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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도시치’와 ‘가나야마 마사히데’

한기봉 칼럼니스트 2019.01.30

둘 다 일본인이다. 한일 관계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기억하는 이름일 수 있지만,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간 보여 준 친절을 마음 속 깊이 고맙게 생각하오. 동양에 다시 평화가 찾아와 두 나라 사이에 우호 관계가 회복될 때 다시 태어나 반갑게 만나기로 하세.”
“선생님,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죄송한 마음에 가슴이 저립니다. 앞으로 선한 일본 사람이 되도록 생을 바쳐 정진하겠습니다.”

한 사람은 사형수, 한 사람은 간수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중국 뤼순(旅順)감옥. 수의를 갈아입고 형장으로 가기 직전 안중근 의사와 간수 치바 도시치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다. 안중근은 31세, 치바는 25세였다.

“나도 죽으면 이곳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 당신과 이 세상에서 한일 관계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죽어서라도 나누고 싶다.”
“정말인가. 그럼 내가 여기에 묏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나중에 오시겠나?”

1975년 4월, 경기 파주시 조리읍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역 하늘묘원. 한국 땅에 묻히길 바란 사람은 제2대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가나야마 대사다. 부탁받은 사람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다. 이 약속은 23년이 지난 1998년 이뤄진다. 가나야마 대사는 사후 1년 만에 이곳에 안장됐다. 그의 묘 바로 옆에는 최 원장의 가묘가 나란히 있다. 가나야마 대사의 묘비에는 고인의 유언이 구상 시인의 글로 새겨져 있다. “나의 시신은 한국 땅에 묻어 달라. 나는 죽어서도 일한 간의 친선과 친화를 돕고 지켜보고 싶다.”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처형 당일 간수 치바 도시치에게 써준 유묵. 유족이 남산 안중근기념관에 헌납했다.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처형 당일 간수 치바 도시치에게 써준 유묵. 유족이 남산 안중근기념관에 헌납했다.

치바 도시치(千葉十七, 1885~1934)와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1909∼1997). 한 사람은 일본군의 말단 헌병이었고, 한 사람은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이 파견한 거물급 외교관이었다. 앞 이야기는 한국인 열사를 인간적으로 숭배한 한 일본인의 개인적 감정이고, 후자는 일본 정부를 대신하는 공인이 지녔던 한일 우호의 신념이었다.

11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뤼순 감옥에 수감된다. 당시 치바 도시치는 형무소를 지키던 헌병이었다. 치바에게 안중근을 감시하는 임무가 떨어졌다. 그의 인생을 바꾼 몇 개월의 짧은 운명적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치바는 처음에는 일본의 위인을 암살한 안중근에게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나 안 의사 거사의 대의명분과 동양평화 철학, 사형을 판결하는 재판정에서도 꺾이지 않는 의연한 지조와 인간적 품위를 곁에서 접하면서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안 의사는 치바를 불렀다. 그리고는 자신을 정성으로 돌봐준 답례로 ‘爲國獻身軍人本分’(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글씨를 써준다. 치바도 한 나라의 군인으로서 할 일을 한 것이니 미안한 마음을 갖지 말라는 의미였다.

눈물로 안 의사를 보낸 치바는 제대를 자청하고 고향 미야기현 센다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철도원과 경찰로 일하며 49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삶은 안 의사와 떨어질 수가 없었다. 존경을 넘어 숭배였다. 집안에 불단을 만들어 의사의 초상과 위패와 필묵을 모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절하며 기렸다. 아내 치바 기츠요도 그의 유언을 받들어 1965년 74세로 죽을 때까지 위패를 모셨고 이는 자식으로까지 이어졌다.

그의 고향에는 대림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의 주지인 사이토 다이켄은 치바와 안중근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다. 스님은 두 사람을 기리는 현창비와 기념관을 세웠고 둘의 영정을 모셨다. 그는 일본인의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매년 안중근을 숭모하는 일본인들과 함께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안 의사 추모제를 열고 있다.

안중근과 치바의 속세 인연은 슬프도록 아름답고 운명적이어서 가슴 아프다. 마치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 같다. 사형수와 간수로 만난 두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재회해 반갑게 포옹했을 것이다. 안중근의 조국인 한국에는 그토록 평생 그를 가슴에 품고 기리며 살아간 사람이 있을까.

그로부터 50여 년을 뛰어넘어 가나야마 마사히데 대사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 3년 후인 1968년 제2대 주한 일본 대사로 부임해 1972년까지 4년간 재직했다. 외교관임에도 한국에 대해 늘 미안한 마음을 지녔다 하고, 재임 중 한국의 산업화와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부임 후 첫 3·1절 기념식에 전례를 깨고 일본 대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본국의 질책을 받자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과 잘 지내기로 해놓고 한국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을 문제 삼으면 안 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이 “술이나 먹자”며 그를 불렀다. 박 대통령은 그에게 대한민국의 주일 대사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하며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 총리에게 포항제철소 설립에 필요한 기술 협력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가나야마 대사는 일본 외무성에도 알리지 않고 도쿄로 건너가 사토 총리를 만나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한일 관계는 끝장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술 지원에 부정적이었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철 회장 겸 일본 경단련(經團連) 회장을 집요하게 설득해 포철 설립의 길을 열어줬다고 전해진다.

귀국한 가나야마 대사에게 일본 외무성은 유럽 일본관장 자리를 대사급으로 격상해 맡기려 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은퇴한다. 그리고 바로 도쿄에 있던 최서면 한국연구원장을 찾아갔다. 그는 1988년 ‘최서면과 나’라는 글에서 “한국에서 대사로 있으면서 양국 관계가 중요하다는 신념을 품었고 제2의 인생을 한일 친선을 위해 바칠 것으로 결심했다”고 썼다. 최 원장은 “가나야마 대사는 일본이 아무리 주변 강국과 외교를 잘 해도 한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일본 외교의 실패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파주 천주교 공원묘원에 있는 제2대 주한 일본 대사 가나야마 마사히데의 묘소.
파주 천주교 공원묘원에 있는 제2대 주한 일본 대사 가나야마 마사히데의 묘소.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최 원장은 한국연구원에 국제관계공동연구소를 만들어 가나야마 대사에게 초대 소장을 맡겼다. 천주교 신자인 두 사람은 세례명(아우구스티노)까지 같았는데, 이후 두 사람은 형제처럼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 가나야마 대사는 재일동포 고령자 복지시설인 ‘고향의 집’ 네 곳을 세우는 모금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의 딸은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

가나야마 대사가 한국 땅에 묻힌 곡절은 무얼까. 1975년 가나야마는 최 원장의 모친 3주기를 맞아 파주 하늘묘원에 갔다. 그리고 최 원장에게 나도 이곳에 묻히게 해달라고 깜짝 제안을 한다. 최 원장은 가족 묘지 공간에 그의 가묘를 만들어줬다. 그 후 가나야마 대사는 가끔 자신의 가묘를 찾아 “영혼이 쉴 집이 한국에 마련됐다”고 기뻐하면서 성묘했다고 한다. 그는 1997년 “죽어서도 한국에 사과하고 싶다. 나의 뼈 절반은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듬해인 1998년 그의 안장식은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집전했고 일본 성악가가 그의 애창곡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다. 그의 후배 대사들은 부임하면 이곳을 참배하며 선배 대사를 모셔준 데 감사를 표한다고 한다.

앞의 이야기에도 최서면 원장(91)이 관련이 있다. 안 의사가 치바에게 써준 유묵은 치바 가문이 대대로 가보로 모시다 안 의사 탄생 100주년인 1979년 남산에 있는 안중근기념관에 헌납했는데, 안중근을 연구해온 최 원장이 이 유묵의 존재를 알게 됐고 반환 과정에 역할을 했다. 연희전문을 나온 최 원장은 1958년 일본에 건너가 1969년 도쿄에 한국연구원을 설립해 근대 한일 관계를 연구하고 임진왜란 북관대첩비 같은 희귀 사료를 발굴한 사학자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한일 관계는 냉각됐다. 이 두 일본인의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와 외교, 양국 친선을 풀어가는 데 작은 단초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한기봉

◆ 한기봉 칼럼니스트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글쓰기를 가르쳤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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