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도시 속 미래가 한순간에 펼쳐진 듯한 압도적인 규모와 유려한 곡선의 건축미에 숨이 막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진 전시는 더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국가유산 체제로 전환된 이후 처음으로 선보인 미디어아트 전시 <헤리티지: 더 퓨처 판타지>는 그 이름처럼 유산의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몰입형 예술 경험이었다.
오픈런 열풍을 일으킨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가 이곳에서도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이 전시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이음의 철학'을 바탕으로 기획되었으며, 전통 문화유산과 첨단 디지털 기술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관람 방식을 제안한다.
전통 유산은 더 이상 박물관 유리 진열장 안에 멈춰 선 유물이 아니다.
움직이고, 반짝이고, 감각을 깨우는 콘텐츠가 되어 우리 앞에 새롭게 등장한다.
인트로에 설치된 김준수 작가의 <영원의 축>은 판타지 세계로 들어가는 포털이 된다.
◆ 인트로, 판타지 세계로의 진입 전시의 시작은 김준수 작가의 키네틱 아트 <영원의 축>이었다.
한국의 '탑'을 재해석한 이 설치 작품은 빛과 움직임으로 관람객을 사로잡으며, 마치 현실에서 판타지 세계로 이동하는 포털처럼 느껴졌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현실의 감각을 잠시 내려놓고, 시간의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4면을 감싸는 의궤, 조선시대 한복판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① 의궤, 영원의 서사 첫 번째 공간에는 조선 왕실의 의례를 기록한 의궤를 디지털 콘텐츠로 구현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4면이 모두 영상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궁중 행렬의 장면은 마치 책 속 기록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작년에 재정비한 서오릉 역사문화관에서 본 의궤 미디어아트, 최근 수원화성 방문 당시 느꼈던 정조의 행차 기억이 겹쳐지며, 문화유산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실감했다.
이러한 연결 경험이야말로 교육적 가치와 감동을 동시에 전해주는 디지털 유산 콘텐츠의 강점이라 느꼈다.
반짝이는 자개와 디지털 윤슬이 만들어낸 몽환의 풍경.
② 산수, 끝없는 윤슬 두 번째 부문은 자개의 반짝임으로 표현된 산수화였다.
전통 회화의 미감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디지털 빛의 흐름과 움직임이 더해져 신비로움이 배가되었다.
관람객은 바닥에 마련된 쿠션에 누워 반짝이는 윤슬을 감상할 수 있었고, 그 경험은 감각적이면서도 편안했다.
특히 자개의 고유한 재질을 빛으로 재현한 점이 인상 깊었다.
<장인, 무한한 울림> 부문은 무형유산의 기록과 전승, 그 의미를 깊이 있게 전한다.
③ 장인, 무한한 울림 세 번째 부문은 국가 무형유산 보유자들의 작업과 그 철학을 다룬 공간이다.
전시장 벽면을 따라 실제 장인들의 작품이 진열되어 있고, 그 뒤에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담은 영상이 흐른다.
수공예의 미학, 장인의 손길,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전통의 무게가 관람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특히 무형유산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기록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 전시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유형화하는 데 성공한 사례로 보였다.
2025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본상 수상작, <이음을 위한 공유>. 디지털 예술로 다시 태어난 국가유산, 세계의 주목을 받다.
④ 유산, 이음의 물결 마지막 부문은 2025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브랜드 및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부문 본상 수상작인 <이음을 위한 공유>다.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 디지털 디자인&아트 컴퍼니 디스트릭트가 협업해 제작한 이 작품은, 국가유산 3D 자산을 활용해 문화유산과 궁궐, 무형유산의 요소들을 미디어아트로 재탄생시켰다.
어두운 공간 속 거대한 벽면에 실루엣처럼 드리워지는 200여 점의 유산들이 마치 물결처럼 흘러나올 때, 관람객은 숨을 죽이고 감상하게 된다.
디지털 기술이 국가유산을 시각적으로 해방시키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도자기를 올리면 피어나는 디지털 꽃, 관람객이 완성하는 작품.
◆ 체험 공간 & 아웃트로 체험 공간에서는 도자기 오브제를 선반 위에 올리면 디지털 꽃이 피어나는 마법 같은 체험이 펼쳐진다.
전시 마지막에는 한국의 종을 모티브로 한 키네틱 아트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빛과 소리, 움직임이 어우러지는 그 장면은 이번 전시의 완벽한 아웃트로이자, 유산이 현대 예술로 울려 퍼지는 울림 같은 마무리였다.
전시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익숙한 유산들이 낯설고도 새롭게 다가왔다.
전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쓰일 수 있는 현재이자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레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유산은 어떻게 시대를 건너 오늘의 감각과 만날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한 실마리를 이번 전시의 총괄 기획을 맡은 강신재 예술감독의 이야기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
<헤리티지: 더 퓨처 판타지> 총괄 기획을 맡은 강신재 예술감독.
◆강신재 예술감독과의 일문일답 "유산은 박제물이 아닌 미래의 콘텐츠입니다."
Q. 이번 전시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이음'이라는 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했습니다.
관람객들은 어떤 지점에서 이 메시지를 가장 깊이 느낄 수 있을까요?
A. 이 전시는 탑으로 시작해서 종으로 끝나는 전체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정 지점보다 전시 전체 흐름이 하나의 연결로 구성돼 있다고 보면 됩니다.
첫 시작인 <영원의 축>은 관람객의 현실 감각을 전환시키고,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듯한 역할을 하죠.
이후 이어지는 의궤와 장인의 영상 작업 등은 모두 시간의 이음을 상징합니다.
Q. 국가유산이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세대와 공유하는 문화 자산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가 젊은 세대에게 어떤 새로운 경험과 의미를 주기를 바라시나요? A. 요즘 젊은 세대는 이미 헤리티지에 빠져 있다고 생각해요.
<케이팝 데몬 헌터스>, 박물관 오픈런, 차 문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요.
이번 전시엔 한지 오브제나 다보탑에서 영감을 받은 설치작품 등 SNS에 공유할 만한 요소가 많습니다.
그런 작은 참여가 결국 유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아웃트로에서는 한국의 종을 모티브로 한 김준수 작가의 <흐르는 강물처럼>이 관람의 종지부를 찍는다.
Q. 전시의 각 섹션을 보면, '의궤'를 디지털로 구현하고, '장인의 정신'을 흑백의 추상적 영상으로 표현하는 등 전통 유산에 대한 매우 현대적인 접근이 돋보입니다.
이렇게 우리 유산을 디지털 아트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원형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 가장 고심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A. 그동안의 유산은 박물관 유리 안에 갇힌 박제물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그것을 '재형상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작가들과 협업해 키네틱 아트, 설치미술 등으로 새 콘텐츠를 만들었죠.
이런 시도들을 통해 유산은 미래 자산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봅니다.
Q. 이 전시회의 제목이 <헤리티지: 더 퓨처 판타지>입니다.
전시명처럼, 이 프로젝트가 우리 국가유산의 '미래'에 대한 하나의 청사진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를 기점으로 앞으로 국가유산이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은 어떻게 진화하고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기대하시나요?
A. 핵심은 관객과 호흡하는 유산입니다.
기존에 우리에게 익숙한 박물관식의 전시에서 벗어나, 유산을 활용한 콘텐츠가 다양하게 개발되어야 합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국립중앙박물관 굿즈 열풍도 그런 움직임이죠.
<헤리티지: 더 퓨처 판타지> 역시 그 맥락에서, K-컬처와 함께 세계로 뻗어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한지와 빛으로 되살아난 행렬, 관람객은 그 여정의 일부가 된다.
<헤리티지: 더 퓨처 판타지>는 국가유산을 과거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전통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디지털 기술을 통해 감각적으로 확장시키고, 현대 관람객과 연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