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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꼬방’ 가득했던 판자촌, 그 ‘살아있는 역사’가 이곳에

피난민 정착촌 부산 ‘산복도로’ 관광자원화…이야기꾼 7명 선발

2012.01.03 정책기자 최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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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일류호텔 스위트룸과 산복도로에 위치한 저의 집.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평생 살라고 한다면 당연히 산복도로를 선택할거에요.”

‘제1회 산복도로 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정희 씨의 이야기다. 부산시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산복도로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산복도로를 부산의 하나의 관광자원으로 만들기 위해 지난 9월 1일~10월 15일까지 ‘제1회 산복도로 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열어 산복도로 이야기꾼 7명을 위촉했다.

산복도로 이야기꾼으로 위촉된 수상자들의 모습
산복도로 이야기꾼으로 위촉된 수상자들의 모습

산복도로의 사전적 의미는 산의 중턱을 지나는 도로를 말한다. 유난히 산이 많은 부산에는 산의 중턱을 지나는 도로도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이런 지형적인 특징 외에도 부산의 산복도로가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과거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내려와 집단으로 모여 살던 곳이 하나의 마을을 형성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사료를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산복도로의 유래는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부터 부산으로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시작됐다.

이 날 새벽 5시 경부선 열차로 첫 피난민 500여 명이 부산역에 도착한 이후 매일 500~1,000여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부산역에 하차했다. 초기에는 이들을 별도로 마련한 수용소에 거주하게 했지만 이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피난민들이 유입되면서 부산시 차원에서의 이들에 대한 배려는 한계에 부딪칠수밖에 없었다.
 
산복도로 과거모습
1960년대 후반 부산 영주동 판자촌의 모습 (사진=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결국 피난민들 스스로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중심가 인근 산자락에서의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부산의 산복도로가 됐다. 소위 ‘하꼬방’으로 불리던 이들의 주거형태는 화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화재 이재민을 낳게 된다.

이들이 다시 도심 외각 지역의 산자락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부산의 대부분의 산자락마다 사람이 거주하는 ‘산복도로 마을’을 형성하게 됐다.

이후 6~70년대 근대 공업화를 거치면서 농어촌 인구의 대량유입이 새로운 산복도로 마을 만들게 되고, 도심 재개발로 인한 소외계층들이 이에 가세하면서 오늘의 산복도로 마을이 고착화됐다.

이들은 한동안 사회기반 시설의 가장 중요한 전기, 상하수도를 비롯한 교통, 육아 등의 사각지대에 거주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삶을 지탱해왔다.

산복도로 모습
과거 산복도로의 규모는 굉장히 넓었다. 전쟁통에 부산으로 밀려오는 피난 행렬을 감당하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사진=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산복도로 모습
과거 판자촌의 모습. 역사 속 한 장면으로 잊혀졌지만, 산복도로 주민 중 일부는 아직도 이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이런 역사적 의미를 가진 산복도로에 대해 현재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이번 스토리텔링 공모전 수상자들에게 묻자 다채로운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정희 씨는 여행 차 우연히 들른 감천동에서 산복도로의 매력에 푹 빠져 오랜 서울생활을 접고 아예 부산으로 이주를 온 케이스이다.

김 씨는 “산복도로에 놀러왔다가 산복도로에 반해서 서울 생활을 접고 부산 산복도로 마을에 작은 카페를 하나 냈다.”며 “편의를 위해 무차별적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요즘, 과거와 현재가 가장 잘 공존하는 몇 안 되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그녀가 보기에 산복도로는 틀에 박힌 서울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많은 매력적인 장소였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이곳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뒤 700만 원을 들여 조그마한 집도 하나 장만했다.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정희씨(가장 왼쪽)
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정희 씨(가장 왼쪽)가 상장을 수여받고 있다.
 
김 씨의 이런 솔직한 이야기들은 이번 스토리텔링 공모작품에도 잘 드러나있고, 산복도로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신선한 측면으로 다가갔다는 후문이다.

김 씨는 “산복도로를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도로를 하나 더 내고, 기존 건물을 현대식 건물로 바꾸기보다는 산복도로의 원래 모습을 존중해주면서 그곳의 삶의 방식을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협조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공모전에서 유일하게 고등학생으로 참가해 동상을 수상한 이원걸 군은 “친구들에게 산복도로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판자촌이나 못사는 동네쯤으로 생각한다. 나 역시 산복도로에 가보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며 “처음으로 가본 산복도로는 정이 넘치는 곳, 진심이 통하는 곳, 그리고 살아있는 역사라는 생각이 들만큼 매력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산복도로는 우리가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만 하는 우리의 역사라고 생각한다.”며 “산복도로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살려서 관광 아이템을 만들어 언론에 노출시킴과 동시에, 안창마을의 오리고기처럼 그 지역에서 유명한 지역특산물과 연계시켜 홍보해나가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산복도로
비포장도로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지붕들. 그 시절의 산복도로 주민들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사진=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한편, 공모전에서 유일하게 공무원 신분으로 입상한 서구청 미래전략사업단 박길영 씨는 “산복도로 개발 관련 정책을 진행하면서 이룬 성과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만들어 제출해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며 “이런 공모전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산복도로로 돌리는 것은 매우 좋은 발상인 것 같다. 공무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개발한 사업들을 대내외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기회여서 참 좋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부산의 사료들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은 “언제부터인가 산복도로가 부산의 한 상징처럼 각인되고 있고, 산복도로 거주민들을 위한 대대적인 정책개발과 지원 대책이 마련되고 있지만, 다소 늦은 감도 없지 않다.”며 “앞으로 부산시가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나갈지 기대된다.”고 전했다.

부산시 창조도시기획과 이영진 담당자는 “산복도로는 부산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이고, 독특한 관광아이템으로 타 지역 사람들에게 신선한 관광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산복도로를 관광자원으로 만들기 위해 시 차원에서 다양한 정책적인 구상을 하고 있다. 이번 공모전 수상자들 역시 앞으로 홍보에 앞장서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산복도로의 최근의 모습
산복도로의 최근 모습. 산 밑에 거주지가 밀집해있다.

부산의 산복도로. 부산지역을 제외한 타지 사람들에게는 아직은 낯선 이름이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에서는 아직도 공동 수도,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는 지역이 있고, 전쟁통에 지어진 빽빽한 건물들로 인해 차량이 진입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 

산복도로는 관광자원이 될 만큼 화려한 건물이나, 아름다운 미관은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부산시는 역발상을 활용, 이곳을 하나의 관광아이템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산복도로 거주민들의 삶 역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전쟁통에 자란 어른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 어린 학생들에겐 과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살아있는 역사, 산복도로는 이제 부산을 대표하는 하나의 관광 아이템으로써 그 생명의 끈을 다시 이어가고 있다.

정책기자 최주혜(고등학생) jewelleryj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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