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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자연경관’ 내 고장, 제주도의 재발견

한혜경 여행작가

2011.12.19 한혜경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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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정으로 제주도를 여행하던 시절, 나는 제주도에 별다른 애착을 갖지 않았다. 빡빡한 일정으로 제주도를 훑고 다녔으니 아름다움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어머니 치마폭 같은 한라산 자락에 거처를 마련하고 짧게나마 살아보고 나서야 제주의 진가를 알 것 같았다. 시시때때로 제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제주의 자연, 제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문화, 그리고 신선하고 풍성한 식재료들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이 세가지가 합을 이루었을 때 제주가 가장 아름답게 빛을 발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제주에는 계절마다 보고, 먹고, 즐길 장소가 따로 있다는 소리다. 제주의 자연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을 기다려 그것을 만끽할 공간을 찾아 다니는 것은 제주 생태여행의 핵심이자 즐거움이다.

언젠가부터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면 마음은 이미 모슬포에 가 있다. 모슬포는 해발 187미터의 야트막한 모슬봉과 가시악을 등지고 선 제주도 서남단 대정읍의 항구다. 마라도와 가파도로 가는 정기선이 출항하는 곳이기도 하다. 겨울이면 마음이 이곳으로 향하는 까닭은 단 하나. ‘방어’ 때문이다. 산란기가 2~6월인 방어는 지방이 오르는 11월부터 제철을 맞는다. 모슬포 앞바다의 거친 물살에 단련된 방어는 육질은 탱탱하고 씹는 맛이 좋다.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면 조용하던 모슬포 선창가도 활기를 띤다. 대중목욕탕의 욕조처럼 커다란 수조 속에서 힘차게 헤엄치는 대방어를 구경하고, 입안 가득 고소함이 퍼지는 방어회로 미각을 충족시키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가 되면 제주도 어디에서도 방어를 맛볼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모슬포를 고집하는 것은 이곳이 방어 유통의 중심항이기 때문이다.

모슬포를 나서면 언제나 발걸음은 송악산을 향한다. 추사적거지, 수월봉, 고산포구 등 모슬포 인근에는 가 볼만한 곳들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모슬포에서 동쪽으로, 오른편에 바다를 끼고 걷는 기분은 남다르다. 푸른 바다와 너른 대지가 교차하는 풍광 속으로 뻗은 길은 송악산으로 이어진다. 걸어서 5킬로미터 남짓, 1~2시간이면 걸을 수 있다. 길의 왼편, 너른 평야는 아픔이 깃든 땅이다. 일제강점기 때 제주사람들이 강제노역으로 끌려 나와 조성한 지하벙커와 알뜨르 비행장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1930년에 조성된 이 비행장은 현재 감자와 마늘을 기르는 농지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밭 사이사이 둔덕처럼 봉긋하게 솟은 비행기 격납고 20여 개는 여전히 그 곳을 지키고 있다.

송악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제주도. 왼쪽 종모양으로 볼록한 것이 산방산이고, 멀리 구름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한라산이다. 오른쪽에 나란히 뜬 것은 사이 좋은 ‘형제섬’이다.
송악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제주도. 왼쪽 종모양으로 볼록한 것이 산방산이고, 멀리 구름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한라산이다. 오른쪽에 나란히 뜬 것은 사이 좋은 ‘형제섬’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알뜨르 비행장에서 전투기를 띄워 중국 난징을 폭격했고, 아카톰보(빨간 잠자리)라 불리던 훈련기들을 이 둔덕 같은 은폐용 격납고에 숨겨두었다. 해방 이후에도 아픔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비행장 옆 ‘섯알오름’은 제주 4.3사건 당시 200여명이 집단으로 학살을 당한 장소다. 한국 근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지만, 풍경만큼은 너무나 평화로와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 진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다시 바다 옆으로 난 길로 나서면, 송악산의 옆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잘 구어진 페이스트리처럼 층층으로 쌓인 퇴적층이 바다를 향해 뻗어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과 어우러진 그 풍경은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연방 터지는 감탄사를 삼키며 고개를 넘으면 송악산 입구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어린 아이도 살살 걸어서 올라갈만큼 평탄하고 경사도 완만하다. 바다로 접한 송악산의 해안절벽에는 15곳의 참호가 뚫려 있는데, 이곳 또한 태평양 전쟁이 남긴 상흔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송악산의 전망대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었다. 지금은 입구에서 차량을 통제해 걸어서 올라가야 하지만, 예전엔 우울하거나 가슴이 답답한 날이면 이곳으로 차를 몰곤 했다. 전망대에 서면 제주도 남단의 드넓은 해안선이 시야에 가득 찬다. 그 풍경에 가슴 저 아래에서 시원한 용천수처럼 쾌감이 솟아올랐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여러 번 송악산에 올랐지만, 나는 특히 겨울 송악산이 아름답게 기억된다. 조금은 황량한 느낌도 좋았고, 해풍에 나부끼는 억새에서 풍기는 제주의 겨울 감성도 맘에 들었다.
 
송악산으로 오르는 길. 방목하는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송악산으로 오르는 길. 방목하는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송악산은 기생화산이다. 한라산을 제외하면 좀처럼 ‘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 제주에서 ‘오름’이 아닌 ‘산’으로 불리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 심어놓은 곰솔밭을 제외하고는 우거진 숲도, 다양한 식생들도 없는 산이다. 그래도 이곳이 매력적인 것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한 2중 분화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송이’라 불리는 화산 부스러기들을 사각사각 밟으며 산정에 오르면, 둘레 400미터의 작은 분화구를 품은 거대한 분화구를 내려다볼 수 있다. 깊이 패인 분화구 내부는 사람들이 범접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물 빠짐이 좋은 땅의 성격 때문인지 작은 나무들과 풀들만 주로 자란다.

너른 바다를 향해 산정에 앉으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분화구 안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이나 염소에게도 이곳은 아무런 방해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장소 같아 보였다.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장관이다. 푸른 바다 위에 풀등처럼 뜬 가파도 옆으로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가 항공모함처럼 불룩 솟아 있다.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 국토의 남단을 지키는 든든한 막내둥이 섬들이 사랑스럽다.

모슬포 항구의 ‘방어’로 시작해 송악산에서 절정을 맞은 이 제주여행은 온천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정석이다. 제주의 겨울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진 않지만,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탓에 상상 이상으로 춥다.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날에는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는 것이 최상의 선택. 송악산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인 산방산 탄산온천은 그래서 더 눈길이 가는 곳이다. 탄산수인 까닭에 온천의 원수는 그리 뜨겁지 않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고혈압과 성인병에 좋은 물’로 유명세를 탔던 온천이니, 믿고 몸을 담가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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