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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으로 풀어본 중경 임시정부

[임시정부, 그 길을 가다 ⑮] 중경 임시정부 청사, 한인거주 옛터(토교촌)

2019.04.11 정책기자 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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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상해(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가 8년여의 이동 시기를 거친 후, 1940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였던 중경(충칭)에 터를 잡게 된다.

2019년의 어느 날,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2019년의 어느 날,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1940년부터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마지막 5년을 보낸 중경 시기의 임시정부는 더욱 특별하다. 가장 활발히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좌우합작이 이루어졌고,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으며, 조국의 광복 소식을 들었다. 

중국에서 만난 정다운 한글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에서 만난 정다운 한글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중경 임시정부 청사(연화지)를 걷는데, 1940년대로 돌아간듯 눈앞의 빛이 바래졌다. 당시 임정 요인들에게는 없었을 스마트폰이 내 손에는 들려 있었다. 그래서, 중경 시기 임시정부의 주요 사건을 인스타그램 식으로 풀어 보기로 했다.(인스타그램 사진은 직접 제작) 훗날 내가 중경 시기 임시정부의 SNS 담당자였다고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1. 좌우 연합정부가 이뤄지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 지원 조건으로 여러 차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 통합을 요구해왔다. 민족주의자였던 김구와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던 김원봉은 조국 독립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특히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임시정부 중경 시기, 중국 국민당 정부는 연합국에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서는 좌우합작을 해야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진통 끝에 1942년 김원봉이 주도적으로 이끌던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좌우 연합정부를 이루게 된다.

2. 광복군을 창설하다

 
 
  

임시정부에는 병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타국 땅. 중국군사위원회는 군사 지휘권을 중국이 갖는다는 조건을 걸었고, 임정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단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중경에서 독자적으로 광복군을 창설했다.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직할군대였다.

처음에는 머리만 있는 총사령부만 구성된 채 시작했다. 창설된 지 1년 만에 300여 명의 병력을 갖추게 된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임시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광복군이라는 병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1945년에는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에서도 완전히 벗어나면서 임시정부가 통수권을 가졌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고, 명령만 내리면 국내로 들어가려던 찰나, 조금 빨리 온 광복으로 진공작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3. 조국의 광복 소식을 듣다

 
 
 

“일본이 무조건적으로 동맹국에 투항했다는 소식이 충칭에 도착한 것은 오늘 10일 저녁 8시쯤이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 오며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가슴이 뛰고 너무 어지러워 자리에 가서 잠시 누워야 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패망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제시의 일기 중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 - 백범일지 중

일본의 항복은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너무 빨랐다. 이미 준비해온 한국광복군이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으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4. 고향 땅을 밟다

 
 
 

갑작스러운 해방에 애초 계획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김구는 국내에서 과도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임시정부가 정부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는 환국 전까지 바쁘게 움직인다. 중국 내 교포 문제, 한국광복군 확대 문제 등을 처리했다.

중국 내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본격적인 환국 준비를 한다. 마침내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경 연화지 청사 계단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그 유명한 계단 사진이다. 미국이 준비한 비행기의 자리가 부족해 요인들은 나뉘어 귀국한다. 김구, 김규식 등 1진이 탄 비행기는 11월 23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한다. 하지만 환영 인파는 없었다. 미군이 임시정부의 환국을 극비리에 진행한 탓이었다.

1940년대에서 다시 2019년으로 돌아온다. 중경 임시정부 청사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이 거주했던 토교촌은 잡초로 무성한 채 그 옛터만 남아 있었다.

지금은 비석만 남은 옛터
지금은 비석만 남은 옛터
 
27년 간의 그 긴 세월을 5박 6일 동안 압축적으로 느꼈다. 동행한 박광일 여행작가는 임시정부에 대해 “위대한 시작, 위대한 미완성”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위대한 미완성을 위대한 완성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앞으로 100년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김소희
정책기자단|김소희hssholet@naver.com
저는 하고 싶은 걸 어떻게 다 하고 살 수 있을지가 고민이에요. www.sohe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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