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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욱, 당신이 그립습니다

2020.05.29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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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치기 시작한 3월 말, 신문에서 매우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마이클 라이언 세계보건기구(WHO) 긴급준비대응 사무차장이 기자회견에 앞서 한 대형 초상화 앞에 서 있는 사진이다.

사진의 배경은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의 전략보건운영센터(Centre for Strategic Health Operations, 약칭 SHOC). 벽에 걸린 초상화 속 인물은 반듯한 정장 차림에 시선을 위로 약간 치켜든 채 결의에 찬 듯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주인공은 우리가 한동안 잊고 있던 사람이었다. 국제기구 수장이 된 최초의 한국인, 전 세계의 추앙과 존경을 받았던 인물, 바로 이종욱(1945~2006) 전 WHO 사무총장이었다. 라이언 사무차장은 그가 재임 시절 발탁한 인물이었다.

마이클 라이언 WHO 긴급준비대응 사무차장이 3월 20일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의 전략보건운영센터에 걸린 고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 초상화 앞에 서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마이클 라이언 WHO 긴급준비대응 사무차장이 3월 20일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의 전략보건운영센터에 걸린 고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 초상화 앞에 서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SHOC는 WHO 본부의 핵심이다. 일명 ‘워룸(War Room)’으로 불리는 이곳은 비상상황에서 가동하는 WHO의 핵심 컨트롤 타워다. 365일 24시간 세계의 전염병 정보가 이곳으로 모이고 전문가들이 즉각적인 대응 전략을 세우는 곳이다. 사무실 중앙 대형 모니터의 세계지도에는 실시간으로 각국의 감염병 발생 현황과 의약품과 의료물자 지원 현황이 뜬다. 

이 방의 정확한 명칭은 ‘JW Lee SHOC’다. 즉 ‘이종욱 전략보건운영센터’인 것이다. WHO는 왜 이토록 중요한 방에 머리 검은 동양인의 이름을 헌정했을까.

2003년 1월, 이종욱 WHO 결핵국장은 각국에서 추천한 80여 명의 후보와 7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WHO 제6대 사무총장에 선출된다. 아시아인으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였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는 취임 두 달 전인 5월 새로운 감염병 대유행을 경고하며 위기관리 조직을 신속하게 만들도록 지시했다.

“새로운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 사스 발발로 인한 위기는 WHO가 감염병 창궐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을 조율하는 핵심 역할을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줬다. 사스는 글로벌 질병 감시 체계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감시와 대응은 아주 신속해야 한다.”

그러나 본부 내부에선 막대한 비용(500만 달러, 60억 원)과 감염병 재발의 불분명함 등을 들어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이 총장은 센터의 중요성을 끝까지 확신하고 밀어붙여 2004년 말 완공했다. 그게 지금의 SHOC다.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30분 안에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열 수 있다.

사스 후에, 신종플루,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발병 때 이 센터는 전 세계에 그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 코로나19가 닥친 지금의 세상에서도 당연히 가장 주목받는 곳이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현 WHO 사무총장은 이 센터를 떠나지 못한다.

이종욱은 그러나 임기 5년 가운데 2년이 채 못 된 2005년 5월 22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바로 세상을 떴다. WHO 총회 준비에 매달리다 과로로 쓰러진 것이다. 전 세계는 ‘세상에서 가장 큰 의사’를 잃었다며 슬퍼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오늘 세계는 위대한 인물 하나를 잃었다”고 추모했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는 수백만 명의 건강을 위한 최고의 보건 책임자였다”고 기렸다. 그리고 그가 만든 방의 이름 앞에 ‘JW Lee’가 헌정됐다.

그가 이끌던 WHO는 진정한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그는 23년간 WHO에서 일하며 한센병과 결핵과 소아마비, 에이즈, 조류독감 퇴치에 힘쓰며 혁혁한 성과를 냈다. 예방백신국장 시절에는 소아마비 백신을 보급해 재임 1년 만에 유병률을 세계 인구 1만 명당 한 명 이하로 낮췄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그에게 ‘백신의 황제(Czar of Vaccine)’ 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의 재임 시절 지구상에서 소아마비를 사실상 퇴치한 것은 공중보건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질병의 현장, 의약품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 그에겐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빌 게이츠는 이종욱을 믿고 WHO에 7억 5,000만 달러(약 9,000억 원)를 기부했다. 그는 감염병 대응의 교과서 같은 인물이었으며 오랜만에 나타난 세계의 진정한 보건 리더십이었다.

“동물을 매개체로 하는 가공할 만한 전염병이 조만간 닥쳐올 것이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수백만 명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사스는 21세기 최초의 새로운 질병이지만 마지막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 세계 전염병 발생 경보 및 대응 체제를 즉시 확대하고 강화해 나가야 한다. 앞으로 생겨날 치명적인 새로운 전염병들에 대한 대응책을 강화해야 한다.”

그의 예언적 발언들이다. 2005년 10월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저의 경고는 나중에 희생자 숫자가 예상보다 적어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지금 사람들에게 그 위험성을 널리 알려 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국가와 정치 지도자는 뒷감당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생 자기 명의의 집 한 채 없이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WHO가 쓰는 돈에는 가난한 나라가 낸 분담금도 섞여 있으니 아껴야 한다”며 비행기 일등석을 한 번도 타지 않았다. 보건기구 책임자인 만큼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며 소형 하이브리드차를 몰고 다녔다. 사무총장에게 주어진 거의 모든 특혜를 거절했다.

지금 코로나19 대응의 최전선에 있는 권준욱 국립보건연구원장은 2003년 9월부터 2년 반 동안 보건복지부에서 WHO 본부에 파견돼 그의 밑에서 일한 사람이다.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종욱은 한양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다가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며 서울대 의대로 다시 진학했다. 1976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러 경기도 안양의 성라자로마을에 갔다가 이곳에서 자원봉사하던 일본 여성 가부라키 레이코(鏑木玲子)를 만나 청혼에 성공했다.

1979년 미국 유학을 떠나 하와이주립대 대학원에서 공중보건학을 공부했다. 1983년부터 남태평양 사모아에서 가난한 환자들을 돌봤고 피지의 WHO 남태평양 지역사무처에서도 일했다. ‘아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린 그를 WHO가 제네바 본부로 불러들였다. 본부에서 중요한 보직들을 맡으면서 그는 곧바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가 간 지 14년, 그가 경고한 대로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앞에서 WHO의 리더십이 불신을 받고 흔들리고 있다. 그 핵심에 미국 최대 청원사이트 체인지닷오르그에의 사퇴 청원이 100만 명을 넘긴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이 있다. 

그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선언 직전까지 소극적 태도와 늑장 대응, 바이러스 발원지인 중국을 두둔하고 중국의 기여금에 휘둘리는 태도, 정치적 편향 발언 등 갖가지 잡음과 논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일찍 세상을 떠난 이종욱이 더욱 그립다.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을 진작 예상하고 착실하게 준비해온 그가 아쉽다. 전문성과 리더십과 추진력과 인간적 소탈함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존경받던 그가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물론 아직도 WHO 사무총장은 아니겠지만 불과 75세밖에 안 됐을 그가 지구촌과 그리고 조국 대한민국에 큰 힘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고개를 든다.

우리나라 의료진의 불철주야 노고에 고개를 숙인다. 방역당국의 지침을 잘 따른 착한 국민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굳게 믿는다. 세계적 모델이 된 우수한 K방역에 찬사를 보낸다. 정 본부장을 WHO 사무총장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어찌 보면 이 모든 뿌리가 바로 이종욱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종욱, 기억에서 잊힌 그를, 그의 자세와 정신을 2020년 오늘 소환하고 싶다.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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