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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타나가 찬양한 블타바 강, 환희의 선율이 흐른다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체코/프라하(Praha)

2021.07.23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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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타바(Vltava) 강은 남부 보헤미아 숲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줄기에 서부 보헤미아 숲에서 흘러나오는 또 하나의 지류가 합류하여 흘러가다가 체코 건국전설이 깃든 비셰흐라트 언덕을 스친 다음, 카를 다리가 있는 프라하 심장부를 지나 보헤미아 북서쪽으로 흘러가다가 독일의 엘베 강과 합류한다.

‘블타바 강의 딸’ 프라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 뒤에는 시련의 역사가 스쳐간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체코는 17세기부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주권을 잃었고 독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블타바 강의 이름도 독일식 몰다우(Moldau)가 표준이었다.

블타바 강과 카를 다리 야경. 그 너머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대성당이 보인다.
블타바 강과 카를 다리 야경. 그 너머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대성당이 보인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보헤미아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기 약 260년 전인 1357년 7월 9일의 일이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던 카를 4세(1316-1378, 체코식은 카렐 4세)는 블타바 강에 튼튼한 첫 번째 돌다리를 세우기 위해 프라하 성과 비투스 성당을 설계한 당대 최고의 독일 건축가 페터 파를러에게 초석을 놓게 했다.

약 500미터 길이의 이 다리는 45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402년에 완공되었다. 이 다리는 단순히 ‘프라하 다리’라고 불리다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카를 4세를 기념해 카를 다리(체코식은 카렐 다리)라고 명명되었다. 이 다리는 프라하의 동쪽 핵심 지역과 서쪽 핵심지역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데 단순히 강의 양안을 연결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을 지나가게 하면서도 동시에 머물도록 한다. 특히 다리 양쪽에 세워진 성인들의 석상과 다리 양쪽 끝에 세워진 탑 때문에 이 다리는 감싸는 듯한 광장 같은 느낌도 준다.

블타바 강과 카를 다리. 오른쪽 건물이 스메타나 박물관이다.
블타바 강과 카를 다리. 오른쪽 건물이 스메타나 박물관이다.

프라하의 최고 명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다리에서 블타바 강을 바라보면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가 작곡한 <블타바>의 선율이 들려오는 듯하다. 스메타나는 음악을 통하여 체코민족의 혼을 담고 흐르는 블타바 강을 찬양했다. 체코 국민음악파의 선구자였던 그는 17년 후배인 드보르작과 함께 체코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1830년대 체코에서는 오랜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서 잃어버렸던 민족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민족부흥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모든 문화 활동은 체코민족의 부활과 부흥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스메타나가 24세이던 1848년의 일이다.

비셰흐라트 언덕에서 내려다 본 블타바 강.
비셰흐라트 언덕에서 내려다 본 블타바 강.

그해 프랑스 2월 혁명의 여파로 오스트리아 제국 전역에서는 지배 받던 여러 민족들이 민족정체성을 자각하고는 혁명을 깃발을 들어올렸다. 스메타나는 프라하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에 참가했다. 시위대는 카를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오스트리아 군대와 맞섰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시민혁명이 참담하게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민족의식에 더욱 불타올라 음악가로서 체코음악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더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 즉 독일문화권 음악의 주류에 뿌리를 두되 체코의 역사, 영웅담, 전설, 민속 등과 같은 요소를 첨가시키거나 체코의 풍경을 표제로 하는 등 음악에 체코 민족의 혼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스메타나의 동상. 그 뒤 카를 다리, 프라하 성, 성 비투스 대성당이 보인다.
스메타나의 동상. 그 뒤 카를 다리, 프라하 성, 성 비투스 대성당이 보인다.

그런데 그의 삶은 운명과의 싸움 그 자체였다. 한때 그는 스웨덴에서 몇 년 동안 객원지휘자로 활동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끝없는 인간적 고난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

젊었을 때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처절하게 겪었고 어느 정도 사회적 기반을 갖춘 다음에는 딸 넷 중에서 셋이 죽는가하면 첫 번째 아내도 병으로 잃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적인 슬픔도 겪었다.

그것도 부족한지 또 다른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음악가에는 치명적인 재앙인 청력상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혹한 운명에 맞섰다. 그가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상태에서 작곡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연작교향시 <나의 조국(Má Vlast)>이다.

이 교향시의 첫 번째 곡 <비셰흐라트>와 두 번째 곡 <블타바 강>은 1874년에 작곡했고 나머지 네 곡 <샤르카>, <보헤미아의 숲과 들판으로부터>, <타보르>, <블라닉>은 청력을 완전히 잃은 다음인 1879년에 완성했다.

그런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창작에 전념하던 그에게 청력상실도 부족한지 정신착란증까지 겹쳤다. 병마와 힘겹게 싸우던 그는 1884년 60세의 일기로 프라하의 정신병동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은 가혹한 운명과 싸워 이긴 듯 평안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모든 체코국민들의 애도 속에 블타바 강이 내려다보이는 비셰흐라트 언덕 위에 조성된 국가유공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대표작 <나의 조국>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 단연 <블타바 강>이다. 두 곳의 다른 원천에서 흘러나와 합류하여 프라하를 지나는 블타바 강처럼, 이 곡에서도 그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슬픔과 이를 극복하고 승화된 우아함이 어우러져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카를 다리 부근 블타바 강변에는 스메타나 박물관이 1936년에 들어섰다. 바로 그 앞에 세워진 스메타나의 동상은 블타바 강이 흘러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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