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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중경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다

<광복 73주년 ③> 중국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기

2018.08.15 정책기자 조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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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의 기초라고 볼 수 있는 헌법. 헌법을 살펴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말이 나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현재 대한민국의 ‘뿌리’라는 셈인데, 내년 100주년을 맞는다.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4월 11일 공식 출범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현재 정부도 지난 7월에 대통령 직속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출범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조사와 연구, 기념사업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초로 민주주의의 기반인 민주공화정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흔적은 잘 보존돼 있을까? 혹시 포크레인에 밀려 없어지지는 않았을까? 마음 속 되뇌이는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경임시정부청사 앞에서 촬영한 단체사진.
중경(충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촬영한 단체사진.
 

이번 탐방은 ‘인천에서 중경까지’를 주제로 국가보훈처 산하 인천보훈지청의 ‘2018 중국 독립운동 사적지탐방’에 참여하게 돼 가능했다. 중국 내 많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 가운데 상해(상하이), 항주(항저우), 중경(충칭)의 임시정부 청사와 관련 사적지를 탐방했다.

임시정부의 시작 ‘상해’

인천공항에서 1시간 30분 거리인 상해. 과거 상해는 세계 열강들의 영사관과 조차지가 있던 곳으로 일본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펼치기에 알맞았다. 이에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있는 청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먼저 세계 독립운동가의 묘가 있었던 만국공묘를 찾았다. 만국공묘에는 현재 한국인의 묘로 확인 또는 추정되는 14기의 묘가 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인 박은식 선생의 묘 또한 만국공묘에 있었는데, 지난 1993년에 국립현충원으로 봉환돼 현재는 가묘로 존재하고 있다.

만국공묘 안에 있는 박은식 선생의 묘. 현재는 가묘다.
만국공묘 안에 있는 박은식 선생의 묘. 현재는 가묘다.
 

다음으로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임시정부 청사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상해를 방문할 때 꼭 들르는 곳이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까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활약했다.

상해임시정부청사의 외관.
상해 임시정부 청사의 외관.
 

현재 상해 임시정부청사는 입장료 20위안을 지불해야 입장할 수 있었다.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돈이 드는 만큼, 기꺼이 가격을 지불하고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관람했다.

상해임시정부청사.
상해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마지막으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인 홍커우 공원을 찾았다. 현재 홍커우 공원은 루쉰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정자인 매정이 있다. 매정 안에는 윤봉길 의사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있다.

루쉰 공원을 나서면서, 어느 중국인 할아버지가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 근처에서 붓글씨로 ‘영원히 기념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를 적고 있었다. 중국인들도 윤봉길 의사를 기억하고 경의를 표하는 점에 후손으로써 뿌듯함을 느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 홍커우 공원.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 홍커우 공원.
 

탐방에 함께했던 박현우 군은 “현충원에서 박은식 선생의 묘소를 봤는데, 직접 만국공묘에서 박은식 선생을 만날 수 있어 놀라웠다”며 “중국 내 임시정부청사 훼손 문제가 많이 거론돼 걱정이 됐지만 현재는 입장료와 함께 보안검색도 실시돼 있어 안심이 됐다”고 밝혔다.

피난의 첫 걸음 ‘항주’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가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자,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항주는 상해부터 장사(창사), 중경에 이르는 대장정의 시작이 담겨 있는 곳이다.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3년 6개월 동안 임시정부는 항주에 머물렀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의 도움으로 항주 호변촌 인근에 임시정부를 구축, 독립활동을 이어나갔다. 광복 후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항주 임시정부 청사는 2002년 항주시 복원계획과 우리나라 독립기념관의 협력으로 2007년에 문을 열고 재단장 후 2012년에 재개관했다.

항주 중심가에 있는 항주임시정부청사.
항주 중심가에 있는 항주 임시정부 청사.
 

항주 인근 기강(치장)에는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와 김구 선생 피난처가 있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인 김신 전(前) 독립기념관 관장이 몇 번 찾아 감사를 표했을 정도로 현재는 안내책자와 함께 김구 선생의 침실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있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불꽃 ‘중경’

1940년,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중경까지 오게 된다. 중국 동부 끝에서 중원 중심까지 이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경에서 광복까지 독립운동을 진행한다. 따라서 대일 선전포고와 한국광복군 창설 등 다양한 활동이 중경에서 이뤄졌다.

중경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사용했던 마지막 청사만이 남아있다.

중경에서의 마지막 청사. 연화지 중경임시정부청사.
중경에서의 마지막 청사.
 

중경 중심가 사이에 작은 2층 건물이 중경 임시정부 청사다. 입장료는 무료였고, 중경 학생들이 자원봉사의 개념으로 중경 임시정부청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들어갈 때 보안검색을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중경 임시정부 청사는 1994년부터 복원 논의가 시작됐으며, 200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관했다. 임시정부청사 중에서 개방된지 가장 오래된 중경 임시정부 청사. 중경의 습한 날씨 때문에 건물 훼손이 잦다고 한다.

후손으로써 임시정부청사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찰나, 청사 내부에 있는 기념품가게에서 판매한 금액의 대부분의 청사 유지 및 보수 금액으로 쓰인다는 설명에, 남은 돈을 털어 다양한 기념품을 구매했다.

중경시 기강구에 있는 이동녕 선생 거주지도 찾았는데, 일부는 훼손돼 있었다.
중경시 기강구에 있는 이동녕 선생 거주지도 찾았는데, 일부는 훼손돼 있었다.
 

2016년에 중국 내 있는 사적지들은 대부분 ‘터’만 볼 수 있었다. 장안(시안)에 있는 한국광복군 사령부와 베이징에 있는 이회영 선생 거주지 등은 사라져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 갔던 사적지 중에서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중경 오사야향 청사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는 헐려 재개발과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상해와 항주, 중경 임시정부의 특징은 중국 내 있는 사적지와는 달리 보존이 잘 돼있던 점이었다. 이는 정부와 독립기념관이 중국과 긴밀히 협조해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노력이 더해졌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만약 나몰라라 했다면, 지금 임시정부 청사는 재개발로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동녕 선생 거주지 현판. 2000년에 제작돼 교체가 시급해보인다.
이동녕 선생 거주지 현판. 2000년에 제작됐고, 글씨가 잘려나가 교체가 시급해보인다.
 

광복 73주년, 임시정부 수립 99주년을 맞아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 있는 많은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과 함께 노력도 필요하다.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 등 정부부처와 산하기관에서 다양한 국가와 협력하며 국외 독립운동사적지에 대한 보존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조수연
정책기자단|조수연gd8525gd@naver.com
그분이 말했던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는 대학생입니다.
왠지 지금은 그 세상이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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