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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를 일기로 요절한 쓸쓸하고도 짧았던 삶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소설가 김유정

2020.06.19 이광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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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그만 아찔하였다.’   

나의 몸뚱이에 겹쳐 쓰러진 것은 점순이다. 첫사랑이 점화하는 순간은 이와 같이 아찔하다. 그러나 열일곱씩이나 된 것들이 수군수군하고 붙어 다니면 동리의 소문이 사나워진다고 어머니는 주의를 주었다. 내가 점순이 하고 일을 저질렀다가는 점순네가 노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땅도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게 되는 것이다. 점순네는 마름이고 우리는 소작이다. 김유정의 ‘동백꽃’에서 사랑은 그저 싹트다가 마는 풋사랑이다. 동백꽃의 연작 ‘봄봄’에서 나는 점순네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3년 넘게 머슴을 살았는데 혼례를 올려주지 않는다. 데릴사위를 미끼로 새경도 주지 않고 일만 부려먹는 장인의 농간, 그의 수염을 잡고 한바탕 몸싸움을 벌이지만 결국 혼례는 올리지 못한 채 끝난다. 이 두 작품은 김유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들이다. 끝내 사랑에 이르지 못한 작품 속 ‘나의 사랑’은, 두 여인을 사랑했으되 끝내 사랑에 이르지 못한 현실 속 ‘김유정의 사랑’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아 애절하다.  

경춘선 김유정역.
경춘선 김유정역.

춘천역 두 정거장 못가 김유정역이 있다. 차를 몰고 가지 않더라도 수도권 전철 경춘선을 타고 느릿느릿 가면 좋을 한나절 길이다. 1939년 신남역으로 개설되었는데 2004년 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 인명이 역명이 된 것은 철도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역에서 10분 걸어가면 떡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실레마을, 김유정의 고향이 나온다. 이곳이 그의 생가와 기념 전시관, 봄봄 극장, 이야기집, 소극장, 민속공예 체험방 등이 모여 있는 ‘김유정 문학촌’이다.

생가 초가가 단아하다. 마당에는 연못과 정자가 있고 외양간과 디딜방아도 복원되어 있다. 전시관 한 가운데 그의 소설 ‘봄봄’이 커다란 책 형상으로 펼쳐져 있다. 방을 빙 둘러 오른쪽부터 김유정의 한 생이 그려져 있는데 그 한 바퀴가 짧다.

김유정은 1908년 부잣집에 태어났으나 7세에 어머니를,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모성결핍증에 말을 더듬었다. 서울 재동공립학교와 휘문고보를 졸업했다. 이듬해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했으나 중퇴했다. 김유정은 그 즈음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의 첫사랑 박녹주이다. 그는 2년 동안 광적인 구애를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녹주가 네 살 연하 사내의 마음을 알아주었을리 만무하다. 김유정은 그 짝사랑으로 결석이 잦아 제적당한다.

실의에 빠진 김유정은 고향으로 돌아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그는 나이 많은 들병이들과 어울리고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눈다. 1932년 실레마을에 금병의숙을 세워 야학을 하며 글을 가르치고, 청년들과 문맹 퇴치운동을 벌인다. ‘동백꽃’, ‘봄봄’, ‘솥’,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등 12편의 작품이 이 때를 배경으로 쓰여졌다.

그는 1935년 단편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에,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후기 구인회의 일원으로 이상과 교분이 깊었다. 그 무렵 두 번째 사랑이 온다. 박봉자, 시인이며 용아 박용철의 동생이다. 1936년 잡지 ‘여성’에 김유정과 박봉자의 글이 나란히 실린다. 그것을 인연으로 그는 그녀에게 30여 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녀의 답장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녀는 김유정과도 친분이 있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했다. 이 무참한 사랑에 김유정은 다시 한 번 좌절한다.

김유정 기념전시관.
김유정 기념전시관.

그는 끊임없이 작품을 썼다. 1935년 ‘금 따는 콩밭’, ‘떡’, ‘산골’, ‘만무방‘, ‘봄봄’을, 1936년 ‘산골 나그네’, ‘봄과 따라지’, ‘동백꽃’을, 1937년에는 ‘땡볕’, ‘따라지’ 등을 발표했다.

김유정이 작품을 쓴 기간은 3년여에 불과하다. 그 짧은 기간에 단편소설 30여 편과 미완성 장편 1편, 그리고 소설 1편을 번역했다. 그는 폐결핵에 시달리다가 1937년 경기도 광주 매형의 집에서 29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죽기 직전 휘문고보 단짝이었던 소설가 안회남(본명 필승)에게 글을 남겼다. 그 글이 유서와 같은 마지막 글이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돈 백 원을 만드는 일을 네가 알선해 준다면)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어야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조실부모하고 병약했으며, 사랑에 두 번 좌절하고 들병이들과 사랑을 나누었으며, 폐병과 불면증과 치질에 시달렸고, 이집 저집 전전하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유정. ‘그 쓸쓸하고도 짧았던 삶’이라는 제목이 전시관에 달려있다. 그의 작품은 말이 질박하고 해학이 전면에 흐른다. 그 지독한 삶을 살면서도 어찌 늘 웃음을 잃지 않았는지, 그 대목이 애절하다. 김유정은 계몽주의 소설이 쓰여지던 시대에 살았으되, 이광수과 같이 민중을 가르치려 들지 않고 민중의 삶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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