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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은 힘이 세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2014.03.18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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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즐겁다. 무슨 글이든지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그 나름의 리듬을 넣어 읽게 된다. 그리고 대화가 나오는 곳이면 자신도 모르게 연극 공연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바꾸어 읽게 된다.

글을 읽을 때 머리와 몸을 흔들며 노래하듯이 읊는 것은 저절로 흥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흥도 흥이지만 소리 내어 읽으면 시각과 청각이 결합돼 학습효과가 높아진다. 그래서 서당에서는 크게 소리 내어 읽게 한 것일 테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일어나서 교과서를 낭독하게 시키는 것이리라. 낭독은 말하기 듣기 받아쓰기 등과 마찬가지로 언어교육의 중요한 분야이다.

의미는 소리를 따라오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소리를 내서 읽어보면 좋은 글인지 나쁜 글인지를 금세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좋은 글은 글자 하나하나가 빳빳이 살아 있는 반면, 나쁜 글은 비실비실 힘이 없어서 읽어도 소리가 붙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는데, 동네 친구들이 몰려다니며 놀 때 사랑방에 혼자 앉아 글을 읽었다. 일종의 왕따인 셈이었지만 집 앞을 지나가는 아이들이 내 책 읽는 소리를 흉내 내면서 놀릴 때 나는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이게 혼자서 한 낭독의 첫 경험이었다. 

그러나 전통시대에 당연시돼온 낭독은 근대가 되면서 힘을 잃고,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는 묵독이 미덕인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근대 이전에는 낭독을 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개인의 인권이 신장되고 사적 영역이 커지면서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는 교양 없는 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그런 상황에서도 시 낭송대회나 동화 구연대회가 열리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독서회가 활발하게 운영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낭독의 형식으로는 혼자서 읽는 것,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읽는 것, 몇 사람이 분담해서 차례차례 읽는 것, 배역을 정해 희곡을 읽는 것 등이 있는데, 이런 군독(群讀)은 효과적 표현기술을 익히기에 매우 좋다.

낭독의 중요성이나 효과에 대해서는 누구든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별로 평판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국정원장이었던 분이 언젠가 낭독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말을 듣고 나는 좀 놀랐다. 이런 일을 저 사람이 어떻게 알까, 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신문 사설을 예로 들면서 자기는 언제나 큰 소리로 낭독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더 빨리, 더 분명하게 글이 머리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매일 사설을 생산하던 나도 하지 않는 일을 그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낭독에 관한 것으로 주목할 만한 책이 최근에 두 권 나왔다. 하나는 <낭독은 입문학이다>, 또 하나는 <고래와 수증기>라는 시집이다. <낭독은 입문학이다>는 삼성경제연구소 트렌드 포럼을 운영하며 각종 매체에 칼럼을 기고해온 김보경 씨의 자전적 인문학 성찰기이자 낭독의 자기 혁명 효과에 관한 독서비평서다. 김씨는 2009년 6월부터 혼자 읽기 어려운 책을 함께 낭독하는 독서클럽 ‘북코러스’를 운영하는 한편 조회수 60만이 넘는 ‘트렌드아카데미’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오늘의 도서관’에 2년간 독서칼럼을 연재했고, 2013년 12월에는 서울 신촌역 옆에 ‘문학다방 봄봄’이라는 문학마니아 아지트 겸 카페를 차렸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독서의 즐거움에 대해 “책 속의 작가가 체험하고 생각한 일들이 고스란히 담긴 세상을 함께 느끼고 영감에 탄복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감상과 의지를 좀 더 체감하고 싶다면 여럿이 함께하는 낭독이 제격이다. 낭독이야말로 인문학자, 문학인, 평생 독서인, 교양인이 되는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며, 낭독을 하면서 사는 인생이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택할 가장 편리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 시집 <고래와 수증기>를 낸 시인 김경주 씨는 한 인터뷰에서 “시의 고유성을 되찾는 방법은 소리의 회복”이라고 말했다. 국내 시인 중에서 가장 옛 시인에 가까운 작업을 하는 그는 시가 노래이자 극이고 철학이었던 그 옛날처럼 시를 쓰고 음악을 하며 극을 쓴다.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내기도 전인 2000년대 초부터 낭독운동을 펼쳤다. <고래와 수증기>에 담긴 시도 모두 낭독회에서 먼저 공개한 작품들이다.

시를 쓸 때마다 혼자 중얼거릴 공간을 찾는다는 그는 지난해 말 제주도의 한 폐가에서 지내며 시집에 수록할 시들을 입술과 혀끝이 만들어내는 소리로 손질하며 복기했다. 입김, 구름, 물보라, 안개 등 시집에는 금세 형체가 사라지는 것들이 자주 등장한다. 제목의 '고래와 수증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금방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묻는 게 내게 중요한 질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시를 읽으며 느꼈던 매혹과 설렘을 대중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이 뭘까 고민한 끝에 시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소리의 회복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더 인용해본다. “시가 동시대성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질문하며 센 소리가 아니라도 시로 보여줄 수 있는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온전한 서사로 쓰지 않아도, 부족한 은유와 덜 응축된 언어로도 전달할 수 있는 게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시는 힘이 세고 낭독도 힘이 세다. 낭독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이면 더욱 힘이 세진다. 낭독이 생활화하도록 되살려야 한다. 옛 어른들은 아이들 밥 먹는 소리와 함께 글 읽는 소리를 가장 듣기 좋은 소리라고 꼽았다. 賦得山北讀書聲(부득산북독서성, 득산 북쪽의 글 읽는 소리에)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시를 옮겨본다. 天地何聲第一淸(천지하성제일청) 이 세상에서 무슨 소리가 가장 맑을꼬 雪山深處讀書聲(설산심처독서성) 눈 쌓인 깊은 산속의 글 읽는 소리로세 仙官玉佩雲端步(선관옥패운단보) 신선이 패옥 차고 구름 끝을 거니는 듯 帝女瑤絃月下鳴(제녀요현월하명) 천녀가 달 아래 거문고를 튕기는 듯 不可人家容暫絶(불가인가용잠절) 사람 집에 잠시라도 끊겨서는 안 되는 것 故應世道與相成(고응세도여상성) 당연히 세상 형편과 함께 이룩될 일이지 北?甕?云誰屋(북엄옹유운수옥) 북쪽 산등성이 오막살이 그 뉘 집인고 樵客忘歸解送情(초객망귀해송정) 나무꾼도 돌아가길 잊고 정 보낼 줄 아네.

그리고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문절공(文節公) 예사(倪思)는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를 이렇게 나열했다. ‘솔바람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산새 지저귀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학이 우는 소리, 거문고 뜯는 소리, 바둑 두는 소리, 비가 섬돌에 똑똑 떨어지는 소리, 하얀 눈이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 차 끓이는 소리,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 즉 독서성이요, 그 중에서도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으뜸이라’ 하였다.

흔히 하는 표현대로 ‘병에서 물이 쏟아지듯’ 시원하고 유창하게 글을 읽는 소리는 얼마나 상쾌한가. 낭독의 힘과 중요성을 잘 알았기에 문화부도 2012년 독서의 해에 ‘책 읽는 소리, 대한민국을 흔들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던 것이리라. 낭독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        

◆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언론문화포럼 회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졸. 1974~2012 한국일보사 근무. 기획취재부장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논설고문으로 ‘임철순칼럼’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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