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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방하고 명쾌한 시풍…16세기 조선의 가장 뛰어난 문장가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시인 임제/나주 백호 문학관

2020.10.22 이광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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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난이
잔(盞)자바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1583년, 임제가 평안도도사로 부임되어 가는 길이다. 평양 못가 개성의 어느 청초 우거진 골짜기에 무덤이 하나 있다. 시인 황진이의 무덤이다. 황진이는 임제 보다 한 세대 위다. 그녀의 시를 사랑했을 그가 그냥 갈 수 없다. 한 잔의 술과 한 편의 시를 남기고 간다. 이 일로 조정의 비판을 받고 부임도 전에 파직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부임도 전에 기생의 무덤에 먼저 추념한다는 것은 유교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임제는 그녀를 기녀가 아닌 시인으로 본 것이다. 홍안은 가고 백골만 남은 기녀가 기녀일 수는 없다. 그의 시는 ‘시인’의 시에 화답하는 추모의 시였다. ‘청구영언’에 전하는 이 시조의 삽화는 오히려 우리 문학사에 오래 기억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나주시 다시면에 ‘16세기 조선의 가장 탁월한 문장가’로 칭송받는 임제의 ‘백호문학관’이 있다.
나주시 다시면에 ‘16세기 조선의 가장 탁월한 문장가’로 칭송받는 임제의 ‘백호문학관’이 있다.

임제(林悌, 1549~1587), 나주 태생으로 호가 백호(白湖)다. 어려서 스승 없이 독학했다. 22세 겨울, 상경 길에 쓴 시가 성운(成運)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등 많은 학자들을 가르친 큰 선비였다. 스승은 격정적이고 자유분방한 임제의 성격을 바꾸기 위해 ‘중용’을 1000번 읽으라 하여, 그가 지리산의 암자에서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576년(선조 9) 28세에 속리산에서 스승을 하직하고, 생원 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 예조정랑, 홍문관지제교 등의 벼슬을 지냈다.

당시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던 때다. 호방하고 거침없는 성격의 그는 관료들이 파당을 짓고 당리당략을 위해 서로를 질시하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다. 임제는 방외인으로 돌며 술을 즐겼다. 하루는 벗들과 밤새 술을 마신 뒤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시중을 들던 하인이 “대감마님, 취하셨나 봅니다. 신발이 왼쪽은 가죽신이고, 한쪽은 짚신이옵니다”라고 했다. 그의 응수가 걸작이다. “길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왼편에서 보는 사람은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그게 무슨 걱정이냐?”

임제가 평양도도사 직을 마칠 무렵 평양의 명기 한우(寒雨)를 만나 나눈 ‘한우가(寒雨歌)’도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시조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를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 비 온다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어이 얼어 자리 무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찬비에 얼어 잘까 하니, 한우에 녹아 자라 한다. 임제의 ‘수(酬)’에 대한 한우의 ‘작(酌)’이 막상막하다. 남녀 간의 수작이 야하거나 속되지 않다.  

임제의 초상.
임제의 초상.

임제는 늘 검(劍)과 퉁소를 지니고 다녔던 풍류남아였고 자유분방한 시인이었다. 당파싸움을 개탄하면서 벼슬을 내던진 뒤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1천여수의 시와 산문 소설을 남겼다. 한문소설로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이 있고 문집으로는 ‘임백호집’ 4권이 남아있다. 16세기 조선에서 가장 개성적이며 뛰어난 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호방하고 명쾌한 시풍은 널리 사랑을 받았다. 글에 더하여 글씨도 잘 썼다. 특히 초서에 능하였다. 그는 고향인 나주로 돌아와 1587년(선조 20) 39세로 짧은 삶을 마쳤다. 

‘주변 오랑캐 나라들이 다 제왕이라 칭했는데도,
오직 우리 조선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이다.
이런 못난 나라에서 살면 무엇을 할 것이며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내 떠나거든 곡 하지 말라.’
(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

임종 즈음하여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 ‘물곡사(勿哭辭)’이다. 사학자인 호암 문일평은 “임백호의 멋진 생애에서 가장 감격적인 장면은 그의 위대한 임종이다”고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백호의 호방한 기질, 예속에 구속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시 <이 사람(有人)> 중에서.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백호의 호방한 기질, 예속에 구속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시 <이 사람(有人)> 중에서.

나주시 다시면에 ‘백호 문학관’이 있다. 현관에는 ‘16세기 조선의 가장 탁월한 문장가’라고 쓴 촌평이 걸려 있다. 임제가 어릴 적 공부하던 ‘석림정사’의 친필 현판, 제주도 여행기 ‘남명소승’, 친필 미공개 시편 등 그의 작품과 지역의 유림들이 임제 사원 건립을 청원하는 건원상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편에 호방한 기질, 예속에 구속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그의 시 <이 사람(有人)> 한 줄이 걸려 있다.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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