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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한국, 세계로 뻗는 '힘의 투사' 준비할 때
넓은 의미의 힘의 투사는 한 국가가 여러 영역에서 영향력을 다른 지역, 타 국가에 확산하고 행사함을 의미한다. 군사국방에 앞서 한국은 경제산업, 대중문화, 과학기술 영역에서 힘의 투사를 확대해 왔다…이러한 다양한 통합적인 힘의 투사가 피크코리아 현상을 극복하는 한국의 지속적 성장, 발전에 필수적이다.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은 글로벌 핵심 국가로서 통합 국가역량이 글로벌 탑(TOP)10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국가의 위상은 자연스럽게 한국이 핵심 영역에서 세계 여러 지역에 힘의 투사(power projection)를 하게끔 한다. 한국민은 이 힘의 투사라는 용어에 익숙하지 않지만 향후 이 개념과 실제 적용에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한국은 경제산업, 과학기술, 대중문화, 정치, 그리고 군사 영역에서 어느 정도까지 힘의 투사를 실행하고 확장할 것인가. 힘의 투사는 글로벌 국가 간 관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한 국가가 자국의 물리적 영향력을 다른 지역까지 효과적으로 배치,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군사력을 활용해 해상교통로 보호, 평화유지 활동, 인도적 지원을 하거나 무력 개입, 해상 봉쇄, 군사적 개입까지도 활용, 자국과 그 지역 우호국의 국가 이익을 보호하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익숙한 사례로 글로벌 초강대국 미국의 전 세계 곳곳에서 실행하는 군사력 중심 힘의 투사가 있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소위 강대국이라고 분류되는 국가들은 미국 정도는 아니더라도 각자의 국력에 부합하는 힘의 투사를 실행한다. 글로벌 탑10 국가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도 저강도의 군사력을 비롯한 영향력 기반 힘의 투사를 시행한다. 한국의 6월 수출이 사상 최초로 10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사진은 지난 7월 1일 경기도 평택항에 컨테이너가 쌓여있는 모습.(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현재 국가 전략으로 '강대국의 최소(least of great powers)'를 추구하는 한국은 국방군사력의 범위 또한 한반도를 넘어 다른 지역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다. 공격적인 의미의 힘의 투사를 주된 목적으로 삼지 않겠지만 해상교통로 보호, 핵심 인프라 보호, 해외 거주 국민 보호, 지역 위기 안정화 등과 관련된 여러 국가이익을 보호하는 상황이 증가하는 현실에 대응해야 한다. 한국의 국력이 위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글로벌 사회에서의 권리도 책임도 늘어난다. 게다가 2020년대 중 후반 안타깝게도 세계는 안정적인 탈냉전의 평화 시기를 지나 신냉전의 전쟁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힘의 투사는 군사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념이지만 그 개념을 직접적 군사력 투사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물론 20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한국은 서태평양, 중동, 유럽의 파트너들과 군사 협력을 확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반드시 군대를 파병해야 힘의 투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별도로 동맹국과 우호국에 강력한 무기체계들을 수출, 협력하는 행위도 매우 강력한 힘의 투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이러한 힘의 투사를 유럽, 중동, 동남아, 오세아니아, 남미, 북미로 실행하고 있다. 이 국가들은 한국의 방위산업 역량을 자국의 영토와 주권을 지키는 데 십분 활용하면서 한국 힘의 투사를 반기고 있다. 또한 힘의 투사는 군사국방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좁은 의미의 힘의 투사가 아닌 넓은 의미의 힘의 투사는 한 국가가 여러 영역에서 영향력을 다른 지역, 타 국가에 확산하고 행사함을 의미한다. 아울러 글로벌 코리아의 위상에서 군사국방 역량은 정말 중요한 요소지만 당연히 전부가 아니다. 군사국방에 앞서 한국은 경제산업, 대중문화, 과학기술 영역에서 힘의 투사를 확대해 왔다. 짧은 지면에서 전부 다룰 수 없지만 이러한 다양한 통합적인 힘의 투사가 피크코리아 현상을 극복하는 한국의 지속적 성장, 발전에 필수적이다. 전 세계 주요국들에 한국은 쓸모(utility)가 많은 나라다. 게다가 한국은 세계 어떤 국가에도 위협적 국가로 인식되지 않는다. 힘의 투사를 하는 한국이 투사되는 지역과 국가와 시너지 효과를 내는 전략은 무엇인가? 적어도 미국, 러시아, 중국 같은 초강대국의 그것과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 할 것이다. 글로벌 탑10 한국으로서 피할 수 없는 각 영역에서 힘의 투사 경로를 하나씩 짚어 보는 것이 필요한 시공간이다.
2026.10.28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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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이름의 통제, 생명 지키는 신호 '레드플래그 10'
예방수칙의 목적은 피해자에게 위험한 사람을 알아볼 책임을 떠넘기는 데 있지 않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폭력을 사회가 먼저 알아보고 개입하자는 데 있다. 레드플래그가 생명을 지키는 신호가 되려면, 위험을 알리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저자) "사랑해서 그런다"는 말이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답장이 늦었다고 화를 내고, 만나는 사람을 일일이 확인하며, 옷차림과 귀가 시간을 정하는 연인. 때리지 않았으니 폭력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교제폭력을 알아보는 질문은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는 거절해도 안전한가", "내 일상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레드플래그 10.(자료=성평등가족부) 최근 성평등가족부는 교제폭력·스토킹의 고위험 징후를 담은 '레드플래그 10'을 알리고 있다. 폭력 성향, 집착 성향 및 강압적 통제, 갈등 심화, 생명 위협, 범행·신고 전력, 보호조치 위반, 피해자 비난 및 책임 전가, 음주·약물, 높은 불안, 고립 상황이 그것이다. 위험을 개인 간 다툼으로 축소하지 않고, 조기에 알아차려 상담과 보호로 연결하자는 취지다. 이 10가지는 따로 떨어진 항목이 아니다. 상대방의 휴대전화를 검사하고 위치를 확인하는 집착이 친구·가족과의 만남을 제한하는 통제로 이어지면, 피해자는 도움을 청할 관계까지 잃는다. 폭언과 위협을 반복하면서 "네가 나를 화나게 했다"고 책임을 떠넘기면, 피해자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게 된다. 이별을 말한 뒤 위협이 심해지거나 접근금지 등 보호조치를 무시한다면, 관계를 유지할 때뿐 아니라 끝내려 할 때의 위험도 살펴야 한다. 필자가 '이처럼 친밀한 살인자'에서 강조한 것도 폭력의 개별 장면을 넘어 관계를 지배하는 구조를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강압적 통제'는 감시와 고립, 위협과 경제적 제한 등을 통해 상대방의 선택권을 빼앗는 행위다. 겉으로는 평범하게 생활하더라도, 상대의 반응이 무서워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일을 포기하며 행동 하나하나를 검열한다면 자유로운 관계라고 할 수 없다. 신체의 상처만으로 폭력을 판단하면 이런 지배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주목할 것은 '높은 불안'과 '고립 상황'이다. 레드플래그는 가해자가 무엇을 했는지만 묻지 않는다. 피해자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는지도 살핀다. "그 사람이 나를 죽일 것 같다"는 말을 과민반응으로 넘기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반복적 위협과 통제의 맥락을 피해자는 알고 있을 수 있다. 음주나 약물 사용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변명거리가 아니라, 위험을 키우는 경고신호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이 6일 서울 성북구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열린 '2026 인권축제'에서 교제폭력, 스토킹의 고위험 징후를 알리는 '레드플래그 10' 캠페인을 소개하고 있다. 2026.10.6 (ⓒ뉴스1, 성평등가족부 제공,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레드플래그 10은 10개 항목을 모두 채워야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진단표가 아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은 한 번이라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며, 사소해 보이는 간섭도 반복되며 자유를 제한한다면 상담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당장 헤어지라"는 말만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통제를 거부하거나 관계를 끝내려는 과정에서 위험이 커질 수 있는 만큼, 피해자의 상황에 맞는 안전계획과 보호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긴급한 위험에는 112로 신고하고, 여성긴급전화 1366에서는 24시간 상담과 지원기관 연계를 받을 수 있다. 주변 사람은 "왜 그런 사람을 만났느냐"고 묻기보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도움을 요청할 길을 함께 찾아야 한다. 수사기관과 지원기관은 신고된 사건 하나만이 아니라 반복된 통제와 위협, 피해자의 두려움을 함께 살펴야 한다. 예방수칙의 목적은 피해자에게 위험한 사람을 알아볼 책임을 떠넘기는 데 있지 않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폭력을 사회가 먼저 알아보고 개입하자는 데 있다. 레드플래그가 생명을 지키는 신호가 되려면, 위험을 알리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2026.10.27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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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통합돌봄, 이제는 지역 격차 줄일 때
'지역사회 통합돌봄 실태조사'로 확인된 지역 간 공급 격차를 해소하려면 공공이 돌봄 인프라 확충과 민관 자원 연계를 주도해야 한다. 취약지 재정 지원과 재가급여 등 공적 제도를 강화해 누구나 살던 곳에서 필요한 돌봄을 받도록 해야 한다. 전용호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지난 13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지역사회 통합돌봄 실태조사'는 돌봄 격차 해소의 출발점이 될 이정표다. 전국 229개 시군구의 돌봄 수요와 16개 핵심 서비스 공급을 같은 잣대로 처음 비교했다. 어디가 부족한지 데이터로 말할 수 있게 됐다. 방문요양 충족률은 96.9%인데 반해 단기보호는 1.5%, 긴급돌봄지원사업은 7%, 재택의료센터는 17.7%, 방문간호는 25.9%, 노인맞춤돌봄은 38.5%에 불과하다. 인구감소지역 방문진료는 10.7%로 그 외 지역(25.5%)의 절반 미만이다. 돌봄 수요 대비 공급자의 지역 간 격차는 심각하다. 시군구는 저수요·저공급 119곳, 고수요·저공급 59곳, 고수요·고공급 38곳, 저수요·고공급 13곳이다. 특히 노인 등 대상자는 많은데 공급자는 적은 '고수요·저공급' 지역(59곳)에는 부산 영도구·기장군 등 대도시와 충남·전북·전남·경북·경남의 시군이 폭넓게 포함됐다. 그중 40곳(67.8%)이 인구감소지역으로, 돌봄 인프라 확충이 가장 시급하다. 이는 노인장기요양보험처럼 돌봄 공급을 시장에 맡겨 온 방식의 한계다. 수익이 나는 곳에 기관이 몰리고 농어촌은 비어 간다. 사는 곳에 따라 돌봄이 달라지는 '시장 실패'다. 이번 조사의 의의는 주체의 전환에 있다. 국가와 지자체가 현황을 파악해 지역계획에 반영하겠다고 나섰다. 경로의존성을 벗어나 공공이 중심이 되어 인프라를 확보하는 첫 단추다. 이 노력은 인프라 확충으로 돌봄서비스의 접근과 이용의 형평성을 높이고, 노인·장애인의 정주여건 개선으로 현실화 되어야 한다. 돌봄의 이용 여부는 대상자의 삶의 질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돌봄이 없어 요양원·요양병원에 조기에 입소하는 현실을 시급히 막아야 한다. 지역사회 통합돌봄이 본격 시행된 27일 서울 시흥5동 주민센터에서 한 어른신이 통합돌봄 신청을 하고 있다. 2026.3.27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제 돌봄 모델을 구체화할 때다. '허브앤스포크' 모델을 제안한다. 권역마다 공공이 주도해 거점기관(허브)을 세우고, 거점이 주변 민간 기관과 마을 자원(스포크)을 잇는 구조다. 거점이 인력·정보·전문성을 나누면 작은 지역도 서비스 연속성을 지킬 수 있다. 거점 중심 역할은 사회서비스원 같은 공공 공급자가 맡아야 한다. 공급자가 부재한 시장 실패의 사각지대는 직접 메워야 한다. 지역의 자원인 사회적경제, 자활기관, 일자리사업, 마을의 공식·비공식 단체까지 인력을 최대한 모으는 조정자 역할도 공공의 몫이다. 앞으로 공공 역할 강화에는 예산과 사람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특히 내년에 실시하는 '취약지 돌봄센터' 확충과 같은 사업에는 국가의 적극적 재정 확대가 필요하다. 아울러 노인장기요양보험,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방문건강관리와 지역사회중심재활서비스 같은 보건소 사업 등 공적 제도의 고도화가 병행돼야 한다. 재가급여를 현실화하고 접근성을 높여야 통합돌봄이 실제 이용으로 이어진다. 통합돌봄은 살던 곳에서 존엄하게 살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이제 그 약속에 새 길을 놓을 차례다.
2026.10.22
전용호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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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도시에서 대학의 역할
학령인구 감소와 대학 생활의 변화로 지역 대학과 주변 상권이 함께 위축되고 있다. 대학별 학생 수에만 매달리기보다 공동교육과정과 전철·셔틀, 도시의 공공시설·기업을 연결해 학생들의 이동과 교류를 늘려야 한다. 지역 대학의 자율성과 특색을 살려 도시 간 배움과 만남의 기회를 넓힐 때 지역의 활력도 되살릴 수 있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내가 경남대학교에 임용된 2017년, 학교 앞 먹자골목인 '댓거리'에는 높은 건물마다 상가가 빼곡했다. 학생들은 수업 끝났다고 집에 가지 않고 동아리와 학생회 등의 명분으로 근처에서 선후배·동기들과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였다. 수십 년간 제조업 고용이 줄어온 마산에서 대학은 청년들이 모여 지역을 젊게 유지하는 거점이었다. 십수 년 전보다 학생 수가 많이 줄었지만, 올해 기준 경남대 학부 재학생은 8,000여 명이다. 교직원은 1,000명이 넘고 대학원생까지 더하면 구성원이 1만 명을 넘는다. 이들이 학교에 오가며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방을 구한다. 대학이 강의실의 배움을 통해서만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 감소를 실감하는 곳도 학교 앞 상권이다. 한때 스크린 야구장과 만화카페가 있던 건물의 고층에는 불 꺼진 곳이 많다. 임대 표시조차 붙어 있지 않다. 언젠가 '뷰'가 좋다고 생맥주를 마시던 가게도 문을 닫았다. 남녀노소 좋아하던 상권 중심의 버거 매장도 철수했다. 공실의 원인을 학생 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학과 주변 상권이 함께 위축되는 모습은 매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학령인구 감소에 더해 코로나19 이후 대학에 머무는 방식도 달라졌다. 선배들을 통해 전수되던 학과와 동아리의 문화가 끊겼다. 학생들 가운데는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고, 수업 사이에 시간이 떠도 집으로 가는 이들이 많다. 잦은 회합과 회식이 낯선 학생들도 적지 않다. 예전 대학생활로 돌아가라고 요구할 수 없고, 될 일도 아니다. 다만 모일 계기가 줄어들면 학교 근처에 머물 이유도 줄어들고, 상권의 위축은 학생들이 만날 장소를 줄인다. 학생들의 행위 양식을 강제로 바꿀 수는 없다. 인구 감소에 따른 정원 조정도 필요하다. 오히려 대학마다 줄어드는 학생 수를 따로 걱정하는 데서 벗어나, 지역 대학들의 수업과 활동을 연결해야 한다. 경남대, 국립창원대, 경상국립대 등 6개 대학이 참여하는 'USG공유대학2.0' 같은 사업은 공동교육과정과 현장실습 등을 운영한다. 온라인 강의 중심의 이런 시도를 캠퍼스와 도시 사이의 일상적인 왕래로 넓혀야 한다. 다른 대학에서만 배울 수 있는 수업을 지정된 요일에 직접 가서 듣게 하는 것이다. 도시 사이는 전철로 연결하고, 역에 내리면 곧바로 캠퍼스행 셔틀버스를 탈 수 있어야 한다. 자가용 중심의 이동에서 벗어나 전철과 셔틀버스로 이동 수단을 바꾸는 '모달 시프트'가 필요하다. 노선만 그어 놓아서는 부족하다. 전철과 셔틀의 배차를 맞추고 저녁에 돌아올 차편까지 보장해야 한다. 이동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배움의 기회를 가로막아서는 곤란하다. 도심의 도서관과 공연장, 광역의 청년 허브, 기업의 작업장도 수업과 프로젝트 활동의 장소로 삼으면 대학과 도시의 접점이 늘어난다. 1일 부산 남구 국립부경대 대연캠퍼스에서 열린 학부대학장배 자유전공학부 전체 체육대회에서 참가 학생들이 '큰 공 릴레이' 경기를 하고 있다. 2026.4.1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학생들이 이동한 곳에서 함께 공부하고 식사하고, 지역 기업과 사람들을 만나며 머물 수 있어야 한다. 왕래가 잦아지고 흐름이 커지면 학생들의 생활 반경이 넓어지고 모이는 곳도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달라질 수 있다. 수업과 프로젝트, 문화활동을 따라 지역의 '핫플레이스'도 옮겨가고 상권도 갱신될 수 있다. 서울과는 다른 지역 대학과 지역의 경쟁력은 운동장을 넓게 쓰는 데서 올 수 있다. 도시경제학자 윌리엄 알론소는 작은 도시가 이웃 도시와 연결돼 더 큰 도시의 이점을 누리는 현상을 '차용 규모(borrowed size)'라고 불렀다. 각 대학도 연결을 통해 각자의 규모를 넘어서는 교육과 만남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재학생 수라는 저량에서 이동과 교류라는 유량으로 시야를 넓히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사립대학을 포함한 지역 대학들이 고유한 교육과정을 발전시킬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대학의 특색이 뚜렷해져야 학생들이 다른 대학과 도시를 찾아갈 이유도 생긴다.
2026.10.21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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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통합의 시대…부담은 낮추고 이동 편의는 높이고
통합 고속철도가 수도권과 지역,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큰길이라면, 기능별로 재편된 자회사들은 이동하는 길의 포장재이다. 고속철도 통합과 자회사 통합이 철도산업의 혁신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경택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9월, KTX와 SRT로 나뉘어 있던 고속철도가 10년 만에 하나가 되고 코레일의 5개 자회사가 3개의 전문 자회사 체제로 새롭게 출발했다. 철도 통합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KTX와 SRT가 따로 달린 10년은 서비스 경쟁이라는 성과도 남겼지만, 한정적인 열차의 효율적인 활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통합으로 이러한 칸막이가 걷히게 되면서 KTX와 SRT 차량들이 하나의 열차로 편성될 수 있게 되었다. 수서역 출발·도착 좌석이 1년 전보다 31% 늘었고, KTX의 운임 또한 SRT 수준으로 평균 10% 인하되었다. 9월에는 추석 연휴가 포함되었다고 하나, 좌석공급 확대와 운임인하로 인해 일평균 고속철도 이용객도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약 12% 증가하였다. KTX와 SRT 통합이 운영 통합이라면, 자회사 통합은 현장 서비스의 통합이다. 그동안 매표, 열차 승무, 편의점, 청소, 유지보수 등의 서비스들은 5개 자회사가 나누어 맡았다. 철도라는 하나의 수단을 이용해도 서비스는 단절되어 있던 것이다. 열차에서 물건을 두고 내리면 코레일네트웍스의 고객센터에 신고하고, 코레일관광개발의 승무원이 물건을 찾아 역에 맡기면 가서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단절된 서비스를 연결하고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고객서비스(코레일관광개발+코레일네트웍스), 유통·물류(코레일유통+코레일로지스), 유지관리(코레일테크)의 3개 자회사로 재편되었다. 코레일과 SR의 고속철도 통합 운행이 시작된 1일 서울역 전광판에 KTX와 SRT 통합 운행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오고 있다. 2026.9.1.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정부에서는 자회사 통합으로 달라지는 '국민체감서비스 10가지'를 발표하였다. 앞으로 장애인, 노약자 등이 한 번만 문의해도 역 안 이동부터 열차 승하차까지 원스톱으로 도움받을 수 있도록 한다. 역사 내 편의점은 가격을 낮추고, 이용률이 낮은 열차 내 자판기는 수하물 공간으로 변경할 예정이다. 역사 내 AI 청소장비 도입, 일반열차의 화장실 특별 청소 등을 통해 철도 이용의 쾌적성을 제고한다. 철도역으로 오는 과정과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도 자회사의 역할이 확대된다. 철도역 주차요금 할인, 공유 차량, 수요응답형 교통을 연계하여 역과 관광지를 잇는다. 역사 내 지역 상품 판매를 늘리고, 지역·중소기업의 해외수출을 지원함으로써 지역상생을 도모할 것이다. 철도서비스 개선만이 아니라 코레일과 자회사 간, 자회사와 자회사 간 유사·중복 업무에 대한 기능조정을 통해 자회사의 전문성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용은 유지하되, 회사마다 다른 근무 여건의 격차도 좁혀야 한다. 국민체감서비스 10가지에 대한 이행도 꾸준히 점검해야 한다. 최근 정부는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 중앙행정기관 이전 등을 발표하였다. 이전이 시작되면 지역 간 출장통행이 늘고, 주말 가족 왕래도 증가할 것이다. 철도 통합은 이러한 2차 이전에 따른 이동을 지원함으로써 사람과 일이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통합 고속철도가 수도권과 지역,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큰길이라면, 기능별로 재편된 자회사들은 이동하는 길의 포장재이다. 고속철도 통합과 자회사 통합이 철도산업의 혁신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6.10.16
김경택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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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 전수조사, 불안 넘어 농지제도 개선 출발점으로
전수조사로 얻은 정보를 처분의 근거가 아니라 이 세대교체를 설계하는 자료로 쓸 때, 전수조사가 일회성 조사가 아니라 상시적인 국가 농지관리체계의 출발점이 된다. 채광석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농업경제학 박사) 1996년 농지법이 시행된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 농지의 소유와 이용 실태를 확인하는 농지 전수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토지대장·농지대장·농업경영체 정보가 따로 관리되고 장부와 현장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누가 어떤 조건으로 실제 농사를 짓고 있는지 국가가 정확히 알지 못했던 셈이다. 이번 전수조사의 목적은 위반자를 찾아 처벌하는 데 있지 않고, 농지가 필요한 농업인에게 제대로 연결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데 있다. 지난 7월 발표된 기본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 농지의 약 27%에 해당하는 284만 필지가 심층조사 대상으로 분류됐다. 사유별(중복 포함)로는 불법 임대차 의심이 21.1%, 무단 휴경 의심이 11.6%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임대와 휴경은 투기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고령화와 상속 증가로 소유와 경작이 분리된 농촌에서는 관행처럼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현장의 불안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평생 농사를 짓다 몸이 아파 이웃에게 논을 맡긴 고령 농업인은 "투기꾼으로 몰린다"고 하소연하고, 형제들과 상속받은 농지를 이웃에게 경작하게 한 상속인은 "물려받은 농지를 팔아야 하느냐"고 묻는다. 여기에 "농사를 안 지으면 무조건 처분명령이 나온다"는 식의 소문이 농촌 전반으로 번지자, 정부와 여당은 지난 9월 21일 보완책을 내놓고 원칙을 분명히 했다. 토지거래허가구역에서 거짓 영농계획으로 농지를 취득한 뒤 휴경하거나, 농업법인을 내세워 부동산업을 하거나, 경매로 지분만 취득한 뒤 불법 임대하는 투기 유형과 농업진흥지역 내 중대한 불법전용은 엄정하게 조치하되, 고령·상속·영농관행에서 비롯된 일반적인 사안은 일률적으로 처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어 10월 8일 정부는 상속 농지, 고령농·관행 임대차 농지, 종중·미등기 상속 등 소유관계가 복잡한 농지, 맹지 등 영농이 어려운 농지, 농업용 창고 등 미허가 시설을 포함하여 투기가 아닌 사항은 농지은행 위탁 여부와 관계없이 처분 절차를 진행하지 않으며 이를 농지법에 우선하는 특별조치법으로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경기도 파주시 일대 농지. 2026.10.11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특별조치법의 성격이다. 처분하지 않겠다는 것은 '벌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적법하다'는 뜻이 아니다. 위반 상태가 그대로 남는 한 실경작자는 농업경영체 등록이나 직불금 신청 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없고, 다음 조사에서 같은 농지가 다시 위반으로 잡힌다. 따라서 이 법의 요체는 과거 무허가축사 적법화가 그랬듯 처분 제외가 아니라 적법 전환이어야 한다. 관행적 임대차는 신청만 하면 서면계약과 농지대장 등재로 적법한 관계로 바꾸고, 종중·미등기 상속 농지처럼 계약 주체가 분명치 않은 농지는 대표자 계약이나 대리경작자 지정으로 계약 자체가 가능하게 길을 열어야 한다. 전수조사로 확인된 현실을 제도에 반영하는 과제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임차농 보호다. 최소 임대차 기간을 현행 3년에서 5년으로 늘리고 갱신 보호장치를 두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농지은행이다. 고령농의 은퇴와 상속으로 유동화될 농지를 농지은행이 선제적으로 확보해 청년농·전업농·공동영농법인에 연속된 농지로 공급하려면, 매입과 농지연금 예산을 확충하고 임대차계약과 경영체 변경을 한 번에 처리하는 원스톱 서비스가 필요하다. 셋째는 농지법 개정이다. 농촌에서 실제 이뤄지는 이용형태를 제도권으로 흡수하고, 맹지·급경사지처럼 영농이 어려운 농지는 규제를 완화하여 '사후 제재 중심'에서 '이용·관리 중심'으로 농지관리의 축을 옮겨야 한다. 특별조치법이 과거를 정리하는 법이라면, 농지법 개정은 같은 문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앞으로의 농지 이용 체계를 만드는 일이다. 돌아보면 1949년 농지개혁이 땅을 농사짓는 사람에게 나누어 준 일이었고, 농지법 30년이 '누가 가질 수 있는가'를 지켜 온 시간이었다면, 이번 전수조사는 그 물음을 '앞으로 누가 농사를 지을 것인가'로 옮겨 놓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농가 인구의 절반 이상이 65세를 넘긴 지금, 앞으로 10년은 농지개혁 이후 가장 많은 농지의 주인이 바뀌는 시기가 될 것이다. 전수조사로 얻은 정보를 처분의 근거가 아니라 이 세대교체를 설계하는 자료로 쓸 때, 전수조사가 일회성 조사가 아니라 상시적인 국가 농지관리체계의 출발점이 된다.
2026.10.15
채광석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농업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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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AI 시대 '국방혁신'…신뢰할 수 있는 방패 조건
위험한 임무는 로봇에게 맡기되 통제와 책임은 인간이 갖는 것, 그 원칙을 기술과 작전교리, 제도에 함께 심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진정한 '신뢰의 방패'다.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지난 9월 3일 국회에 제출된 2027년 국방예산 정부안은 우리 군의 전력구조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국방예산은 전년 대비 8.2% 증가한 73조 2777억 원으로 사상 처음 70조 원을 넘어섰다. 그중 인공지능(AI)·유무인 복합체계 예산이 올해 4968억 원에서 내년 7727억 원으로 55.5% 급증했고, 위험물 취급·주둔지 경계 등에 AI 로봇을 적용하는 430억 원 규모의 '피지컬 AI 실증사업'도 처음 편성됐다. 방향은 분명하다. 병역자원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로봇을 활용해 제한된 인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무엇보다 장병의 위험 노출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폭발물 제거 로봇, 수중자율기뢰탐색체, 다족보행로봇은 모두 사람이 감당해 온 가장 위험한 임무를 대신함으로써 장병을 보호하는 새로운 방패가 될 수 있다. 최근의 사고는 이 변화가 왜 필요한지를 다시 일깨운다. 지난 9월 21일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수색로를 개척하던 중 지뢰로 추정되는 폭발이 발생해 장병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원인은 조사 중이지만, 고위험 지역에 사람이 접근하기 전에 로봇·드론·원격센서를 먼저 활용할 방안을 분명히 요구하는 사고다. 5사단 열쇠부대 군 장병들이 경기 연천군 접경지역에서 시범 운용 중인 다족 보행 로봇과 함께 철책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2025.12.29.(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앞으로 국방 피지컬 AI의 핵심 원칙은 '로봇 우선(Robot First)'이 돼야 한다. 지뢰 탐지, 화생방 정찰, 붕괴 지역 수색처럼 위험도 높은 임무에서는 사람보다 무인체계가 먼저 진입하도록 작전개념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전장의 AI 로봇은 산업현장의 로봇과 무게가 다르다. 공장의 로봇이 멈추면 생산이 지연되지만, 전장의 로봇이 잘못 판단하면 생명과 작전의 성패가 걸린다. 성능만큼이나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첫째는 적대적 교란에 대한 복원력이다. GPS 재밍, 통신 두절, 센서 기만, AI를 겨냥한 사이버 공격은 물리 세계에서 곧바로 사고로 이어진다. 통신이 끊기고 센서가 고장 나도 안전하게 임무를 멈추는 '고장 안전(fail-safe)' 설계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인간의 통제와 책임이다. 무력이 쓰이는 자율체계에서는 단순히 AI가 처리한 결과를 사람이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휴먼 인 더 루프(human-in-the-loop)'를 넘어 '의미 있는 인간 통제'가 핵심이다. 인간이 목표와 작전 범위를 제한하고 필요하면 즉시 중단할 수 있어야 하며, 사고 시 지휘관·운용자·개발자의 책임 범위도 함께 규정돼야 한다. 지난 8월 유엔과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자율무기 규범 마련을 거듭 촉구한 만큼 우리도 원칙 정립을 서둘러야 한다. 셋째는 시험·평가와 지속적 검증이다. 실험실에서 완벽했던 AI도 비·먼지·연막·교란이 있는 전장에서는 다르게 행동한다. 배치 전 시험평가뿐 아니라, 모델·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이후의 재검증과 인증까지 제도화해야 한다. 한국은 이를 추진할 기반이 충분하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기준 2021~2025년 세계 9위 무기 수출국이며, 제조업 근로자 1만 명당 산업용 로봇 1220대로 로봇 활용도가 세계 최고다. 이 자산을 살려 민간 기술을 군 작전환경에서 신속히 실증·전력화하는 '국방 피지컬 AI 생태계'를 갖추되, 안전성 인증과 인간 통제 원칙을 처음부터 그 안에 심어야 한다. 피지컬 AI 시대의 국방력은 로봇의 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위험한 임무는 로봇에게 맡기되 통제와 책임은 인간이 갖는 것, 그 원칙을 기술과 작전교리, 제도에 함께 심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진정한 '신뢰의 방패'다.
2026.10.14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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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규모'에서 지역의 '활력'으로…정책 전환을 기대하며
이번 인구감소지역 재지정은 인구 숫자를 넘어 지역의 활력을 보고, 회복한 지역의 다음 걸음까지 챙기겠다는 제도의 진화다. 이제 과제는 지정 이후다. 박진경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지역균형발전실장 정부가 5년 만에 인구감소지역 92곳과 인구감소관심지역 18곳을 재지정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측정의 관점이다. 2021년에는 인구·재정의 8개 지표로 '인구감소지수'를 산정했었지만 이번에는 기존 지표에 시가화율, 근무지 기준 취업자수, 생활인구를 더해 9개 지표의 '인구활력지수'로 재편했다. 등록인구의 많고 적음만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얼마나 일하고, 머물고, 오가는지를 함께 보겠다는 것이다.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을 근거로 도입한 생활인구 개념이 지정기준에까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정주인구 쟁탈의 제로섬 경쟁을 넘어서려는 정책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이 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부산 금정구와 경기 동두천시, 경남 통영시 등 3곳을 인구감소지역으로 새로 편입한다는 내용의 인구감소지역 재지정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6.10.7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두 번째 변화는 '인구활력⁺지역'의 신설이다. 지표가 개선되어 지정에서 막 벗어나려는 지역도 향후 5년간 기존 지원을 이어받는다.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점에 지표 개선만을 이유로 지원을 끊으면 회복세가 꺾일 수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했다. 지정이 '낙인'이 아니라 '졸업'의 경로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 의미 있는 설계다. 여기에 연 1조 원 규모의 지방소멸대응기금과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에 담긴 44개 특례가 지원 수단으로 함께 작동한다. 제도의 틀은 한 단계 나아갔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재지정 이후 5년을 채울 정책의 내용이다. 인구감소는 단기간에 되돌릴 수 있는 흐름이 아니다. 인구를 늘리는 것만을 목표로 삼으면 지역은 서로의 인구를 빼앗는 경쟁에 내몰리고, 예산은 출산장려금과 전입지원금, 눈에 보이는 시설로 흩어진다. 우선, 인구를 붙잡는 경쟁이 아니라 삶을 지키는 지역 맞춤 설계가 필요하다. 농산어촌의 과소화, 대도시 원도심의 공동화, 산업도시의 고용 위축 등 인구감소 악순환의 구조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동일한 사업을 지역별로 나누어 지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의 문제 구조에 맞춘 정책으로 정교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9개 지표의 지역별 산출 결과와 지표별 기여도를 분석해 각 지역이 어느 지표에서 취약한지 스스로 읽고 기본계획과 기금 투자계획에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청년과 여성이 떠나는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좋은 일자리만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 돌봄, 문화, 지역사회의 개방성까지 '남고 싶은 지역'의 조건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지방 세컨드홈 과세 특례, 청년 생애최초 주택 취득세 감면 등 세제특례도 지역 유형에 따라 체감도가 다르다. 특례의 활용 실적을 점검해 실제로 작동하는 특례를 중심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인구활력⁺지역의 '5년 이후'도 지금부터 설계해야 한다. 지역은 스스로 회복 로드맵을 세우고, 정부는 인구활력지수를 매년 점검해 다시 인구감소지역으로 회귀하지 않도록 단계별 관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졸업 이후가 든든해야 지역도 졸업을 목표로 뛸 수 있다. 둘째, 연간 1조 원 규모의 지방소멸대응기금은 '시설을 만드는 재원'에서 '지역의 활동과 소득을 만드는 재원'으로 바꿔야 한다. 정부도 앞으로 기금을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사업에 배분하고, 하드웨어 중심에서 시설·콘텐츠·사람을 동시에 잇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제는 건물의 개수보다 그 공간에서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하고, 배우고, 소비하고, 교류하는지를 중심으로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 지역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시설이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는 프로그램과 운영주체다. 완공 이후의 운영비와 인력까지 내다본 사업만이 지역에 짐이 아닌 자산으로 남는다. 더 근본적으로는 기금이 지역에 지속적인 소득을 만드는 데 쓰여야 한다. 강한 지역경제는 외부 기업 유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역이 가진 자원을 지역의 부가가치로 바꾸고, 그 수익이 지역 안에서 순환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지역이 스스로 만든 소득이 동네 상점과 돌봄, 생활서비스로 흘러갈 때 지역은 단순한 생산공간이 아니라 일과 소득, 돌봄이 함께 순환하는 삶의 공간이 된다. 기금은 소모성 지출이 아니라 지역의 공유자산을 키우는 투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 혼자 버티는 지역에서 함께 사는 생활권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 모든 시·군이 병원과 학교, 문화시설, 교통을 홀로 갖추기는 어렵다. 각자 모든 것을 갖추려 하면 투자는 분산되고, 인근 지역끼리 인구를 다투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제는 행정구역의 경계를 넘어 생활권 단위로 함께 사는 방식을 설계해야 한다. 의료·교통·돌봄 같은 필수 생활서비스는 중심도시와 주변 지역이 기능을 나누어 공동으로 이용하는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출향민과 방문객, 두 지역 살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지역과 관계를 맺는 생활인구는 인접 지역이 다 같이 늘려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관계인구가 일시적 방문자에 머물지 않고 지역의 실질적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고향사랑기부제와 생활인구 정책을 연결하는 장치도 고민할 때다. 5극3특 초광역 성장전략 역시 거점도시 중심으로만 작동하지 않도록, 인구감소지역을 완결형의 초광역 생활권과 산업 가치사슬 안에 명시적으로 편입시켜야 한다. 2027년부터 시작될 제2차 인구감소지역대응 기본계획은 지역 간 연계협력사업을 중심에 두고, 이러한 사업에 기금 배분의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인구감소지역 정책의 목표는 지정 지역의 숫자를 줄이는 데 있지 않다. 어디에 살든 일하고, 머물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있다. 지역에서 번 돈이 지역에서 돌고, 그 소득이 돌봄과 일상으로 이어질 때 인구감소지역은 비로소 누구나 머물고 싶은 지역이 될 수 있다. 이번 재지정이 인구의 '규모'에서 지역의 '활력'으로 정책의 눈금을 옮기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6.10.09
박진경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지역균형발전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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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무역 인사이트
대미투자의 성패, 실행에 달렸다
10월 1일 한미 양국은 투자사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텍사스 가스복합발전소가 AI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첫 사업으로 확정됐다. 미국에 대형 원전 8기를 짓는 협력의 틀에도 합의했다. 다만 개별 원전사업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알래스카 LNG는 검토를 시작하는 단계다. 정부는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사업에만 투자하겠다는 원칙을 밝혔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한국의 대미투자는 지난해 미국의 관세 압박 속에서 시작됐다. 자동차 같은 주력 상품의 미국 시장 접근을 지키고 수출과 고용 충격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다. 일본과 유럽이 먼저 협상의 큰 틀에 합의한 상황에서 우리 기업만 높은 관세를 떠안을 수는 없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얼마를 약속했느냐가 아니라, 투자금을 어떻게 돌려받고 우리 산업의 실익으로 연결하느냐다. 10월 1일 한미 양국은 투자사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텍사스 가스복합발전소가 AI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첫 사업으로 확정됐다. 미국에 대형 원전 8기를 짓는 협력의 틀에도 합의했다. 이는 한국형 원전이 미국에 처음 진출하는 계기이자 제3국 수주의 발판이 될 수 있다. 다만 개별 원전사업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알래스카 LNG는 검토를 시작하는 단계다. 정부는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사업에만 투자하겠다는 원칙을 밝혔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 전략적투자의 운영 및 관리를 위한 특별법'에 따른 대미투자 사전보고를 하고 있다. 2026.9.22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번 합의에서 눈여겨볼 점은 우산형 투자 구조다. 일본은 사업별로 수익을 정산하지만 한국은 여러 사업의 자금 조달과 수익 배분을 통합 관리한다. 여러 가게에서 번 돈을 모아 전체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과 같다. 한국이 전체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을 때까지는 모든 사업의 수익을 한미가 5대5로 나누고, 이후 미국 몫이 늘어난다. 사업별로 정산하면 원리금을 먼저 회수한 사업부터 투자국 몫이 줄 수 있다. 반면 우산형 구조에서는 다른 사업의 미회수분이 남아 있는 동안 수익이 좋은 사업에서도 한국이 절반의 몫을 유지한다. 잘되는 사업의 성과를 전체 투자금 회수에 활용하는 셈이다. 다만 회수 가능성을 높이는 장치일 뿐 손실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회수 방식만큼 투자 부담을 관리할 조건도 중요하다. 정부는 연간 투자금에 200억 달러의 상한을 두어 외환 수요가 한꺼번에 몰리는 위험을 줄였다. 이런 상한이 없는 일본에서는 달러 조달 부담이 문제로 떠올랐다. 사업성이 나빠지면 정부 간 협의로 사업계획과 수익 배분비율을 조정할 수 있고, 원전 건설비가 정해진 한도를 넘어도 전략투자기금은 추가로 부담하지 않도록 했다. 투자 수익에 세금이 붙어도 한국이 받기로 한 몫은 줄지 않도록 했다. 투자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중요한 사업 변경에 동의할 권리도 확보했다. 이런 조건을 운영계약에 담기로 한 것은 정부의 협상 성과로 평가할 만하다. 이제는 확보한 조건이 계약에 그대로 담기는지 확인하고 사업에서 활용해야 한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력을 누가 얼마에 얼마나 오래 구매할지 살피고, 수요나 가격이 예상보다 낮아져도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공사비가 늘거나 공사가 늦어질 때 누가 얼마나 책임질지도 정해 두어야 한다. 알래스카 LNG는 수익성과 한국 기업의 참여 조건을 충분히 확인한 뒤 판단해야 한다. 사업 진행을 살피며 여건이 달라지면 조건을 보완해야 성과가 회수로 이어진다. 국내 산업의 실익은 참여 기회를 실제 수주로 바꿀 때 나온다. 텍사스 발전소의 기자재 공급과 설계·시공, 운영·정비는 물론 한국형 원전 건설에도 우리 기업이 참여할 길이 열렸다. 미국도 터빈 같은 한국산 기자재를 다른 사업에 공급할 기회를 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부는 사업 단계마다 우리 기업의 수주 여건을 챙겨야 한다. 기업도 미국 에너지 시장에 장기적 사업 기반을 쌓고, 대기업의 수주가 중소·중견 협력업체의 참여와 국내 생산·수출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미국 역시 필수 기자재의 관세 부담을 줄이고 기술인력이 제때 투입되도록 도와야 에너지 시설을 적기에 확보할 수 있다. 대미투자의 성과는 합의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사업성을 꼼꼼히 따져 위험을 줄이고, 우리 기업이 실제로 일할 기회를 계약에 담아낸다면, 관세 압박 속에서 시작된 투자도 우리 산업의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연세대 경제학과와 KDI대학원(MBA)을 거쳐 건국대에서 무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한국무역협회 입사 후 30년 이상 수출입 동향분석과 글로벌 통상전략 수립을 주도해온 무역 전문가다. 현재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으로서 수출경쟁력 강화, 산업별 공급망 안보, 신통상질서 대응 등 급변하는 대외 환경 속에서 우리 기업이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26.10.07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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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10개 만들기'…세 곳은 출발점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세 곳 선정은 한정된 재원으로 선례를 만드는 집중 투자로, 종착점이 아닌 출발점이어야 한다. 성과는 단기 정량 지표가 아닌 지속가능한 연구생태계의 구축 과정으로 평가해야 한다. 정부는 인내를, 대학은 본질적 성과에 대한 집중을 보여야 한다. 홍창남 부산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부산대, 전남대, 충남대가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첫 지원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세 대학에는 올해 대학당 약 700억 원이 투입되고, 2030년까지 다른 거점국립대보다 대학당 4000억 원 안팎을 더 지원받는다. 선정되지 못한 대학의 지역에서는 열 곳을 약속하고 왜 세 곳이냐는 비판이 거세다. 정부는 나머지 대학에 대한 추가 지원 여부를 세 대학의 성과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질문은 두 가지로 모인다. 왜 세 곳인가, 그리고 그 성과를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 비판에는 근거가 있다. 국정과제의 본래 구상은 아홉 개 거점국립대를 함께 육성하는 것이었다. 세 곳에 먼저 집중하면 선정 대학과 미선정 대학의 격차가 확대되고, 우수한 교원과 학생이 선정 대학으로 몰리면서 거점국립대 사이에 새로운 서열이 형성될 수 있다. '10개'를 약속하고 '3개'로 출발했으니, 후퇴로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최교진 교육부 장관이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성장엔진 연계 지역인재 양성방안(서울대 10개 만들기)을 발표하고 있다. 2026.4.15.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문제는 정부의 재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홉 곳의 교육 여건을 동시에 서울대 수준으로 향상하려면 매년 수조 원이 필요하다. 현재의 재원을 아홉으로 균등 배분하는 방안도 있었지만, 그 규모로는 교원 몇 명과 장비 몇 대를 보강하는 데 그칠 뿐 기업과 연계된 단과대학과 융합연구원을 설립하기 어렵다. 독일의 엑셀런스 이니셔티브 사례에서 보듯, 우수 연구 클러스터가 다수 집적된 지역에서는 기업의 혁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소수에 그친 지역에서는 뚜렷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균등하게 배분한 재원은 모래사장에 부은 물처럼 흡수되고 만다. 소수 대학에서 먼저 선례를 창출하고 이를 확산하는 방식을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나머지 여섯 곳이 지원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다. 이들 대학에도 기존 지원에 더해 올해 300억~400억 원이 순증으로 투입된다. 다만 이 논리에는 전제가 있다. 세 곳 선정은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한다. 5극3특 권역 가운데 과반이 아직 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고, 정부가 성장엔진으로 선정한 피지컬 AI 같은 분야는 인재를 양성할 대학이라는 축이 없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국가균형성장이라는 정책 본래의 취지가 퇴색한다. 성과를 확인한 뒤 확산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타당하지만, 확산의 준비까지 그 뒤로 미룰 이유는 없다. 내년도 예산을 심의하는 지금이 정부와 국회가 확산의 의지를 보여 줄 시점이다. 선례를 창출해 확산하는 것이 이 정책의 논리라면, 무엇을 선례로 평가할 것인가. 여러 부처가 참여하고 국민적 관심이 큰 사업일수록 가시적 성과를 조속히 내도록 요구받는다. 매년 예산 심의와 국정감사가 돌아오면 정부는 제시할 수치가 필요하고, 그 결과 대학 순위와 논문 수와 기술이전 건수 같은 정량 지표가 평가의 기준이 되기 쉽다. 사업이 중도에 동력을 잃지 않으려면 초기에 성과를 입증해야 한다는 정부의 판단도 이해할 만하다. 세금이 투입되는 사업이 성과로 답해야 한다는 요구도 정당하다. 그러나 정량 지표에 맞춰 운영되는 대학은 단기간에 가시화되는 사업에 재원을 투입한다. 단기 과제로 논문 편수를 늘리고 소액 기술이전으로 건수를 채우면 지표는 빠르게 개선되지만, 지원이 종료되면 대학은 원래 상태로 회귀한다. 이 정책이 남겨야 할 것은 지속가능한 연구생태계, 곧 세계 수준의 연구자를 확보한 대학이 기업과의 공동연구로 성장엔진 분야의 과제를 함께 해결하고 그 성과를 기술이전과 창업으로 공유하는 구조다. 여기서 확보한 재원과 신뢰가 다시 우수 연구자를 유치할 때 연구생태계의 선순환이 완성된다. 이러한 생태계는 5년 안에 수치로 구축되지 않으며, 정량 지표를 좇을수록 오히려 더디게 형성된다. 평가의 기준도 이에 부합해야 한다. 초기 2년은 과정을 평가해야 한다. 교원 인사제도를 실질적으로 개편했는가, 우수 연구자를 유치했는가, 융합연구원이 기업과 함께 자립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으로 정착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논문과 순위 같은 결과 지표는 과정평가 이후에 확인해도 늦지 않다. 과정은 수치로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따라서 해외 석학을 포함한 전문가들이 현장을 방문해 판단하는 정성 평가가 중심이 되고, 정량 지표는 이를 보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교육부도 투입과 과정과 결과를 함께 평가하겠다고 밝힌 바 있으니, 그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정부의 책무다. 대학에도 책무가 있다. 그동안 대학은 재정지원사업을 받을 때마다 계획서와 평가보고서 작성에 적지 않은 역량을 소진해 왔다. 이번에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대학은 자신이 창출할 핵심 성과가 무엇인지 스스로 규정하고 그 성과에 역량을 집중해야 하며, 정부는 서면 보고를 최소화하고 현장에서 성과를 확인해야 한다. 세 곳을 먼저 선정한 것은 집중이 확산으로 이어진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 판단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무엇을 선례로 평가할지가 먼저 확립되어야 하고, 그 기준은 정부가 교체되고 관심이 약화되어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순위가 아니라 구조의 변화로 평가된 선례만이 추가 선정과 확산의 근거가 된다. 정부는 과정을 기다리는 인내를, 대학은 본질적 성과에 집중하는 결단을 보여야 할 때다.
2026.10.01
홍창남 부산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교육부 정책자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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