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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과 월드컵 그리고 스포츠의 정치학

2006.07.05 윤종석 주독일 홍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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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 월드컵도 종반을 향해 가고 있다. 2006 독일 월드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그리고 축구에 대한 그 엄청난 열광과 환호를 지켜보면서 스포츠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된다.

월드컵과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지구촌 스포츠 축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가 성공적으로 치러낸 88서울올림픽과 2002 한·일 월드컵은 우리에게 그리고 지구촌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을까?

필자가 80년 초에 대학을 다닐 때, 88올림픽과 86아시안 게임의 화려한 구호는 당시 정권의 비민주성을 포장하는 최고의 프로파겐다(선전)였다. 그 때문에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나 학생들은 88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맹목적으로 반대하고 필자 역시 그랬던 것 같다.

88서울올림픽 개막식.


88년 서울올림픽의 양면성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단순히 결과만 놓고 보면, 당시 전두환 정권의 본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 두 행사가 오히려 한국의 민주화와 개방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정권은 올림픽이란 국제적인 행사를 유치한 마당에 민주화 요구를 마냥 무력으로만 탄압할 수 없다는 자가당착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는 1983년 올림픽 유치를 신청하기 전 당시 문공부가 청와대에 올린 올림픽 유치 검토 보고서에서도 지적된 바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 올림픽을 통해 적어도 서울만은 현대적인 도시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지방은 제외됐지만 적어도 올림픽을 직접 개최한 서울을 중심으로 국제화를 위한 인프라(공항, 지하철, 올림픽 기반시설 그리고 올림픽 준비를 통한 국제적 경험의 축적 등)가 구축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인프라는 90년대 전세계적 추세인 세계화를 위한 준비의 발판이 되었다.

동·서 화해의 장이 되었던 서울올림픽


나아가 동구권의 해체와 냉전 종식에 촉매 역할을 한 1988년 서울올림픽의 국제정치적 측면에서의 성과 역시 높이 평가된다. 서울올림픽이 구 동구 공산권 해체에 기여했다는 것은 당시 올림픽이 끝난 후 한 외국 정치학자의 학술 논문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80년대 초 지구촌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이 미국과 소련의 체제 경쟁으로 얼룩졌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각각 공산권과 자본주의 국가 진영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반쪽짜리 올림픽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88년 서울올림픽은 자연스럽게 두 진영의 화해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리고 서울올림픽은 그러한 역할을 해냈다. 전두환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공산권 수장인 고르바초프도 서울 올림픽 경기가 전 사회주의 국가에 중계되어 소련과 사회주의 체육의 우월성을 확인시켜주기를 원했다. 그 덕분에 철의 장막에 가려졌던 동구권에도 올림픽 경기와 주변 소식들이 컬러TV로 중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올림픽 유치가 권위주의 종식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 왔듯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도 반대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까지 동유럽 공산국가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가난한 나라이자 공산 세계보다 한수 아래라고 간주되었다. 그런데 직접 TV를 통해 한국의 발전상과 적국’인 당시 소련을 응원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동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체제와 기존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갖는 하나의 계기가 되고, 그 다음 해부터 동구권을 휩쓴 민주화 혁명에 간접적이지만 상당부분 기여했다는 분석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은 서울올림픽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도 내부적으로 그 덕에, 또 그런 자신감을 토대로 90년 초반부터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또 서울올림픽의 국제적 경험을 통해 냉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적 조류인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건과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로 하나 된 지구촌


그렇다면 2002년 월드컵은 세계인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2002 월드컵 응원에서 보여준 대한민국 국민들의 뜨거운 열정은 전세계인의 주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2002년 월드컵은 국내적으로 90년대 말 한국경제의 위기와 국민적 자신감 상실의 상황에서 맞이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88서울올림픽 때와는 다른 상황에서 열렸다. 올림픽은 서울 한 곳에만 개최되었는데, 월드컵은 일본과 분산 개최했어도 서울과 주요 지방도시에서도 경기가 치러졌다. 그로 인해 한국 전역이 월드컵을 통해 비로소 세계화의 수준에 맞는 사회적 인프라와 국민적 의식을 구축할 수 있었다.

아울러 2002년 월드컵 경기 결과를 보면, 한국과 터키 등 축구 약소국이 4강에 올라가는 이변을 보였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선전도 인상적이었다. 8강과 4강에 오른 팀에 전통적인 축구 강국인 유럽과 남미 외에 한국과 터키도 끼어 있어서 그야말로 2002년 월드컵은 축구 수준의 ‘세계화’ ‘평준화’로 특징져진다.

2002년 월드컵은 ‘축구를 통한 세계화’를 가장 잘 보여준 대회였다. 지구촌 곳곳에서 역대 최다의 시청자들이 월드컵이 열리는 한 달 내내 축구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필자의 기억으로는 티베트의 승려들도 위성 안테나로 월드컵을 즐겼다.(이것은 헐리우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가장 폐쇄적인 북한도 한국 경기를 포함한 월드컵 주요 경기를 녹화 중계했다. 그럼으로써 2002년 월드컵은 그야말로 ‘축구의 세계화’와 ‘축구를 통한 세계화’를 동시에 이루는데 기여했다.

2002년 월드컵, 세계화 그리고 애국심


또한 2002년 월드컵은 90년대말 경제위기후 침체된 국가분위기를 일신하는데 기여했다. ‘붉은 악마’로 상징되는 한국의 질서있는 응원문화, ‘대~한민국’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애국심 열풍’은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로 확 바꿔놓았다.

원래 축구와 월드컵 자체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애국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미 일제시대 축구는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을 공식적으로 이길 수 있는 통쾌한 기회였다. 중남미 어떤 나라에서는 축구 경기 결과를 놓고 국민감정이 악화되어 전쟁도 불사한 사건도 있다.

그렇지만, 2002년 한국인들이 월드컵에서 보여준 애국심은 적어도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아니었다. 월드컵을 통해 한국은 한국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라는 단어는 유럽 통합을 이룬 유럽 선진국에서는 19세기의 촌스러운 낡은 개념이다. 따라서 언론과 지식인들의 평가는 항상 인색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당시 서구 언론들이 한국의 응원문화를 선진적이고 모범적으로 평가한 것은 한국의 응원단은 서구의 훌리건과 다른 훌륭한 볼거리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칫 배타적인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로 치우칠 위험이 있는 민족주의적 애국심을 한국인들은 그와 정반대되는 개념인 세계화(글로벌화)에 모순되지 않게 실천했기 때문이다.

3일 월드컵 4강전(프랑스-브라질)을 앞 둔 뮌헨에서 만난 독일의 대표적 석학 울리히 벡 교수도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벡 교수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유럽연합을 통해 ‘코즈모폴리턴 드림’을 추구하는 유럽인들조차도 한국의 다소 ‘애국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응원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애국심’은 비록 한·중·일 간에 민족주의적 경쟁의 위험이 있기는 하나 나쁜 의미에서의 전근대적인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한국처럼 너무나도 다이내믹한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를 건너 뛰고 바로 글로벌 사회로 진입한 나라에서는 급격한 사회 변화와 글로벌화로 정체성 문제가 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2002년 월드컵은 바로 그런 한국인들에게 ‘정체성 문제’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소위 반성적 근대화라는 또 다른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는 성찰의 기회였다는 분석이다.

(울리히 벡 교수는 글로벌화와 그에 동반하는 위험성을 학문적으로 성찰하는 학자로서, 영국의 사회학자 앤소니 기든스와 마찬가지로 ‘반성적’ 혹은 ‘또 다른’ 근대화론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2007년 국정홍보처 초청으로 방한 예정이다).

하지만 밖에서 지켜보는 한국의 상황은 가끔은 배타적 애국심이 넘쳐나면서 쓸모없는 국력의 낭비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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