 신규 채용이 아닌, 정년퇴직자의 촉탁 재고용이었다. 많은 지자체들은 국가산단과 대기업 공장 유치로 생산직 고용을 창출하려 하지만, 청년들은 내일채움공제나 정주 보조금을 얹어도 양질의 일자리로 여기지 않는다. 청년들은 대기업 원청 정규직이 아니라면 공장 대신 물류센터 버스를 탄다. 공장·조선소 알바가 흔했던 창원의 청년들도 이제는 제조업체에 가지 않는다. 대학진학률이 76%에 달하는 시대에 생산직을 권하는 건 눈높이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첨단'을 아무리 붙여도, 원청 정규직 일자리가 아닌 이상 청년들은 거부할 수밖에 없다. 지방의 일자리 문제는 결국 어떤 종류의 일자리를 만드느냐의 문제다. 현재의 노동시장을 고려할 때, 지역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혁신도시의 공공기관 이전보다 제조 대기업의 연구소, 연구개발·엔지니어링 기능을 통합적으로 갖춘 사업장, 그리고 창업기업이다. 그런데 민간기업을 지방으로 강제로 보낼 수는 없다. 시장경제가 성숙한 지금, 기업이 자발적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혁신생태계라는 인프라가 먼저 갖춰져야 한다. 1970년대 고속도로가 산업화의 전제 조건이었듯이. 활성화된 산학연 연구 공동체,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어 사업을 해보겠다는 창업가들의 네트워크, 그걸 뒷받침하는 선진화된 금융과 행정이 필요하다. 그냥 부지를 인허가 해준다고 될 일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진화가 필요한 이유다. 구색을 갖출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고민하다 보니 행정통합과 메가시티, '서울대 3개'를 언급하게 되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27일 전북 군산새만금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새만금 로봇·수소·AI 시티 투자협약식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2026.2.27(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올해 2월, 현대차그룹이 전북 새만금에 9조 원 투자 협약을 맺었다. AI 데이터센터·로봇 공장·수소 클러스터를 묶은 이 협약은 정부의 5극3특 전략과 정확히 연동됐고, 정부는 이를 국토 대전환의 첫 선도 모델로 공식화했다. 껍데기로서의 공장 유치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규제 혁신과 기업 기술투자가 맞물린 복합 클러스터다. 이 구조가 바로 지방에 필요한 '빅 딜'의 형태이며, 서울·수도권으로만 향하는 이촌향도의 흐름을 구부리는 열쇠다. 지식기반 일자리의 구상 기능을 각 거점에 집약해 분산하는 일, 이제 제 방향에 서긴 했다. 속도와 밀도 있는 조율이 관건이다. ◆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학, 문화인류학을 거쳐 공학 박사(과학기술정책 전공)를 받았다. 제조업, 엔지니어, 산업 생태계에 대해서 현장 연구를 수행 중이다. 저서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2019),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2024) 등이 있다.
2026.04.22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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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AI 시대
대한민국 제조 현장, 피지컬 AI의 '데이터 광산'으로 깨워야
피지컬 AI 시대의 격차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데이터의 누적 속도에서 결정된다…제조 현장에서 시작된 데이터의 흐름이 물류로, 건설로, 나아가 우리 가정의 일상을 돕는 서비스 로봇으로 이어질 때 한국의 피지컬 AI는 비로소 '세계 1위'라는 목표를 향한 실질적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정부가 피지컬 인공지능(AI)을 국가 생존 전략으로 명확히 선언했다.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는 올해 2월 확정한 '대한민국 인공지능행동계획'에서 오는 2030년 피지컬 AI 세계 1위를 국가 목표로 못 박았고, 이재명 정부의 30대 선도프로젝트에는 휴머노이드 로봇 3대 강국 진입, 완전 자율주행차 상용화, AI 팩토리 전환 등 7개의 피지컬 AI 과제가 포함됐다. 산업통상부는 2026년 예산에서 피지컬 AI 개발에만 4022억 원을, AI 팩토리 선도 프로젝트에 2200억 원을 배정했고, 과기부는 AI 과학자·휴머노이드 원천기술 개발에 2342억 원을 투입한다. 방향은 명확하고, 의지도 확인됐다. 그렇다면 이 경쟁에서 진정한 승부처는 어디인가. 피지컬 AI의 핵심 기술은 시각·언어·행동을 결합한 VLA 모델, 즉 로봇이 보고·판단하고·행동하도록 학습시키는 기술이다. 거대언어모델(LLM)이 인터넷의 텍스트로 언어를 습득했듯, VLA 모델은 수백만 건의 '행동 데이터(robot action data)'를 통해 물리 세계를 학습한다. 로봇 팔이 부품을 조립하는 궤적, 양손이 협력해 물체를 집어 올리는 순간, 불규칙한 제품을 선별하는 감각-운동 데이터가 피지컬 AI의 학습 원료다. 그리고 이 원료의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6'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1월 5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베이에서 열린 현대차그룹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차세대 전동식 아틀라스 시제품(왼쪽)과 아틀라스 개발형 모델이 무대에 공개돼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미국은 구글을 중심으로, 중국은 정부 주도의 '국가 휴머노이드 로봇 혁신센터'를 통해 이미 수억 건의 행동 데이터를 쓸어 담고 있다. 피지컬 AI 시대의 격차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데이터의 누적 속도에서 결정된다. 우리가 예산을 편성하고 협의체를 구성하는 사이, 경쟁국은 데이터 규모를 기하급수적으로 쌓아가고 있다. 한 번 벌어진 데이터 격차는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을 반도체 산업의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 이 문제를 돌파하려는 시도 중 하나가 디지털 트윈 기반의 시뮬레이션, 즉 'Sim-to-Real' 전략이다. 가상 환경에서 수천만 번의 동작을 시뮬레이션해 실제 데이터 수집의 물리적·시간적 한계를 보완하는 방식이다. 엔비디아의 아이작 심(Isaac Sim), 구글의 MJX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핵심이 있다. 시뮬레이션이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가상 세계 자체가 현실을 정확히 모델링해야 한다. 재료의 마찰력, 부품의 유연성, 공정의 불규칙성—이 모든 물리적 현실을 디지털 트윈에 담으려면 결국 실제 현장의 행동 데이터가 기초가 돼야 한다. 시뮬레이션은 데이터를 증폭하는 기술이지, 데이터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다. 이 데이터가 지금 한국에서 특별히 절박한 이유가 있다. 우리 제조 현장은 인구 절벽이라는 구조적 위기와 마주하고 있다. 숙련 기술자의 고령화와 청년 유입 감소로 생산 현장의 인력 공백은 이미 현실이 됐다. 피지컬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은 이 공백을 메울 현실적 대안이다. 다시 말해, 행동 데이터 인프라 구축은 기술 경쟁의 문제를 넘어 국민의 삶과 산업 생존을 지키는 사회적 과제다. 국내에서도 변화의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들이 산·학·연 공동 활용을 위한 행동 데이터 팩토리 구축에 착수했고, 일부 기업은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통해 실제 제조 공장에서 '데이터 플라이휠' 구조를 시도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시도들은 아직 파편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핵심 장벽은 기술이 아니라 데이터 소유권이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한 공정 노하우가 담긴 데이터를 기업이 외부와 공유하는 것은 영업비밀과 보안의 관점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해법은 두 가지 축으로 설계돼야 한다. 기술적으로는 '데이터는 현장에 머물되 학습 결과만 공유'하는 연합학습(Federated Learning)을 국가 표준으로 채택해야 하며, 제도적으로는 데이터 기여도에 따라 정부 연구개발(R&D) 사업 가점·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데이터 바우처·인센티브' 체계를 병행해야 한다. 아울러 로봇의 관절 각도, 토크(힘), 촉각 센서 데이터 등 '로봇의 오감'을 디지털화하는 공통 표준 규격을 확립해야 한다. 이 공통 언어 없이는 제조 현장의 데이터도, 가정용 서비스 로봇의 생활 데이터도, 의료 보조 로봇의 정밀 동작 데이터도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사장된다. 과거 경부고속도로가 산업화 시대의 혈맥이었듯, 행동 데이터 플랫폼은 AI 전환 시대의 새로운 국가 혈맥이 될 것이다. 제조 현장에서 시작된 데이터의 흐름이 물류로, 건설로, 나아가 우리 가정의 일상을 돕는 서비스 로봇으로 이어질 때 한국의 피지컬 AI는 비로소 '세계 1위'라는 목표를 향한 실질적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서울대학교 전기·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KIST AI·로봇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인공지능·로봇 분야 연구를 수행하며 국가 과학기술 전략 수립과 대형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어 왔다. 인공지능 기반 영상인식, 선별 및 전역 관제 등 다양한 AI 분야에서 다수의 원천기술을 개발해 산업 및 공공 영역에 확산시켰다.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석탑산업훈장을 수훈했고, 공학한림원 젊은 공학인상과 KIST 미래재단 석학상 등을 수상했다.
2026.04.17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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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무역 인사이트
전쟁이 바꾼 것은 유가가 아니라 질서다
이번 전쟁은 국가 전략의 재설계를 요구한다. 우리 취약성의 핵심은 원유 수입 자체보다, 제조업 투입재가 외부 에너지와 공급망에 깊게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초소재와 물류까지 포함한 가치사슬 전체를 국가안보 시야로 끌어와야 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미·이란 전쟁 휴전에도 호르무즈 해협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평시의 10%에 불과하고, 에너지 시장은 충돌의 종료보다 불안의 상수화를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얽힌 선박 스케줄과 폭등한 보험료, 파열된 물류 계약이 정상화되려면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전투는 멈춰도 비용은 남는다. 이번 사태가 남긴 교훈은 세계 교역의 대전제였던 자유로운 항행과 예측 가능한 공급망이 더 이상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전쟁은 1970년대 오일쇼크나 1991년 걸프전과도 다르다. 과거가 원유 가격 급등의 충격이었다면, 지금은 원유와 LNG뿐 아니라 비료, 헬륨, 황, 석유화학 원료 등 산업 밑단의 중간재까지 흔드는 복합 공급충격이다. 여기에 미국의 해상질서 보장 축소 신호가 겹치며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이 변화는 에너지 정책도 바꾸고 있다. 화석연료의 지정학적 인질극이 상시화되면서 에너지 전환은 이제 기후정책을 넘어 안보정책으로 읽힌다. 각국 정부가 추진하는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 전기차 및 배터리 공급망 강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원유와 천연가스 의존도를 구조적으로 낮추지 못하면 국가 전체가 지정학의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이번 위기는 탄소중립의 당위보다 에너지 자립이라는 생존의 현실이 더 시급함을 보여준다. 6일 오후 제주시 한림읍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한림해상풍력발전기의 모습이다.이재명 정부는 이날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전력 체계를 전면 전환하고 산업·수송·난방 전반의 탈탄소화를 추진하는 에너지 대전환 계획을 내놨다. 2026.4.6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한국이 이번 충격에 더 민감한 이유는 산업구조에 있다. 한국은 원유를 단순히 소비하는 나라가 아니라, 나프타와 산업가스, 화학원료를 들여와 이를 반도체·배터리·석유화학·자동차 같은 주력 제조업으로 연결하는 경제다. 따라서 중동발 공급 차질은 단순한 유가 부담을 넘어 제조업의 출발점 자체를 흔들 수 있다. 특히 적시생산에 익숙한 산업 구조에서는 작은 물류 지연이나 원료 부족도 곧바로 생산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제 에너지, 통상, 산업은 따로 볼 수 없으며, 산업 밑단까지 포괄하는 경제안보의 시각이 필요하다. 이번 전쟁은 국가 전략의 재설계를 요구한다. 우리 취약성의 핵심은 원유 수입 자체보다, 제조업 투입재가 외부 에너지와 공급망에 깊게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초소재와 물류까지 포함한 가치사슬 전체를 국가안보 시야로 끌어와야 한다. 공급망 취약성을 상시 점검할 통합 컨트롤타워를 세우고, 미국과의 관계도 단순한 원유·LNG 구매를 넘어 원전·핵연료·전력망·에너지 인프라를 포괄하는 산업안보 파트너십으로 격상할 필요가 있다. 대미투자 역시 관세 회피가 아닌 공급망 안정과 산업거점 확보를 위한 전략적 투자로 설계해야 한다. 또한 한국은 단순히 충격을 버티는 나라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에서 쉽게 대체되지 않는 협력국가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방산·조선·반도체뿐 아니라 첨단공정과 운영역량 자체를 전략 자산으로 만들어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 중동 의존을 줄이기 위한 물류·에너지 선택지도 넓혀야 한다. 북극항로와 북극해 개발은 당장은 어렵지만, 중장기적으로 공급 다변화와 리스크 완화를 위한 전략 카드로 검토할 가치가 크다. 향후 미·이란 관계 정상화를 대비해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에도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일본 종합상사 모델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5대 상사는 가스전부터 터미널, 발전까지 포함한 전체 가치사슬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며 2024년 자주개발률 42.1%라는 성과를 냈다. 그 결과 일본은 에너지 안보의 보험을 비교적 두텁게 마련했다. 한국도 이제 사오는 방식에서 확보하는 방식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이번 전쟁이 보여준 것은 기존 세계질서의 장치가 더 이상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대한민국은 남의 질서에 기대는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 공급망의 규칙을 설계하고 연결하는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호르무즈의 경고를 넘어 제조업 강국의 미래를 지키는 길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연세대 경제학과와 KDI대학원(MBA)을 거쳐 건국대에서 무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한국무역협회 입사 후 30년 이상 수출입 동향분석과 글로벌 통상전략 수립을 주도해온 무역 전문가다. 현재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으로서 수출경쟁력 강화, 산업별 공급망 안보, 신통상질서 대응 등 급변하는 대외 환경 속에서 우리 기업이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26.04.16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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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를 넘어
BTS, 힙합 아이돌의 귀환
BTS의 귀환은 함께 하나의 이름 아래 돌아온 사건이고, 이것은 부지런함과 용기와 약속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일이지, 앨범의 경제적, 통계학적 결과의 문제가 아니다. 케이팝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BTS뿐 아니라 모든 돌아오는 그룹들에게 덜 성공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2020년 팬데믹과 함께 세계 투어가 정지되었던 '방탄소년단(이하 'BTS')'이 햇수로 6년 만에 7인 그룹으로 돌아왔다. 14개 트랙이 담긴 정규 앨범 아리랑의 발매부터 광화문 공연까지 이들의 귀환은 예외 없이 여러 가지 이슈를 몰고 왔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케이팝 현상의 가장 핵심적 이벤트인 아티스트와 팬들의 재회인 4월 9일 고양시 종합운동장의 월드투어 첫 번째 공연에서 찾아보려 한다. 이번 BTS 월드투어는 경기장의 한편을 활용해 설치하던 그동안의 무대를 스타디움 투어에 맞도록 바꿔서 운동장 한가운데 360도에서 관람 가능한 무대를 설치했다. 이에 걸맞게 동원되는 보조 인력의 수, 조명, 화염, 연기, 폭죽 등도 스케일이 커졌다. 일곱 명 멤버들은 쏟아지는 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최대의 팬들과 가장 가깝게 만나기 위해 운동장 한가운데서 네 방향으로 뻗어 나온 브릿지 위를 계속 달리거나, 무대 한가운데 설치된 회전판을 활용했다. 공연 말미에 육상경기 트랙을 따라 전체 공연자들이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이런 스케일의 클라이맥스로 적합했다. 이러한 무대는 군 복무를 마치고 더 이상 '소년단'이 아닌 정체성으로 진입한 멤버들이 노랫말에서도 언급했듯 과도한 에너지가 요구되는 칼군무의 스펙터클로 소진되지 않으면서도 퍼포먼스가 핵심적으로 중요한 케이팝 아이돌 그룹 무대공연의 질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BTS 월드투어 공연장인 경기 고양시 고양종합운동장 앞에서 팬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2026.4.9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러한 무대는 이번 앨범의 곡들이 적어도 과거와 같은 BTS 안무의 특성인 고에너지 칼군무 퍼포먼스가 필수적인 곡이 아니라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이번 공연에서 이들의 군무는 기하학적인 정확성을 지향하지 않고 힙합적인 흥과 기세를 중시하며, 위와 같은 무대 설치도 그동안 개인 활동들을 통해 멤버들의 개인 정체성이 강화된 이 그룹이 함께 또는 개별적으로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는 선택이다. 아이돌 문화의 뿌리를 느끼게 했던 지난 월드투어에서 볼 수 있었던 개인을 미화하는 클로즈업 소개영상이나 개인, 유닛의 곡도 사라졌고, 오직 일곱 명이 하나의 이름 아래 그동안 이룬 그룹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앞으로도 그러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공연의 후반부를 구성하는 과거 노래들의 열띤 떼창에서, 실험적으로 들리는 이번 앨범의 곡들도 이 월드투어가 끝날 즈음엔 떼창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영어 가사로 되었으며 대중적이지 않은 이번 곡들을 한국 아미들은 그동안 해외 아미들이 그래왔듯 번역을 통해 곱씹으며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그동안 한국어 가사가 해외 아미들에게 번역 과정을 통해 의미에 집중을 요구했듯, 한국 아미들에게 부과된 이러한 노력 요구는 꼭 불편하고 거리를 만드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다이너마이트", "버터", "퍼미션 투 댄스"로 BTS를 이해한 최근 팬들은 아마도 이들의 데뷔 시절부터의 음악적 메시지를 톺아보고 있을 것이다. 이 무대는 앞으로 이어질 23개국 85회 스타디움 공연에서 재연될 것이다. BTS가 군백기(군대공백기)라는 케이팝 산업의 거대한 구조적 장벽과 6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완전체로 컴백한 사건은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팝 시장의 큰 뉴스이고, 국내외에서 이에 걸맞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영어가사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앨범이 갑자기 아리랑을 '재료'로 활용한 이유, 광화문이라는 한국의 과거와 동시대 역사에서 두터운 의미가 켜켜이 쌓인 국가적 공간을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회사의 미디어 이벤트 장소로 내준 것, BTS라는 하이브 최대 자산이 복귀했는데 하이브의 주가는 떨어진 이유, 이 앨범 제작에 이름을 올린 전 세계 작곡가들의 숫자와 면면이 모두 이슈가 되었다. BTS가 돌아왔다는 것 외에는 어떤 새로운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AFP는 BTS의 귀환을 계기로 과도한 연습생 제도, 아이돌들에 대한 여러 압박과 자살 등 지난 20년 동안 수없이 반복되어 온 케이팝의 어두운 이면을 나열한 기사를 제공했고, 이 기사는 세계 여러 매체에서 그대로 공유되었다. 이와 같은 갈등은 한국이라는 지역성과 세계성 사이의 민족주의적 긴장, 여전히 그리고 오래된 케이팝 산업의 창의성과 창작자들의 예술가성 사이의 긴장이 겹친 형국이다. 넷플릭스가 공개한 아리랑 앨범 제작 비하인드 다큐멘터리가 말해주듯, 방탄 멤버들은 회사의 아리랑 프레임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RM을 제외하고는 영어가 익숙하지 못한 멤버들이 영어로 공연하는 노래들에서 얼마나 힙합 그룹의 진정성이 담길 수 있을지, 수많은 작곡가 이름의 열거가 알려주는 곡 생산과정의 모듈과 믹스방식에서 멤버들의 몫은 무엇일까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다양한 송 캠프를 통해 생산되는 현금 글로벌 팝 음악 산업에서 왜 BTS의 앨범은 예외적이어야 함을 기대하는 것일까, 서로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여러 해외 작곡가들이 한 곡에 이름을 올린 것 자체가 케이팝 산업이 지닌 힘 아닐까를 반문할 수도 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11일 오후 고양시 일산서구 고양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BTS 월드투어 '아리랑' 인 고양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2026.4.11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통해 드러나는 가사의 힘 속에서 리더 RM과 힙합라인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들의 노래와 춤사위를 통해 각 멤버들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을 팬들은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들리는 우아한 국악 믹스 음향과 공연의 중간에 강력한 에너지와 함께 등장하는 "바디 투 바디"의 마지막에 떼창으로 이어지는 아리랑 또한 향후 일 년 반에 걸친 85회 공연에서 재연되면서 매회 경기장을 달아오르게 할 것이다. 아마도 아리랑 의미의 재해석과 관련한 구성원들의 초반 걱정은 기억 저 너머로 사라지고 재회의 기쁨과 에너지만 남을 것이다. 해외 챠트에서의 성공 또한 하이브의 주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할 디테일이지, 다시 길 위에 선 이들은 세계 투어를 통해 자신들의 감각을 다시 벼르고 BTS 2.0의 정체성을 재교섭해 나갈 것이다. 이들의 귀환은, 훨씬 안전하고 편한 삶인 그룹해체나 개인 커리어가 아니라 함께 하나의 이름 아래 돌아온 사건이고, 이것은 부지런함과 용기와 약속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일이지, 앨범의 경제적, 통계학적 결과의 문제가 아니다. 케이팝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BTS뿐 아니라 모든 돌아오는 그룹들에게 덜 성공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 기록은 갱신하라고 있는 것이라 하며 우리는 갱신만 기억하지만, 인생의 대부분 경우 기록은 갱신되지 않으며 팬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이 팬덤의 밖에 있는 사람들은 팬덤 문화가 수행해 온 이 세상의 일들과 가능하게 만든 것들에 대해 관심을 쏟아야 할 뿐이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한류 연구자로 정진하면서 팬덤 온라인 참여관찰로부터 데이터 분석까지 다양한 연구방법을 거쳤으나 스스로는 여전히 세상 속 의미의 생산을 묻는 기호학자라고 이해한다. 세계화와 디지털문화시대의 한류, 드라마의 모든 것, BTS길 위에서를 출판했고 넷플릭스의 영향, 한국문화산업, 한류현상의 이론화를 위해 국제적 연구자 네트워크를 가동하며 다년간 연구 중이다.
2026.04.13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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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산업의 미래
탈희소성 사회가 된다면
풍요의 공정한 분배를 위한 도구는 이미 상당 부분 존재하거나 구상이 가능하며, 부족한 것은 실행할 정치적 의지와 권력 구조의 변화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논의하는 AI 기본사회의 청사진은 다른 나라에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며, 이를 여러 국가와 협력을 통해 구체화하는 노력은 인류 전체를 위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 요즘 테크 리더라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지능과 에너지 비용이 모두 0을 향해 수렴할 것이며, AI 발전의 결실은 순수한 선이 될 것이다.', 'AI와 로봇이 재화와 서비스의 비용을 거의 제로로 떨어뜨릴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냥 가질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존재하게 될 유일한 희소성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기로 한 희소성이거나, 독특한 예술작품 같은 것뿐일 것이다.' 유력 벤처 투자자인 마크 안드레센(Marc Andreessen)은 2023년 10월 '테크노 낙관주의자 선언문'에서 기술과 시장이 결합하면 "영원한 물질적 창조, 성장, 풍요의 엔진"인 '테크노-캐피탈 머신'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문은 기술 개발에 방해가 되는 어떤 규율이나 통제도 거부하는 소위 '효과적 가속주의자' 선언문이라고 평가하는데, 지금 미국 정부의 AI 정책을 주도하는 집단이 바로 이 '효과적 가속주의자'들이다. 탈희소성은 원래 모든 재화와 서비스에서 희소성이 제거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기본적 생존 욕구를 쉽게 충족할 수 있고,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욕구의 상당 부분까지 충족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 개념은 마르크스(Marx), 케인스(Keynes)를 거쳐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이 정치 사상의 개념으로 정착시켰다. 마르크스와 북친이 기술이 풍요를 만들어도 자본가가 기술을 소유하는 한 그 풍요는 만인에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소유 관계의 근본적 변혁을 전제했지만, AI 가속주의자들은 탈희소성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심지어 자본주의의 가속을 통해 풍요를 달성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대런 아세모글루(Daron Acemoglu)를 포함한 여러 학자가 탈희소성 사회 자체에 대해 비판적인 면을 생각하면 AI 기업가들의 주장이 실제로 현실화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풍요가 실현된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만인의 풍요로움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다. 물론 극렬한 가속주의자 안드레센은 시장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거나 해결할 수 있을 가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와 앤트로픽 CEO인 다리오 아모데이(Dario Amodei)는 공평한 분배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질문이라고 인정한다. 빌 게이츠(Bill Gates)는 모든 사람이 AI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자선사업가와 정부가 주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샘 올트먼(Sam Altman)은 AI 시스템에 대한 공동 소유 즉 소유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보편적 고소득을 주장한다. 서울 강서구 코엑스 마곡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회 산업 AI 엑스포'에서 방문객들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산업의 융합, 새로운 산업혁명을 이끌다'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빅테크와 HD현대, LG CNS 등 100여개 기업이 참가했다. 2025.9.3.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가장 현실적인 제안은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제도 설계 접근이다. 여기에는 노동이 아니라 자본에 과세하는 과세의 전환, 모든 자원이 빅테크에 집중되는 구조를 해체하거나 견제하는 강력한 반독점 정책, 돌봄이나 봉사와 같이 현재 임금을 높게 받지 못하는 많은 활동을 경제적으로 인정하고 보상하는 노동의 재정의, AI로 인한 국가적 부를 펀드에 축적해 전 국민에게 배당하는 국부 펀드 모델이 있다. 토지, 자연환경, 도시 공간 등 본질적으로 희소한 자원에 대해 민주적 거버넌스를 통한 배분 역시 검토할 수 있다. 또는 이들을 적절히 조합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사실 모든 설계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기술이 아니라 정치이다. 모든 분배 메커니즘은 현재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부터의 양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풍요의 공정한 분배를 위한 도구는 이미 상당 부분 존재하거나 구상이 가능하며, 부족한 것은 실행할 정치적 의지와 권력 구조의 변화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논의하는 AI 기본사회의 청사진은 다른 나라에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며, 이를 여러 국가와 협력을 통해 구체화하는 노력은 인류 전체를 위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1회 졸업생으로 1980년대 카이스트에서 인공지능 주제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종합기술원, 삼성전자 등에서 활동했으며 1999년 벤처포트 설립, 2003년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 전략대표와 일본 법인장을 역임했다. 카이스트와 세종대 교수를 거쳐 2011년부터 테크프론티어 대표를 맡고 있다. 데이터 경제 포럼 의원, AI챌린지 기획, AI데이터 세트 구축 총괄 기획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는 AGI의 시대, AI 전쟁 2.0 등이 있다.
2026.04.10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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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중동전쟁과 에너지 전환의 과제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 수급 대책이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신재생 에너지를 핵심으로 하는 에너지 자급률을 높이는 에너지 전환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지속 가능한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정부, 기업, 시민사회의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중동전쟁으로 전 세계의 에너지 수급에 빨간불이 커졌다. 전쟁이 끝나도 호르무즈 해협이 열리고,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불안을 해소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전쟁으로 파괴된 원유와 가스 시설의 복구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전쟁의 종전 시점, 호르무즈 해협의 안정성, 석유·가스 시설의 복구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면 당분간 고유가 상황이 지속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대한민국에 비상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에너지 전환의 핵심은 '신재생 에너지' 위기 극복을 위한 대책이 중요하다. 정부와 해당 기업은 대체 시장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한국 원유 수입의 70%, LNG의 20%가 호르무즈 해협을 경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체 시장을 찾는 데 한계가 있다. 중동을 제외한 지역의 석유와 가스 생산을 갑자기 늘리기도 어렵다.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에 대한 제재가 한시적으로 풀렸지만, 대금결제를 비롯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 줄어든 공급을 대체하기는 어렵다. 공급이 줄어든 만큼 수요를 줄여야 한다. 에너지 위기 극복을 위해 일상의 변화가 필요하다. 기후 변화의 시대에 탄소제로를 위한 생활 습관 변화는 권고사항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전쟁이 만든 에너지 위기는 그것을 의무 사항으로 만들었다. 일상에서 에너지를 절약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항공 여행을 자제해야 한다. 위기 극복은 언제나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지만, 동시에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뒷받침돼야 한다. 공공기관 승용차 부제가 오는 8일 2부제(홀짝제)로 강화되고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공영주차장에 5부제가 시행된다. 사진은 지난 2일 서울 외교부 청사 주차장 입구.(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단기적인 대책과 동시에 장기적인 에너지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에너지 수급에서 에너지 자급률을 높이는 핵심은 신재생 에너지의 비율이다. 지난 2024년을 기점으로 신재생 에너지는 발전량 기준으로 전체 에너지 수급에서 10%를 넘었고, 2025년에는 12~13% 정도로 늘었다. 그러나 OECD 국가의 평균인 35%, 중국의 40%와 비교하면 여전히 매우 낮다. 신재생 에너지의 증가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기반 시설 차원에서 첫째, 송배전망의 건설이 중요하다. 신재생 에너지 생산 지역과 소비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송배전망에 대한 투자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국제에너지 기구는 유럽연합에 신재생 에너지 생산에 1유로를 투자할 때, 전력망에 0.7유로를 투자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전력망 투자에 미흡했던 유럽의 일부 국가는 대규모 정전 사태를 겪었다. 둘째, 에너지저장장치(ESS)의 구축이 중요하다. 풍력이나 태양광은 바람이나 햇볕의 변화에 영향받기 때문에, 오래 그리고 일정한 양을 저장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송배전망의 한계와 전국적인 에너지의 효율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자립 섬이나 에너지자립 마을을 더 늘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자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에너지 저장 장치의 발전이 더욱 중요해졌다. 셋째, 공간의 효율성이다.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나 공공 기관과 대형 공장의 지붕과 같이 사각지대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민간의 참여를 높이기 위한 더욱 적극적인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 동시에 영농형 태양광 시설처럼 논밭이나 과수원, 축사 등에서 태양광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태양광 높이를 조절하면 얼마든지 농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합천댐의 연꽃 모양의 수상 태양광처럼 자연경관을 살리는 지혜도 중요하다. 동해안의 부유식 해상풍력 기술을 앞당기고, 수상 태양광을 늘릴 필요가 있다. 에너지 전환의 핵심 과제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첫째는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의 정치적 지지의 확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연합이 겪은 교훈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유럽은 전쟁 이후 탈러시아 에너지 정책을 수립했다. 에너지 수입원을 다변화하고 재생 에너지를 늘리며 에너지 소비감축과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했다. 문제는 사회적 합의다. 국민은 에너지 가격이 오르고 물가가 오르고 금리가 오르자, 장기적인 에너지 전환에 투자하는 비용 분담을 고통스러워했다. 환경오염을 완화하기 위한 프랑스의 유류세 인상에 대중들이 반대하고, 독일에서 녹색당의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가 대표적이다.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사회적·정치적 합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둘째, 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전환의 긍정적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디지털 전환은 데이터센터를 비롯해 대규모 전력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요하다. 당연히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는 녹색 전환과 긴장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디지털 전환과 에너지 전환을 동시에 추진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생산과 소비 지역을 최대한 가깝게 하고, 에너지 배분체계의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한 기술혁신에 투자해야 한다. 에너지 전환 위한 '사회적 합의' 중요 세계적인 차원에서 에너지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경제 안보에서 에너지 안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 수급 대책이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신재생 에너지를 핵심으로 하는 에너지 자급률을 높이는 에너지 전환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달라진 세계에서 에너지 안보가 모든 국가의 가장 중요한 생존전략이 됐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정부, 기업, 시민사회의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 동시에 에너지 전환은 장기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초당적 협력이 필요하다. 스페인의 '정의로운 전환' 전략처럼, 폐광이나 폐쇄된 화력 발전소 지역에 재정지원과 직업 재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송배전망의 경로 선택의 투명성과 해당 주민을 보상하는 방안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합의와 공감이 뒷받침돼야 멀리 갈 수 있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 / 전 통일부 장관 성균관대에서 북한의 정치경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노무현 정부 때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 문재인 정부때 통일연구원 원장,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현재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이며,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협상의 전략(2016), 70년의 대화: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등이 있다.
2026.04.08
김연철 인제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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