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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3·1운동, 평민이 역사의 주체로…독립운동의 대중화 이끌다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연속 기고] ② 민주주의 구현한 독립운동의 정신

2019.02.28 장석흥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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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흥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
장석흥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
2백만 명 이상이 참가한 3·1운동의 중심에는 평민이 있었다. 나라가 망할 때까지 피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평민들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이를 두고 백암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혈사(1920)’에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그 시원으로 갈파한 바 있다. 그는 3·1운동에서 천도교가 나선 것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못이룬 혁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했다.

실제로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린 15명의 천도교 대표 가운데 동학농민군 출신이 10여 명에 달했다. 2,30대 청년시절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했던 이들이 5,60대에 이르러 3·1운동에서 민족대표로 나선 것이다.     

도산 안창호 역시 동학농민전쟁과 개화개혁운동을 3·1운동의 연원으로 삼았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백범 김구는 동학에서 비롯해 의병과 계몽운동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족혁명과 독립운동을 온 몸으로 실천한 산증인이었다.

개신교 측의 민족대표 가운데는 독립협회나 신민회 등 개화개혁 및 계몽운동에서 활동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역시 3,40대에 개화개혁,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3·1운동에 이르러 민족대표로 나선 것이다. 서구적 문명을 수용한 이들은 동학농민전쟁과는 서로 다른 이념과 노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이념과 노선을 초월해 민족적 결합을 이룬 것이다. 3·1운동은 종교 이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 노선과 이념까지 초월한 민족 총화의 광장이었던 것이다. 3·1운동의 뿌리는 이렇듯 깊고 다원했다. 이들의 목표는 대한제국의 회복이나 복국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에 나선 평민들은 ‘제국’이 아닌 ‘민국’의 건설을 꿈꾸어 나갔다. 그것은 민족혁명의 진전이자 역사의 발전이었다.

3·1운동에는 남녀노소는 물론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도 없었다. 지역적으로도 국내 뿐 아니라 한인이 사는 곳이면 만주·미주·연해주 등 해외 어느 곳이든지 하나가 돼 만세운동을 벌였다. 종교계와 학생이 앞장서고, 농민과 노동자가 군중을 이루며, 어린이·걸인·기생까지 동참하면서 만세운동은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그 과정에서 평민들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주체로 떠올랐다.

3.1절 100주년을 앞둔 지난 24일, 역사 타방을 위해 충남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태극기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3.1절 100주년을 앞둔 지난 24일, 역사 타방을 위해 충남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태극기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3·1운동은 단순히 일거에 일어난 만세시위가 아니었다. 종교계가 이념을 떠나 하나로 결집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종교적 배타성이 강한 서구적 시각에서 본다면 종교 이념을 초월해 민족 독립을 외쳤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다종교 민족인 한국에서 종교의식이 민족의식보다 앞섰다면 3·1운동의 일원화와 총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계사에서 보듯이, 서구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기나긴 종교전쟁을 치러야 했고, 인도는 종교 간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힌두교의 인도, 이슬람의 파키스탄, 불교의 스리랑카 등으로 민족이 분리될 만큼 종교적 배타성이 민족성을 압도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민족 독립을 위해 종교 이념도 뛰어넘는 특유의 힘을 발휘했다. 이는 3·1운동을 기획한 종교 대표들만이 아니라 대중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중앙의 지도자들은 물론 지방에서도 천도교 신도들과 기독교 신도들이, 또는 불교 승려와 기독교 전도사들이 한데 어울려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들에게 종교는 민족 독립을 위한 길에서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었다. 3·1운동에서 보여준 종교적 총화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한국 민족주의의 특질 그 자체였다.  

만세운동의 대중화는 독립운동계를 일신하는 기폭제가 됐다. 1910년대만 해도 독립운동을 선각자의 몫으로 보는 시각이 컸지만, 대중의 물결이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것이다. 독립운동이 대중화되면서 독립운동의 이념과 조직도 새롭게 정비됐다. 3·1운동 전까지는 구시대적 이념에 의한 독립운동이 잔존했으나,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하면서 사상과 이념도 근대적으로 변모했다.

3·1운동을 거치며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며 민주공화정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이처럼 3·1운동의 물줄기는 구시대와 신시대를 구분 짓는 분수령이었다. 이제 백성은 군주를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 것이다.

3·1운동에서 여성의 참가는 역사 발전의 측면에서 특히 괄목할 것이었다. 집밖 출입조차 제한됐던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은 전통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없는 일이었다. 도시는 물론 농촌에서도 아낙네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은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던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3·1운동을 통해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을 돕는 종속적 위치가 아니라 스스로 독립운동의 주체로 떠올랐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초안한 ‘헌법’에서 여성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다.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던 영국에서 1927년에 가서야 여성이 보통선거권을 가졌던 것에 비하면 혁신 중의 혁신이었다. 3·1운동은 만세운동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한국의 민주주의를 촉진시켜 갔던 것이다.

3·1운동에서 내세운 정의와 양심, 자유와 독립, 인도와 평화는 곧 한국 독립운동의 정신이었다. 독립운동의 이념이나 방략이 다원해지고, 대중의 참여로 독립운동의 폭과 넓이도 크게 확산됐다. 3·1운동의 정신과 경험을 계승한 민족 총력의 독립운동이 전개된 것이었다. 3·1운동은 그렇게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대한제국으로 망한 나라를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세운 것이 독립운동이고,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구현한 것도 독립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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