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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에서 기탄잘리까지(하)

[인도에 관한 사실들 ⑦] 인도 문학

2007.10.10 주 인도 김승호 홍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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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4세기경 인도를 통일한 굽타왕조 시대에는 문학과 예술방면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 당시의 문학은 종교적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발전된 형태를 이루었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학자들의 우수한 작품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인도의 셰익스피어로 일컬어지는 칼리다사가 쓴 희곡 ‘샤쿤탈라’이다.

인도 고전문학의 걸작 ‘샤쿤탈라’

굽타 왕조 시대의 걸출한 극작가 칼리다사가 쓴 희곡 ‘샤쿤탈라’의 한 장면. 두르바사스 성자의 저주로 왕궁에서 쫓겨난 여주인공 샤쿤탈라의 실의에 찬 모습이 보인다.
『‘샤쿤탈라’는 원래 ‘마하바라타’에 들어있는 내용을 칼리다사가 자신의 뛰어난 솜씨로 각색한 것이다.

‘사냥을 좋아하는 두샨타 왕이 어느 날 사슴을 좇아 히말라야 산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왕은 배고픔과 갈증에 지친 몸을 이끌고 숲을 헤매다가 우연히 성자 칸바가 머물고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마침 집에는 성자가 숲으로 열매를 구하러 나가고 그의 아름다운 딸 샤쿤탈라만이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왕은 자신의 사랑을 그녀에게 고백했다. 망설이는 샤쿤탈라에게 왕은 그녀를 왕국으로 데려가 부인으로 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한 뒤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 후 왕은 샤쿤탈라의 도움으로 길을 찾아 왕궁으로 되돌아갔다. 사랑에 취한 샤쿤탈라는 왕이 돌아간 뒤 실수로 두르바사스 성자에게 무례한 행동을 범하고 말았다. 화가 난 성자는 그녀에게 왕궁으로 돌아간 두샨타 왕이 그녀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말리라는 무서운 저주를 내렸다.

성자의 저주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왕의 애정어린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던 그녀는 직접 왕을 찾아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자의 저주는 사실이 되었고 왕은 그녀가 누구인지 조차 모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정표로 그녀가 준 반지조차 잃어버렸다. 샤쿤탈라는 울면서 두샨타 왕의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했지만 왕은 도리어 그녀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왕국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한 어부가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자르다가 뱃속에서 아름다운 반지를 발견했다. 어부는 반지를 팔려고 시장에 갔다가 수상히 여긴 관리에게 붙잡혀 왕에게 끌려갔고, 그 반지를 본 순간 두샨타 왕은 이전의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샤쿤탈라를 매정하게 내쫓아버린 일을 후회하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신들의 왕인 인드라의 마부 마타리가 왕 앞에 나타나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두샨타 왕은 즉시 하늘나라로 달려가 악마를 물리치고 곤경에 처한 인드라 신을 구해냈다.

그 후 전차를 타고 하늘나라에서 내려오다가 우연히 어느 산속에서 어린 사자와 놀고 있는 사내아이를 발견했는데, 그 아이는 왕이 샤쿤탈라와 숲속에서 나누었던 사랑의 열매였다. 마침 그곳에 나타난 샤쿤탈라를 통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두샨타 왕은 그녀와 아들 바라타를 데리고 왕국으로 돌아와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김형준 저 ‘이야기 인도사’에서 따옴)』

인도 고전문학의 걸작인 ‘샤쿤탈라’는 18세기에 영어로 번역된 이후 여러 나라 말로 소개되었으며 유럽문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과 인간의 신비적 합일을 추구한 박티 문학

중세인도의 문학은 종교적인 믿음과 철학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그때까지 지성인들의 전유물이 되어왔던 산스크리트어와는 별도로 각 지방의 고유 언어인 타밀, 벵갈리, 마라티, 카나다어 등으로도 문학작품이 쓰여지게 된다. 일반 서민들이 보다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소설이나 시에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문학의 주류를 이룬 것은 여전히 신에 대한 헌신을 통하여 신과 인간의 신비적 합일을 추구하는 신앙운동인 ‘박티(Bhakti)'였다. 박티 신앙운동가들은 그들이 실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인격신을 원했고, 실제적인 사랑을 통해 합일과 해탈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신과의 구체적인 사랑의 교감을 강조한 시들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벵갈, 인도 문예부흥의 중심

인도의 근대 종교개혁자로 민족적 복고정신을 강조하고 전통적 신앙옹호에 진력했던 인도의 ‘시성’ 타고르.
중세를 거쳐 1700년대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인도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고 인도 문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서양의 사상, 가치관 등과 함께 소개된 인쇄기술은 인도에 새로운 문예 부흥기를 일구었다. 문예부흥의 중심지는 인도 동북부 벵갈 지방으로 당시 영국의 수도와 문화 중심지가 캘커타(현 콜카타)였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인도의 문예 부흥기는 ‘벵갈 르네상스’라고 불리워진다. 벵갈 출신 작가들이 인도의 전통문화와 서양 사상을 절충한 새로운 문학세계를 개척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역시 벵갈 출신이다. 타고르는 유미적인 시를 쓰면서도 그 바탕에는 민족적 복고정신, 민족 전래의 신앙을 옹호하는 사상이 깊숙이 깔려있었다.

‘시성’ 타고르, 신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노래

타고르는 1861년 캘커타 명문 집안의 열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경부터 시를 썼고 16세에 시집 ‘들꽃’을 내어 벵골의 P.B. 셸리라고 불렸다. 1877년 영국으로 유학하여 유럽 사상과 친숙하게 된 타고르는 귀국 후 벵골어로 작품을 발표하고 또 그 대부분을 직접 영역하기도 했다.

노벨상은 포인트를 적립해서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닌 일종의 로또와 비슷하다는 세간의 냉소적인 비유도 있지만, 타고르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계기는 여러 가지 여건이 잘 맞아 떨어진 측면도 있다. 우선 인도 명문가의 자손으로 큰 어려움 없이 인도의 고전을 섭렵하고 전래의 신앙에 심취하면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와 당대 최고의 지성 타고르의 만남.

또한 ‘벵갈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캘커타에서 인도의 신비하고도 범신론적인 정신을 서구의 새로운 시형과 리듬으로 접목시키는데 성공했다. 타고르는 48세 되는 1909년 벵골어로 출판된 시집 ‘기탄잘리’를 자신이 직접 영역하고 1912년 영국에서 출판함으로써 스스로 성가를 높이는 계기도 만들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기탄잘리’의 빼어난 작품성이라는 뒷받침이 없었다면 노벨문학상 수상 자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탄잘리’는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뜻으로 삶과 죽음, 신을 둘러싼 103편의 연작 종교시가 뼈대를 이루고 있다. ‘기탄잘리’는 현세와 피안의 두 세계를 다룬 것으로 피안의 님을 현세에서 그리며 기도하고 구도하는 성자의 송가이다. “나는 당신을 모든 면에서 보며, 모든 면에서 당신과 교제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당신에게 사랑을 바칩니다.”처럼 신에 대한 경건하면서도 헌신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타고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국을 소재로 한 두편의 시, ‘동방의 등불’과 ‘패자의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패자의 노래’는 육당 최남선의 요청에 따라 쓴 것이고,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렸을 때 ‘동아일보’ 기자의 한국방문 요청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동아일보’에 기고한 작품이다. 타고르의 유미적이면서도 신앙적인 기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동방의 등불’ 전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주요한 옮김 1929.4)

인도인들 신앙의 뿌리가 된 고전 문학

인도 문학은 그 언어의 다양함이나 문학의 배경을 이루는 종교, 사상의 복잡성 등 다른 나라의 문학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원전 2천년에 나온 ‘베다’나 기원후 19세기에 쓰여진 ‘기탄잘리’가 모두 신에 대한 찬미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인도인들에게 설화 이상의 의미가 있는 ‘마하바라타’를 소재로 한 그림.

인도 고전문학 ‘라마야나’의 삽화.
즉, 신에 대한 찬미와 헌신이라는 초기의 신앙적 주제가 4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각기 다른 형태의 문학작품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특히 신들이 개입된 전쟁이야기를 다룬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기원전 5-6세기경 일반 대중이 접할 수 있었던 최초의 기록 문학으로 그 파급효과가 엄청났다. 설화 자체가 역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인도에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단순한 설화 이상의 의미가 있다.

‘탈무드’가 유대인에게 삶의 지침서가 되는 것처럼, 이 두 서사시는 인도인들의 종교, 사상, 생활 등 전반을 지배하는 교리서와 같은 역할을 해오고 있다.

소수 브라만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베다 문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 속 깊이 파고든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오랜 세월 인도인들의 신앙적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나아가 인도인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민족의식의 태동에 기여했다. 또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두 서사시는 설화의 틀을 뛰어넘어 역사성을 갖추어 나갔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인도인들이 그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전통신앙의 뿌리와 역사성을 바탕으로 중세 인도나 근대 인도의 많은 작가들이 신에 대한 헌신이나 신과의 교감을 노래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화가 훼손되거나 침해를 받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면 자신들의 역사의식이 변질되는 것을 의미할 수가 있고, 이어 정체성의 훼손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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