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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고

타카노 사토시
끝나지 않은 후쿠시마 비극, 웃음 되찾을 때까지
사라지고 있는 사고의 기억, 피폭 방호 대책도 미흡 강제 피난 구역에 지정되지 않았던 지역의 상황도 살펴보자. 사고 직후 방사능 오염이 심했지만 제염 작업 등으로 오염 수치는 줄어들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60km 떨어진 후쿠시마 시의 공간 방사선량은 지금 지자체가 공개한 수치로 0.15Sv/h(시간당 마이크로시버트)이다. 추가 피폭 한계 선량인 연간 1mSv는 시간당으로 환산하면 0.23Sv/h이기 때문에 이보다 밑도는 수치다. 그러나 후쿠시마 시에 거주하는 요시노 히로유키(吉野裕之) 씨는 정부나 지자체가 제공하는 정보나 방사능 방호 대책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며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NPO 법인 샤롬(Shalom) 재해 지원 센터에서 일하는 요시노 씨는 원전 사고 직후부터 후쿠시마에 거주하는 아이들을 방사능 오염이 없는 지역으로 보내고 놀 수 있게 하는 야외 휴양 프로그램을 실시해 왔다. 방학 때는 일주일의 장기 휴양, 학기 중은 주말을 이용한 단기 휴양을 통해 사고 당시 야외 활동을 억제했던 아이들에게 방사선 피폭 걱정 없는 자연 체험 기회를 제공했다. 지금도 연간 약 400명이 이 휴양 프로그램을 이용한다고 한다. 사고로부터 6년 이상 지났지만 요시노 씨는 휴양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연체험 뿐만 아니라 당시 어렸던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 원전 사고를 돌이켜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사고 당시의 경험을 학부모에게 직접 물어보고 후쿠시마의 환경이 어떤 타격을 입었는지 생각하며 국책으로 추진되어 온 원전이 어떤 시설인지, 향후의 에너지 정책은 무엇이 좋을지 논의한다. 아이들은 가족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알게 되고 이를 통해 자기 긍정 의식이 높아진다고 그 의의를 설명했다. 또한 요시노 씨는 후쿠시마는 토양 제염을 통해 땅의 표면 5cm를 깎았다. 1cm의 비옥한 땅이 될 때까지 10년이 걸린다. 휴양 프로그램에서 5cm 깊이로 땅을 파고 생물 조사를 했다. 50년의 자연의 영위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후쿠시마의 아이들이 빼앗긴 것이 바로 이 경험이고, 바로 이 환경이다. 이런 학습을 통해 원전 사고를 돌이켜 생각하고 자기 경험으로 말하지 않으면 정부나 지자체가 추진하는 방사능 안전 교육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고 방사선량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후쿠시마의 자연 환경 변화를 지적했다. 정부는 자연 체험 사업에 대해 2012년부터 지원을 계속하고 있고 올해는 36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요시노 씨는 우리 휴양 프로그램 단체가 요청한 결과다. 그러나 후쿠시마 현에 있는 단체만이 보조 대상인 등 수요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교통비 보조도 올해부터 삭감되었다고 미흡한 정부 대책을 지적했다. 2014년부터 지자체에 의존하지 않은 방사능 측정도 시작했다. 지자체가 측정하고 있는 지면에서 1m 지점뿐만 아니라, 50cm, 10cm 지점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측정기를 해외 지원을 얻어 구입했다. 세 지점을 동시에 측정해서 데이터를 공개하는 활동은 샤롬이 유일하다. 아이들의 통학로나 아이들이 자주 노는 공원을 중심으로 측정해 왔다. 그리고 통학로와 공원 중 아직 0.23Sv/h를 넘는 곳도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요시노 씨는 상황은 늘 변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방사선량 파악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정부나 지자체는 제공을 하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외부 피폭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지자체는 희망자에게 개인의 적산 방사선량을 측정할 수 있는 유리 배지를 대여하고 3개월 간의 누적치를 유편으로 통지하는 작업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요시노 씨는 유리배지로는 개인선량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샤롬에서는 보다 정확한 개인 피폭 적산기기를 사용하고 1분 씩 6일 연속으로 일상적인 외부 피폭을 측정한다. 통학로의 방사선 수치가 높은 아이들의 경우, 결과는 여실히 드러난다. 연간 추가 피폭량이 1mSv 안팎인 아이도 있다. 산간부에 사는 주민이나 농민의 경우, 1mSv를 넘은 사람도 있다고 정부의 미흡한 대책을 비판했다. 요시노 씨는 아내와 딸을 후쿠시마 원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교토(京都)에 보내고 혼자 후쿠시마 시에 살고 있다. 본인은 아내와 딸을 다른 지역에 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후쿠시마에 남아 있는 아이들을 위해 해야 할 것,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이바지하는 것이 나의 원동력이다. 후쿠시마에 남은 아이들에게 휴양 프로그램의 자연 및 환경 학습을 제공하며 주변 환경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역설했다. 요시노 씨(왼쪽 남자)는 아이들의 방사능 방호를 위해 주로 통학로와 공원을 측정한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남쪽으로 43km 떨어진 이와키 시(いわき市)에도 정부와 독립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NPO법인 이와키 방사능 시민 측정실 다라치네(이하 다라치네')가 그것이다. 2011년 9월에 아이가 있는 엄마들이 중심으로 방사능 측정실을 개설하고 현재 12명의 직원이 활동하고 있다. 정보가 부족한 지자체에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겠다는 것이다. 공간 방사선량, 식품뿐만 아니라 청소기에 쌓인 먼지도 측정해왔다. 다라치네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스즈키 가오리(鈴木?) 씨는 측정 데이터에 대해 솔직히 얼마나 위험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와키 시는 공간 방사선량은 0.06Sv/h이고 도쿄와 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청소기의 먼지는 수치가 한 자리수 다를 정도로 도쿄보다 높다고 말했다. 2015년부터 해양 조사도 시작했다. 민간 차원에서 측정이 어려운 삼중수소와 스트론튬도 측정한다. 스즈키 씨는 측정 데이터가 축적되지 않아서 지금 당장 오염의 정도를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육지와 달리 정부의 조사 범위는 좁다.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일반인이 알기 쉽게 데이터를 공개하는 것이 우리의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다라치네는 시민의 의뢰를 받아 식품, 토양, 바닷가의 모래, 청소기의 먼지 등의 방사능 오염을 저렴한 가격으로 측정한다. 2017년 5월부터는 다라치네 클리닉이라는 진료소도 개설했다. 2013년부터 갑상선 검진을 해왔지만 진료도 받고 싶다는 지역 주민의 요구에 부응해 개설하게 되었다. 갑상선 초음파 검사, 갑상선의 호르몬 측정, 소변 중의 세슘 측정, 전신 방사능 측정 등을 할 수 있다. 스즈키 씨는 1달 40~60명이 온다. 아이의 몸 상태를 알고 싶거나 예방 차원에서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스즈키 씨는 아이와 부모 모두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우려한다. 사고 당시 부모는 아이에게 외출을 금지하거나 풀, 꽃, 물 등을 만지지 못하도록 했다. 만졌을 경우에 야단을 치거나 때리기도 했다. 그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부모도 있다며,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들도 있어서 정기적으로 정신과 의사를 부르고 심리 카운슬링도 했다. 앞으로는 심리치료사도 부르고 싶다고 하며, 피폭의 유무에서 심신의 영향까지 종합적으로 아이들을 진단하는 진료소를 만들 생각이다. 올해 5월부터는 다라치네 클리닉을 개설했다. 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스즈키 씨는 정부나 지자체의 방사능 방호 교육에 불만을 표한다. 스즈키 씨는 국립대 교수를 초등학교에 불러 방사능은 무섭지 않다. 지금 안전하다고 가르친다. 그것을 들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방사능은 걱정 없다고 역으로 설득하는 경우도 있다고 정부나 지자체의 교육 방침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방침의 효과가 있는 건지 사고의 기억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현재 풍조에 대해 스즈키 씨는 경종을 울린다. 다라치네 안에서는 방사능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 사회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없다. 고립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그 발상 자체가 고립되고 있다며, 지역의 하와이안 댄스 교실에서 후쿠시마 원전에서 17km에 있는 나라하마치(楢葉町)에 같이 여행을 가는 기획이 있었다. 이 댄스 교실에 다니던 100명의 사람 중에는 참가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참가하지 않는 이유를 원전에서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밝히지 않는 것이다고 한탄했다. 이런 지역 사회에서도 스즈기 씨는 다라치네의 활동 의의를 느끼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지식이 부족하고 방사능 오염이라는 현실을 보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심리도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면 원전 사고의 영향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도 있다는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며, 다라치네 직원들은 특별한 전문 활동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다. 일상의 고민을 가지고 있는 시민이 매일같이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 지역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다라치네는 엄마들이 직접 참여해서 일반 시민의 감수성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 사회의 신뢰도 두텁다(스즈키 사무국장은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여자). 스스로 피난을 결정한 사람들, 피난처에서 고립과 빈곤도 상술한 바와 같이 강제 피난 구역 외의 지역도 당연히 방사능으로 오염되었으며, 정부와 지자체의 미흡한 대응으로 인해 주민들이 스스로 대책을 세우고 있다. 한편, 이런 지역에 남지 않고 스스로 피난을 판단한 시민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일본 사회에서 자주 피난자(自主避難者)라고 부른다. 자주 피난자는 상대적으로 방사능 오염이 심했던 강제 구역 외의 후쿠시마 지역 주민을 비롯하여 주변 지자체 주민들도 포함한다. 자주 피난자는 현재 약 3만 2000명으로 추산된다. 자주 피난자에 대한 배상이나 지원은 강제 피난자에 비해 훨씬 열악하다. 도쿄전력은 자주 피난의 비용으로 임산부와 18세 이하의 아이에게 680만 원, 그 이외의 사람에게 80만 원을 배상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현의 경우는 정부 지원을 받아 자주 피난자에게 피난한 지역의 주거비용을 전액 지급하고 있었다. 자주 피난자에 대한 배상이나 지원은 이 뿐이었다. 그러나 후쿠시마 현은 이마저도 2017년 4월부터 지급을 그만두었다. 현재 자주 피난자들은 경제적인 곤란을 비롯해 다양한 고통을 받고 있다. 후쿠시마 현 고리야마 시(郡山市)에 살고 있었던 하세가와 가츠미(長谷川克己) 씨도 자주 피난자의 한 명이다. 하세가와 씨는 사고 당시 노인 요양 시설의 임원으로 일하며 아내와 다섯 살 난 아들과 생활하고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에는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하세가와 씨는 사고 이후 정부의 설명이나 언론 보도와 인터넷 정보의 차이가 커서 당황했다고 한다. 고리야마 시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60km 떨어진 도시였기 때문에 강제 피난 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방사능에 대한 불안이 있었지만 하세가와 씨의 아내가 대대로 고리야마 시에 살아 왔던 전통적인 가계였기 때문에 피난을 망설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하세가와 씨는 2011년 5월 30일, 탈핵 시민단체가 후쿠시마 현과 방사선 기준치에 대한 교섭을 하는 자리에 출석했다. 하세가와 씨는 후쿠시마 현의 태도를 보니 주민 생명을 중시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중시하고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피난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1년 6월에는 방사능 측정기를 구입해서 자택 주변 환경을 스스로 측정했다. 자택 마당은 시간당 1.5Sv였고 아들의 방마저도 연간 추가 피폭 한계인 1mSv를 넘은 시간당 0.5mSv였다. 하세가와 씨는 아이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아들과 함께 자신의 출신지이자 후쿠시마 원전에서 325km 떨어진 시즈오카 현(?岡?) 후지노미야 시(富士宮市)로 피난했다. 자주 피난자가 된 하세가와 씨는 노인 돌봄 사업을 창업하고 피난 생활을 시작했다. 하세가와 씨는 처음에 후쿠시마와 피난한 지역 사회의 방사능에 대한 인식 격차에 당황했다고 한다. 후쿠시마에서 왔다고 차별은 받지 않았지만 지역 주민들은 후쿠시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방사능 오염에 대해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세가와 씨는 이것이 현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민감한 아들은 달랐다. 2015년 3월 11일, 하세가와 씨는 학교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들이 심리적인 공황에 빠졌다고 한다. 학교를 방문한 하세가와 씨는 선생님에게 설명을 들었다. 3월 11일이어서 교실에서 원전사고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들이 그 때는 힘들었다고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아들의 앞에 앉아 있던 반 친구가 안 그랬지라고 조롱했다. 아들은 그 친구의 등을 때리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하세가와 씨는 아들의 억울한 마음을 제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없다고 통감했다. 하세가와 씨는 자주 피난자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자주 피난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정부와 교섭을 할 때도 있다. 하세가와 씨의 사례처럼 자주 피난자가 피난한 지역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노골적인 차별을 받는 경우도 있다. 배상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목걸이를 한 자주 피난자가 목걸이도 배상금으로 샀냐고 욕을 먹거나 자가용에 후쿠시마로 돌아가라고 쓰인 종이가 붙은 사례 등 지역 사회의 이해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2016년 11월에는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에 피난한 초등학생이 4년 동안 왕따를 당하고 학교 측도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았던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사회의 차별이나 아이의 왕따를 염려하여 자주 피난자라고 밝힐 수 없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일본 시민 사회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다가 지역 사회에서 고립된 자주 피난자를 지원하기 위한 단체 피난의 협동 센터가 2016년 7월에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크게 세 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첫째, 주거와 생활, 건강에 관한 상담을 하고 필요한 지원으로 연결하는 상담 지원. 둘째, 피난자가 고립되지 않도록 교류의 장 만들기. 셋째, 정부나 지자체와의 교섭과 정책 제안이다. 처음에는 주거에 관한 상담이 대부분이었지만 빈곤, 기초생활 수급, 가정 내 폭력 등 상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피난한 사람과 달리 자주 피난자의 경우, 경제적인 이유나 방사능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아버지는 피난하지 않고 어머니와 아이만 피난하는 모자(母子) 피난이 상대적으로 많다. 앞에 나왔던 샤롬에서 일하는 요시노 씨도 그렇다. 이런 이중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빈곤에 빠질 위험성도 있다. 피난의 협동 센터 세토 다이사쿠 사무국장은 상담 전화를 하는 모자 피난자들 중에는 이혼한 경우가 절반 이상이다. 이혼을 하면 모자 가정이 된다. 모자 가정에 대한 지원 체계가 열악하기 때문에 그대로 바로 빈곤에 빠진다. 가족 단위로 피난을 못 하는 것이 자주 피난자의 어려움의 특징이다고 설명했다. 또한, 세토 사무국장에 의하면 자주 피난자는 세 가지 빈곤을 겪는다고 한다. 첫째는 경제적 빈곤이다. 배상 및 지원이 부족하고 2017년 4월부터 주거비용 보상도 없어졌다. 둘째는 관계성의 빈곤이다. 편견이나 차별로 피난한 지역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고 고립하게 된다. 셋째는 지식의 빈곤이다. 피난한 지자체 정책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지원 대책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빈곤의 악순환에 빠진다고 한다. 세토 사무국장은 정부는 우선 자주 피난자의 실태 파악을 해야 한다. 모자 피난자 세대, 기초생활 수급자 세대의 숫자를 파악하고 가시화 해야 한다. 그에 따라 공영 주택 입주 조건 완화, 기초생활 수급자에 대한 특별 지원 등 구체적인 대책을 세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피난의 협동 센터는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사토 사무국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남자)에 의하면 자주피난자의 고립은 심각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대응은 더디다. 일본 정부의 태도를 잘 알 수 있는 사건이 2017년 4월 4일에 터졌다. 당시 이마무라 마사히로(今村雅弘) 부흥대신은 기자회견에서 자주 피난자가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 본인 책임이라고 말했다. 자주 피난 생활을 보내는 하세가와 씨는 6년 동안 정부와 교섭하면서 느껴 왔던 것이라며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한탄했다. 세토 사무국장도 하세가와 씨도 정부가 빨리 피난 문제를 수습하고 원전 사고가 종식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의도를 느낀다고 한다. 세토 사무국장은 1995년 한신 대지진 때는 지원이 5~6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하세가와 씨는 나는 당당하게 자주 피난자라고 말하고 싶다. 정부가 원전사고에 대해 주민들에게 진정하게 사과할 의사가 있다면 우리 자주 피난자를 찾아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 사회가 자주 피난자에 대한 지속적이고 다양한 지원을 실시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대책 강구가 요구된다. 늘어나고 있는 갑상선 암, 시민들이 돈을 모아 치료 지원도 그렇다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주민들의 건강에 끼치는 영향은 어떠한가? 방사능 오염과 인체 영향에 대해서는 아직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경우, 방사선 피폭과 갑상선 암의 인과 관계가 증명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주민들의 중장기적인 건강 관리를 위해 2011년에 후쿠시마 현이 설립한 후쿠시마 현민 건강 관리 기금에 7820억 원을 투입했다. 이 기금을 이용한 대표적인 대책이 갑상선 암 검진이다. 사고 당시 18세 이하의 후쿠시마 아이들 약 38만 명을 대상으로 2011년 10월부터 검진을 시작했다. 2011~2012년도에 1차, 2014~2015년도에 2차, 2016~2017년도에 3차로 지금까지 총 3회 검진을 실시한 결과, 암 및 암 의혹으로 진단 받은 사람은 191명에 이른다. 일본의 갑상선 암 발병률인 100만 명 중 3명에 비하면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일본 정부는 방사선 피폭과 일련의 갑상선 암 발견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갑상선 암 제거 수술 비용을 전액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책에 대해 결함이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먼저 검진 대상을 사고 당시 18세 이하로 국한한 점이다. 또한 후쿠시마 현 이외의 주변 지자체에도 방사능 오염이 심한 지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사 대상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정기 검진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20세 이상이 된 사람에 대해서는 검진을 5년에 한 번밖에 하지 않는 점 등이다. 이런 결함을 시민들이 스스로 보완하기 위해 2016년 7월 3.11 갑상선 암 아이들 기금(이하 '아이들 기금')을 만들었다. 아이들 기금을 통해 갑상선 암 진단을 받은 사람에 대한 의료비 급여, 소아 갑상선 암에 대한 이해 촉진 캠페인, 갑상선 암 환자에 대한 조사와 상담을 실시하고 있다. 대표이사를 맡은 사키야마 히사코(崎山比早子) 씨는 설립 기자회견에서 감상선 암 환자와 가족은 고립되고 거듭되는 진료와 치료비로 인해 경제적인 곤란을 겪으며 진학, 취직, 결혼 등에도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경제적인 지원을 비롯해 다양하고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영향으로 인한 건강 피해는 일어나지 않다고 생각하고 포괄적인 지원책이 없는 상황이라고 정부의 자세를 비판했다. 또한 정부와 후쿠시마 현의 조사의 허점도 드러났다. 아이들 기금은 2017년 3월 31일, 사고 당시 4세였던 아이에게 의료비를 급여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후쿠시마 현의 조사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가 중요한 이유는 후쿠시마 현이 방사능의 영향을 부정하는 근거로 4세 아이에서 갑상선 암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워왔기 때문이다. 사키야마 대표이사는 현재 후쿠시마 현이 공표하고 있는 데이터는 후쿠시마에서 발생하고 있는 소아 갑상선 암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아이들 기금은 급여를 한 소아 갑상선 암 환자 72명에 대해 설문 조사를 실시하고, 그들의 고민을 밝혔다. 고민하거나 걱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51.4%가 결혼, 48.5%가 학업, 의료비라고 답했다. 또한, 25%가 갑상선 암 진단 후 진학이나 취직 등 예정하고 있던 계획을 변경 혹은 포기했다고 답했다. 정부와 후쿠시마 현이 방사능의 영향과 건강 피해를 부정하는 가운데 갑상선 암에 걸린 아이와 그 가족의 고통만 증폭되고 있는 현실이 드러났다. 참고자료 샤롬 재해 지원 센터 http://nposhalom.sakura.ne.jp/hsf/ 이와키 방사능 시민 측정실 다라치네 http://www.iwakisokuteishitu.com/ 피난의 협동 센터 http://hinan-kyodo.org/ 3.11 갑상선 암 아이들 기금 http://www.311kikin.org/ 글을 쓴 타카노 사토시 씨는 2010년 3월에 한국에 와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사고를 겪은 후 에너지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같은 해 9월부터 약 2년 동안 서울에 있는 환경단체에서 활동을 했다. 2011년 12월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탈핵세계회의에서 처음으로 후쿠시마를 방문했다. 이후 후쿠시마에 가서 주민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2015년 9월부터 경북대학교에서 환경,에너지 정책을 전공했고 2017년 8월 한국의 사용후핵연료 문제에 관한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금 박사 진학을 위해 준비 중이다.
타카노 사토시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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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봉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권력을 과시하지 않는 힘
헬무트 콜은 1990년 거의 무명에 가까운 동베를린 물리화학연구소 연구원 앙겔라 메르켈을 여성청년부 장관에 발탁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년 뒤다. 위대한 독일통일의 아버지는 약관 36세의 메르켈을 나의 소녀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2005년 소녀는 총리가 되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 여성 총리, 동독 출신 첫 총리, 전후 최연소 독일 총리가 됐다. 독일인은 그 이후 지금까지 총리관저에서 새로운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는 지난 9월 총선에서 승리해 네 번째 연임에 성공했다. 자신이 당에서 축출한 정치적 대부이자 최장수 총리였던 콜과 같은 16년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3)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꼽혔다. 미국 경제전문 매체 포브스는 지난 1일 2017년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을 선정하며 메르켈을 가장 먼저 호명했다. 그는 7년 연속 포함됐고 열두 번 1위를 차지했다. 두 해 전인 2015년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메르켈을 선정했다. 여성 단독으로는 30년 만이었다. 앙겔라 메르켈이 21세기 첫 4반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빛나는 여성 정치인이라는 사실에 이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메르켈의 정치적,외교적 리더십에 대한 분석과 일화는 차고 넘친다. 책도 많이 나왔다. 리더십은 기본적으로 교육과 경험과 위기에서 단련되고 만들어지지만, 여성 정치인 메르켈의 경우에는 좀 특별하다. 그의 인간적 성품 자체가 리더십의 큰 부분을 차지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그의 인간적 면모와 품성과 개인 생활은 정치외교에 비해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성품 자체가 소탈하고 드러내길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가 장관에 발탁되었을 때 독일 정치판은 압도적으로 남성 천하였다. 마흔도 안 된 이혼녀에 아이도 안 낳아본 여자에게 여성청년부를 맡기냐고 말이 많았다.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얼핏 콜걸을 연상시키는 콜의 여자(Kohl's Girl)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세련된 구 서독 정치인의 이미지에 익숙했던 언론은 동독의 촌스런 시골 여자를 대놓고 놀렸다. 콜 총리도 외국 정상과의 회담에서는 메르켈이 자기 옷을 입고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언론이 뭐라 떠들든 대꾸하지 않았다. 제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해 나갔고 점수를 따나갔다. 정치는 이미지라고도 하지만 메르켈은 자신을 도드라지게 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는 편이다.여성임을 표 나게 앞세우지도 않는다. 카메라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대처처럼 대차지도 않고, 힐러리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패셔니스타로 통하는 이웃 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처럼 차림새에 신경 쓰지도 않는다. 관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메르켈 독일 총리.(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화장기 없고 바른 듯 만 듯한 립스틱, 이발소에서 싹둑 깎은 듯한 숏컷 헤어 스타일, 박스 모양 재킷에 벙벙한 검은 바지, 뭉툭한 단화. 독일인들은 그 차림을 총리의 유니폼이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의 머리 모양에 대한 지적에 대해 머리를 매만질 시간이 없어서 한 번 만진 머리는 열두 시간 이상 버텨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스타일 사진이 두 번 국내외 언론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2015년 국가부도를 선언한 그리스 정부의 구제금융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됐을 때, 맨 얼굴에 채 말리지 못한 젖은 머리로 급하게 공관에 출근하던 모습이 하나다. 그 사진은 지금도 그날의 올림머리와 비교돼 인터넷을 맴돈다. 또 하나는 정반대다. 2008년 노르웨이의 오슬로 오페라하우스 개관 기념공연에 초대받았을 때다. 메르켈은 가슴과 등이 파격적으로 깊게 파인 검은 이브닝 드레스에 푸른 숄을 걸치고 왔다. 언론에서 난리가 났다. 사진에는 드디어 총리가 가슴선을 보여 줬다는 설명이 붙었다. 한 신문은 메르켈의 대량 살상 무기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실었다. 다음날 총리 대변인은 총리의 반응을 이렇게 전했다. 개관한 오페라하우스보다 드레스에 이목이 쏠린 상황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다. 행사의 주인공인 노르웨이 공주보다 관심이 더 집중돼 미안하게 생각한다. 세상에는 드레스보다 중요한 일이 많다. 지난 여름에는 영국의 한 언론이 메르켈 총리가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 산악 휴양지의 한 호텔에서 매년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늘 같은 옷이었다며 보라색 체크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 차림의 5년간 사진을 증거로 보여줬다. 그는 공식석상에서도 같은 옷을 여러 차례 다시 입고 등장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메르켈은 총리관저에서 살지 않는다. 남편과 베를린 시내 작은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문에는 남편 요아힘 자우어 훔볼트대 화학과 교수의 이름이 붙어있다. 남편 역시 대중 앞에 나서기를꺼린다. 아내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휴가를 떠날 때도 메르켈은 관용기로, 남편은 민간 여객기로 따로 간다. 메르켈은 두 번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다. 물리학자와 결혼했다가 5년 만에 이혼했는데 첫 남편의 성인 메르켈을 고집하고 있다. 집에서는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며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쉬는 걸 좋아한다. 다섯 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사저에서의 생활은 철저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남에게 드러내길 싫어하지만 소탈하고 특권을 내세우지 않는 그는 시장이나 약국,미용실,음식점 같은 의외의 곳에서 시민이나 언론과 마주쳐 사진이 찍힌다. 2015년 조선일보 베를린 주재 기자가 동네 수퍼마켓서 메르켈을 만난 기사와 사진을 보도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꼬깃꼬깃한 장바구니를 들고 전용차에서 내려 1유로 동전을 넣고 카트를 꺼냈다. 1993년부터 매주 이 곳에 들러 생필품을 구입한다고 한다. 이날은 종이에 적어온 걸 보면서 오렌지, 가지, 양배추, 로션, 주방용 타월, 레드와인, 초콜릿, 밀가루, 토마토소스 등을 사고 계산대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자기 카드로 결제했다. 동네의 평범한 아줌마처럼 보였다. 주인도 쇼핑객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를 다룬 평전을 보면 메르켈은 꽤 인문학적이며 학구적이다. 그런 취향이 지도자의 덕목인 혜안과 통찰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메르켈은 러시아어와 러시아 역사에 능통한 문학 애호가다.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체홉,푸시킨 책을 탐독한다. 2014년에 회갑을 맞았는데 집권 기독민주당(CDU)이 주최한 회갑 선물은 역사 강연회였다. 저명한 학자 위르겐 오스터함멜이 역사의 시간적 지평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가 직접 초대했다고 한다. 이 생일파티 때문에 브뤼셀에서 열기로 했던 유럽연합 정상회의 날짜가 연기됐다. 그게 유럽에서의 메르켈의 위상이다. 메르켈의 인간적 품성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소박한 차림, 검소한 생활, 소탈한 품행이다. 마초 같은 상남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뚝심에, 이웃집 아줌마 같은 편안함이 정치적 장수의 첫 번째 비결이라고 분석한 정치평론가가 많다. 그래서 독일인이 붙인 그녀의 별명은 무티(Mutti, 엄마)이고 그녀의 리더십은 엄마 리더십이라고 불린다. 그에 대한 독일 언론의 평가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 메르켈은 권력을 가진 것을 특별하지 않은 일로 바꿔 놓았다. 그녀는 권력을 과시하지 않는 힘을 가졌다. 메르켈은 2010년 G20 정상회의 때 서울을 방문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다. 국내 몇몇 언론이 두 지도자가 여러 점에서 닮았다고 기사를 썼다. 여성-비슷한 나이-보수(정당)-전공(이과)-분단의 역사를 거론했다. 그로부터 7년 후, 한 여자는 4연임에 성공했고 한 여자는 임기 중에 창살에 갇혔다. 그런데 두 여인을 비교하면서 가장 중요한 걸 간과했다. 메르켈은 동독의 작은 교회 가난한 목사의 딸이었다. 그는 자수성가했다. 박 대통령보다 2년 4개월 늦게 태어났지만 그때에도 눈가와 입언저리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였다.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hkb821072@naver.com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기봉 201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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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평창 메달, 평창만의 독창성과 한국의 미 표현”
이석우 디자이너가 지난 9월 21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2018평창동계올림픽 메달 공개 행사에서 메달 디자인을 설명하고 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금,은,동메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달 디자인의 컨셉은 세계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음성 체계이자 우리 민족의얼이담긴 한글이다. 메달은 평창동계올림픽을 향한 온 국민의 기대와 염원을 품은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IOC와 국제경기연맹으로부터 역대 올림픽 메달 중 신선하고 창의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평창올림픽 메달, 우리 민족의 한글 입체감있게 표현 내년 2월강원도 평창에서 선의의 경쟁을 치른 선수들에게 수여될 금,은,동메달을 디자인한 이석우 디자이너(40)를 서울마포구 서교동 디자인컨설팅회사 SWNA 사무실에서 만나 메달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평창동계올림픽 메달을 디자인한 이석우 디자이너는 지난해 5월부터 최근까지 약 1년간 메달 디자인에 몰두했다. 한국 최초로 열리는 동계올림픽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영광스럽다고 밝힌 이석우 디자이너는 책임감을 갖고 메달 디자인 작업에 임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작업에 참여하게 되서 굉장히 영광스럽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도 들었죠. SWNA 회사 스탭 등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응원이큰 힘이 됐고요.아무래도 아이디어를 다듬고 발전시켜 최종 결과물에 이르는 데 가장 고심했죠. 형태, 소재, 제조 공정 전 과정에 디자인 콘셉트와 아이디어가 일관되게 반영되도록 노력했어요. 이석우 디자이너. 평창동계올림픽 메달은 역대최초로 측면에 메시지가 담겼다.메시지는 바로우리의 민족의 근간을 뜻하는 한글이다. 이석우 디자이너는 우리 문화유산을 어떻게 메달 디자인에 반영할지 고심했다며 평창올림픽을 준비하는 세계 각 나라 선수의 열정과 노력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이석우 디자이너는 강원도 평창의지역적인 특색을표현하는 동시에우리 민족의 정신을메달에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문화의 근간의 커다란 뿌리는 바로 언어죠. 이런 언어 생활양식은 그 민족과 국가의 문화를 만들고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글을 창의적으로 형상화하고 입체화할지에 중점을 뒀죠. 평창동계올림픽 메달은 현존하는 가장 완성도 높은 음성체계인 한글을 모티브로 자음이 길게 뻗어나가는 형상으로 역동적이면서 새로운 형상을 제안하는 컨셉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의 씨앗이 진화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통해 꽃과 열매가 된다는 함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석우 디자이너는 기존 메달과 다른 평창만의 독창성을 담고 싶었다며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며 우리 문화의 근간이자 씨앗이며그 씨앗이 곧 선수들의 노력과 열정을 의미한다는 뜻에서 자음을 입체화했다고 설명했다. 올림픽 정신 선수들의 노력과 인내표현 메달 앞면을 보면 좌측 상단에 올림픽을 상징하는 오륜이 그려졌다. 선수들의 노력과 인내를 표현한 역동적인 사선이 펼쳐졌다. 뒷면에는 대회 엠블럼과 세부 종목명을 담았다. 평창동계올림픽 메달 디자인 측면과 정면. (사진 = 2018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측면이다. 테두리를 빙 둘러 평창동계올림픽이공일팔의 초성과 종성의 자음을 딴 ㅍㅇㅊㅇㄷㅇㄱㅇㄹㄹㅁㅍㄱㅇㄱㅇㅇㄹㅍㄹ을 새겨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그는문자와 사선이 연결되는 부분의 경우 제조공법에서 어려움이 있었고, 스트랩도 기존에 사용하지 않던 소재라 여러 과정을거치며 연구를 거듭했다고 설명했다. 또한복의 천을 사용한 메달 리본과 우리 기와의 곡선을 살린 메달 케이스를 통해 전통미와 독창성을 부각했다. 한국적인 세련미를 표현하는 초점이 맞춰졌다. 메달을 목에 걸 리본(스트랩)에는 PyeongChang 2018과 오륜기를 새겼다. 전통 한복 특유의 갑사 기법을 통해한글 눈꽃 패턴과 자수를 섬세하게 적용했다. 리본은 대회 룩의 라이트틸(Light Teal)과 라이트레드(Light Red)의 두 가지 색을 사용했는데 폭은 3.6cm이고, 메달을 장착했을 때의 길이는 42.5cm이다. 이석우 디자이너는 한복에는 은은하고 단아한 멋이 있다며 이 아름다움을 메달 리본에 잘 표현하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한국적 아름다움 살린 메달 리본 원목으로 만든 메달 케이스는 전통 기와지붕의 곡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디자인했다. 2014년 소치 대회와 비교하면 금메달과 은메달은 더 무거워졌고 동메달은 가벼워졌다. 메달의 지름은 92.5㎜, 두께는 최소 4.4㎜, 최대 9.42㎜이다. 무게는 금메달이 586g, 은메달이 580g, 동메달이 493g이다. 금메달과 은메달은 순은(순도 99.9%)으로 제작했고, 금메달의 경우 순은에 순금 6g 이상을 도금하도록 한 IOC 규정을 준수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금,은,동메달. 동메달은 단동(Cu90-Zn10) 소재이며, 은메달과 함께 착조 형태로 마감된다. 동계패럴림픽 메달은 현재 제작 중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메달과 더불어 패럴림픽 메달 디자인에도 참여한이석우 디자이너는 패럴림픽 메달은 사선 모양이 아니라 수직 패턴이며 이는 평등하다라는 의미를 담고있다고 설명했다. 메달은 올림픽의 상징이다. 우승자에게 금,은,동메달이 수여되기 시작한것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올림픽 때였고 선수 가슴에 달아주었다. 목에 거는 메달은 1960년 로마올림픽에 등장했다. 메달은 개최국의 특색을 드러내는 동시에 올림픽 메달에 도전하는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198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지 30년만에 치러지는 동계올림픽이다. 이석우 디자이너는평창올림픽 메달의가치, 올림픽 메달의 정신이 잘 드러나도록 심혈을 기울인 만큼 내년에 올림픽 때잘 쓰여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는 평창올림픽 메달을 모두 259세트를 제작한다. 한국조폐공사가 제작에 참여한다. 259세트 가운데 222세트는 102개 세부종목 영광의 입상자들에게 수여하고, 나머지는 동점자 발생 대비용(5세트)과 국내외 전시용(국제올림픽위원회 25세트, 국내 7세트)으로 활용된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201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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