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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년 한국인 의식주 변천사] 송년회

부어라~마셔라~는 옛말, ‘봉사활동’과 ‘이벤트’로 마무리

2015.12.17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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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가까워지니 다들 송년회 자리가 많아지겠지. 구보 씨의 수첩에도 고향 친구들, 옛 동료들과의 모임이 잡혀 있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한 해를 차분히 정리해야 한다며 12월을 ‘고요한 달’이라고 했다지만, 음주가무를 즐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고요하게 보낼 수 있겠어? 이번엔 송년 모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볼게.

광복 직후에도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망년회를 했지. 어르신들은 일제강점기의 고생을 잊어버리자며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을 정말 많이 드셨어. 지금은 송년회라는 말을 주로 쓰지만 그 무렵엔 ‘보넨카이(忘年會)’라고 했어. 새해를 맞이해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고 쓴 연하장을 보내거나 보넨카이를 하는 건 원래 일본의 세시풍속이었지. 당시 망년회 자리에서 어르신들은 식민지 시절의 고생담을 회고하면서 다시는 그런 고생을 하지 말자고 다짐하곤 했어.

6·25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한 해 동안의 궂은일을 잊고 새로운 기분으로 새해를 준비하자며 망년회 자리를 가졌지. 아마 1세대 송년 모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이름은 망년회였지만 술을 하도 많이 마셔 ‘술년회’라고도 했지. 성인 남성의 망년회 풍경이 대강 그랬다는 거야. 한 해 동안의 나쁜 일을 모두 잊어버리자고 다짐하는 것까지는 좋았지. 그런데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모르겠지만 ‘꼭지가 돌 때까지(이성을 잃을 때까지)’ 마셔야 궂은일이 완전히 사라진다며 계속 술을 마셔댄 거야. 1차, 2차, 3차, 4차…. 마시다 보면 술상에 폭 고꾸라지는 사람도 많았어. ‘필름이 완전히 끊기는(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고, 때로는 사망 사고도 있었어.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오랫동안 계속돼온 우리의 송년 모임 풍경이다.(사진=동아DB)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오랫동안 계속돼온 우리의 송년 모임 풍경이다.(사진=동아DB)

1970년대에도 망년회는 거의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 발바닥에 땀나도록 일했으니 구두에 술을 따라 마시며 한 해를 정리해야 그 액땜을 한다고 했지. 회사의 망년회 자리에선 남자 구두는 바닥이 지저분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니까 여사원 하이힐에 술을 따라 한 잔씩 돌리는 일이 많았어. 딱 한 대만 피우고 담배를 끊자면서 참석자 모두가 마지막으로 담배를 일발 장전한 다음 재떨이에 술을 따라 돌리기도 했지. 그렇게 굳게 결심해도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였지만.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망년회 자리에서 언성을 높이고 멱살잡이나 주먹다짐을 하다 하룻밤 파출소 신세를 졌다는 내용도 많아.

1980년대부터는 잊을 망(忘) 자 대신 보낼 송(送) 자를 써서 ‘송년회(送年會)’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지. 언론에서 망년회가 일본식 표현이라며 송년회나 송년 모임으로 고쳐 쓴 다음부터 바뀐 거야.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의 <사가집(四佳集)>에 ‘한강루의 망년회 자리에서(漢江樓忘年會席上)’라는 시가 있어. 시 제목에 망년회라는 표현이 있다며 망년회가 일본식 표현이 아닌 조선시대부터 써온 말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야. 시에 나타난 망년은 지금과는 의미가 달라. 나이 차이를 따지지 않는 친구 모임이란 뜻이지. 신분이나 나이 차이를 따지지 않고 우정을 나누는 관계를 ‘치소망년지교(緇素忘年之交)’라고 하잖아. 그래서 구보 씨는 망년회라는 표현이 일본 문화의 흔적이 분명하다고 생각해.

‘나눔’ 앞세우는 3세대 송년회
톡톡 튀는 건배사도 인기

망년회든 송년회든 연말 모임에서 술을 마시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어. 1990년대엔 ‘노털카(놓지 말고 털지 말고 마신 다음 카~ 소리 내지 말고 마시기)’가 유행이었지. 걸리면 벌주로 한 잔을 더 마셔야 했어.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더 마시게 하면서 한 해 동안의 애환을 달랬던 거지. 또 있어. 지금도 송년 모임이나 회식 자리에서 자주 듣는 ‘쏜다’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1990년대야. “오늘은 내가 쏠게!”라고 하잖아? 한턱내겠다는 뜻이지. 1990년대 말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우리나라가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했을 땐 마치 술병에 수도꼭지가 달린 듯 술을 많이 마셨어.

2000년대 들어서는 술을 덜 마시는 대신 문화행사나 사회체험을 곁들이는 송년회가 늘었어. 2세대 송년회라고 할 수 있겠지. 직장에선 팀원끼리 실내 운동을 한 다음 식사를 하거나, 영화나 뮤지컬 감상을 하는 송년회가 늘었어. 모임의 성격에 따라 공부 송년회를 하는 곳도 늘었지. 와인 전문가를 초빙해 와인 공부를 함께 한 후 와인을 마신다거나, 실내 골프장에 모여 골프 레슨을 받은 다음 식사를 하기도 했지. 단체로 스키장에 가서 스키를 타며 노는 송년회, 봉사활동을 하며 사회체험을 하는 송년회도 눈에 띄게 늘었어.

2010년 이후엔 나눔 송년회도 등장했어. 3세대 송년회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질펀한 송년 분위기에서 벗어나 해가 가기 전에 선행을 베풀며 한 해를 마무리하자는 거지. 저소득층 가정에 쌀이나 연탄을 배달해주거나 양로원이나 사회복지시설에 단체로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는 게 대표적이야. 나눔 봉사활동을 마치고 나선 당연히 술도 마시지. 좋은 일 하고 마시는 술맛이 얼마나 좋겠어?

최근에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나눔 송년회가 늘고 있다. 2013년 12월 1일 서울 서초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따뜻한 목도리 만들기와 크레파스의 재탄생’ 행사에서 우리은행 서초영업본부 직원봉사단 및 지역 주민들이 사랑의 목도리와 크레파스를 만들며 이색 송년회를 보내고 있다.(사진=동아DB)
최근에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나눔 송년회가 늘고 있다. 2013년 12월 1일 서울 서초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따뜻한 목도리 만들기와 크레파스의 재탄생’ 행사에서 우리은행 서초영업본부 직원봉사단 및 지역 주민들이 사랑의 목도리와 크레파스를 만들며 이색 송년회를 보내고 있다.(사진=동아DB)

이 밖에도 직장 다니는 아들 녀석 말로는 ‘911 송년회’도 있고 ‘112 송년회’도 있대. 911은 밤 9시 내에 한 가지 술로 1차에 끝내는 것이고, 112는 한 가지 술로 1차만 하는데 두 시간 안에 끝내는 거래. 요즘 대학생들은 인터넷이나 단체 카톡방 같은 사이버 공간에서 만나 송년회를 한다더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난해와는 달라야 한다며 다양한 이벤트를 곁들인 이색 송년회도 는다고 하네.

송년 모임에선 건배사도 빠질 수 없지. 구보 씨도 얼마 전 송년 모임에서 이런 건배사를 들었어.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소화재(소통하고 화합하고 재미있게)”, “주전자(주저하지 말고 전화하세요, 자주 봅시다)”. 다 좋은 말이야. 건배사 한마디가 분위기를 살리고 기분을 확 띄워주니까. 그동안 송년 모임 풍경이 많이도 변했지만, 더 좋은 새해를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똑같지 않겠어? 송년 모임에서 했던 건배사 그대로 모두가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길!

* 이 시리즈는 박태원의 세태소설<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년)의 주인공 구보 씨가 당시의 서울 풍경을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살아온 지난 70년의 기억을 톺아본 글이다.

글 ·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전 한국PR학회장)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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