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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의 ‘뚱뚱한’ 마네킹

2019.07.23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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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영국 런던 도심 옥스퍼드 거리에 있는 나이키 매장이 갑자기 세계적으로 뉴스를 탔다. 뉴스의 주인공은 매장 안에 세워진 마네킹이었다.

나이키의 스포츠 탑과 레깅스를 입은 마네킹은 터질 듯한 굵은 허벅지와 가슴, 탄탄한 어깨와 팔뚝, 기존 마네킹의 두 배쯤 돼 보이는 당당한 허리로 시선을 압도했다. 플러스 사이즈 마네킹의 공식 데뷔다.

영국의 언론과 시민, 특히 여성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마네킹은 날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현실을 반영해 교정됐다며 환영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권위 있는 일간지 텔레그래프에는 “비만 마네킹은 여성들에게 위험한 거짓말을 팔고 있다”는 칼럼이 실렸다. 필자는 “그 여성은 나이키의 멋진 옷을 입고 달릴 수 없다. 당뇨병 환자일 가능성이 높고 고관절 치료를 받아야 한다. 상업적 목적으로 비만 체형을 건강하고 당당하다고 주장하는 나이키가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영국은 지난해 탄산음료에 설탕세(sugar tax)를 도입해 비만과의 전쟁을 선포한 나라다.
 
다른 권위지 인디펜던트에는 이 칼럼을 반박하는 칼럼이 실렸다.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그건 팻포비아(비만공포증)일 뿐이다. 나이키 마네킹은 뚱뚱한 여성은 운동을 할 수 없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깨는 데 기여했다” 

이 뉴스를 보면서 지금까지 정말 뚱뚱한 마네킹은 전혀 없었던가, 하는 사실에 우선 놀랐다. 마네킹의 한결 같은 8등신 체형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품지 않았던 내 상상력의 한계도 절감했다.

백화점 여성 의류 코너를 지날 때, 과장적으로 섹시한 체형의 마네킹에 손바닥만한 속옷이 입혀져 있는 걸 보고 눈을 둘 곳이 없었던 경험이 있다. 남자 마네킹도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뚜렷한 복근에 가슴이 두드러진 멋진 근육질 체형 마네킹에 주눅이 들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마네킹을 검색해봤다. ‘이상적 한국 여성의 체형’이란 광고 문구와 함께 늘씬한 마네킹들이 손짓하고 있다. 66, 77 같은 빅 사이즈도 더러 눈에 띄었지만 허리는 다 잘록했고 균형미가 있었다.

궁금했다. 늘씬한 마네킹에 옷을 전시하면 매출이 증가하고, 뚱뚱한 마네킹을 세우면 매출이 떨어진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을까. 중년을 상대로 한 옷가게라면 비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나이에 맞게 적당히 인격도 나오고 팔뚝도 굵은 마네킹을 세워놓아야 고객 입장에서는 편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마네킹의 획일적 체형에 대한 논란은 국내에서도 이미 있었다. 여성환경연대는 2017년 7월 26일 명동에서 “문제는 마네킹이야”라는 퍼포먼스를 했다. 불가능한 몸의 기준을 제시하는 마네킹 체형을 현실에 맞게 고치고, 의류회사들은 빅 사이즈를 포함한 다양한 사이즈의 옷을 출시하라는 촉구였다. 실제로 외국 브랜드에 비해 한국 브랜드는 사이즈가 다양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렇게 외쳤다.

“사람을 본 따 마네킹을 만든 것이 아니라, 마네킹을 본 따 사람을 만들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마네킹은 키 178㎝, 가슴 32, 허리 24, 엉덩이 35인치의 바비 인형 몸매인데 이런 몸을 가진 한국 여성은 10만 명 중 1명꼴이다. 여성들은 비정상적으로 마른 마네킹 체형이 마치 표준인 것처럼 전시된 것을 보면서 자신의 몸에 대해 비참함과 죄책감을 느낀다. 마네킹 같은 몸매를 칭송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끊임없이 다이어트 압박을 받고 자신의 몸을 혐오한다.”

여성단체는 또 광고 모델의 사진을 날씬하게 보정했으면 반드시 ‘수정된 사진’이라는 점을 명시하는 ‘포토샵 고지법’을 제정할 것도 주장했다. 프랑스 등 몇 개 나라는 실제로 이런 법이 있다. 아르헨티나는 2005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든 의류 상점이 빅 사이즈 옷을 의무적으로 갖추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2007년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도 매장에서 66사이즈 옷을 찾기 힘들다며 여성 의류 메이커들이 빅 사이즈 옷을 의무적으로 제작 판매토록 하는 법안을 추진한 적이 있다.

여성 의류 치수는 1979년 성인 여성의 평균 키 155㎝, 가슴둘레 85㎝의 뒷자리 숫자를 딴 ‘55’를 기준으로 했다. 여기서 키는 5㎝ 간격, 가슴둘레는 3㎝ 간격으로 더하고 빼 ‘44’, ‘66’이 정해졌다. 이 표기는 여성의 체형이 변하며 80년대 말 폐지됐으나 업계는 관행적으로 쓰고 있다. 지금 여성 정장의 KS 표기는 가슴-허리-히프 사이즈를 쓰는 방식이다.

플러스 사이즈 마네킹의 등장은 이른바 지구촌에 불고 있는 ‘보디 포지티브’(Body Positive·신체 긍정) 운동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해석됐다.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드러내고, 보여주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편견을 갖지 말자는 캠페인이다. 2010년대 초중반부터 전 세계에 강하게 재연되고 있는 페미니즘의 맥락이다. 

보디 포지티브 운동에 대한 여성들의 긍정은 인스타그램에 그대로 나타난다. ‘#body positive’ 라고 쳐보면 놀랍다. 무려 1000만 장이 넘는 게시물이 뜬다. 거의 전 세계 모든 나라 여성들이 참여했다. 이건 몰카가 아니다. 뚱뚱한 여성들이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수영복이나 일상복 차림의 셀카를 당당하게 보란 듯이 올렸다. 보디 포지티브 캠페인은 꼭 체형만이 아니라 장애, 흉터, 성정체성 등도 포함한다.

보디 포지티브 운동이 긍정적으로 확산되자 패션의류 업계도 변화의 바람에 올라타 그 분위기를 리드해가고 있다. 매출 전략이든, 페미니즘에의 동조이든 패션계에는 모델이나 광고, 디자인 등에서 전례 없는 변화들이 시작됐다.  

지난 2월 24일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애슐리 그레이엄.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EPA,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 2월 24일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애슐리 그레이엄.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EPA,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애슐리 그레이엄. 키 175㎝에 80㎏이다. 더블엑스라지 몸매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이다. 세계적 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2016년 수영복 특집호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그녀는 2017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모델이 됐다.

그녀는 ‘두꺼운 허벅지가 생명을 구한다(#thickthighsaveslives)’는 해시태그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자신을 본 딴 바비 인형까지 나왔는데, 제작사에 인형의 허벅지가 서로 닿아야 한다는 요구를 했다. 한번은 다이어트를 하고 조금은 날씬한 몸으로 나타났는데 팬들이 실망하고 외면했다.

위니 할로우. 캐나다 출신으로 입 주변과 가슴, 둔부 등에 큰 백색 반점을 가진 백반증 환자다. 주변의 따돌림과 차별적 시선을 못 견뎌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자기 사진을 올렸다가 우연히 발탁돼 무대에 섰다. 지금은 탑 클래스 모델이다.

빅토리아 시크릿. 20년간 섹시한 란제리 패션쇼를 전 세계에 중계하며 속옷에 대한 환타지를 심어준 최고의 속옷 브랜드다. 1~2년 전부터 주가와 시장점유율이 크게 하락했고 50개 이상의 매장을 폐쇄했다. 패션쇼 TV 중계도 중단하고 새로운 전략을 찾고 있다. 탈코르셋 분위기에 맞춰 착용하기 편한 브라렛도 만들고 있다.

구찌. 지난해 9월 새로운 립스틱 콜렉션을 공개했다. 그런데 웃고 있는 광고 모델은 치아가 몇 개 빠지고 치열이 고르지 않은 여성이었다. 여성용 면도기 브랜드인 빌리의 광고는 모델이 겨드랑이 털을 드라이기로 말리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모델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털을 갖고 있다. 심지어 여성일지라도.”

전문가들은 이 사회가, 그리고 대중문화가 그동안 주지하고 강요하고 칭송해온 획일화한 미적 기준에 대한 반발이 시작됐다고 분석한다. 물론 날씬한 몸매를 꿈꾸지 않는 여성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과 돈과 노력을 퍼부어 그 이상을 실현하기 어렵다면, 차라리 친근하고 동질감이 있고 자기 스스로 당당한 게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빅 사이즈 모델 애슐리 그레이엄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완전한 몸매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이즈와 형태가 어떻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그건 하나의 권리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당당한 것이 섹시한 것이라고. 당당함이야말로 가장 매혹적이다.”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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