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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과 파격으로 일관한 생…선화의 영역서 독보적 세계 구축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서울 ‘셋이서 문학관’/중광스님

2021.09.24 이광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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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은평구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셋이서 문학관’. 80년대 기인 삼총사로 이름을 떨친 천상병, 중광스님, 이외수의 작품과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울시 은평구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셋이서 문학관’. 80년대 기인 삼총사로 이름을 떨친 천상병, 중광스님, 이외수의 작품과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괜히 왔다 간다’
‘셋이서 문학관’ 2층 천상병의 방을 지나면 이외수의 방이 있고, 그 옆으로 중광스님의 방이 있다.

천상병의 방에는 문패 너머로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는 그의 싯귀가 쓰여 있다. 이외수의 방에는 ‘쓰는 이의 고통이 읽는 이의 행복이 될 때까지’라고 적혀 있고, 중광스님의 방에는 인상을 쓰고 있는 사진 옆으로 ‘괜히 왔다 간다’는 큼지막한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그의 묘비명이기도 하다. 묘비명과 비문을 모아놓은 작가 박경남의 책에 보면,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버나드 쇼),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스탕달), ‘여기, 이름을 물 위에 새긴 사람이 잠들다’(키츠),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아펜젤러),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카잔차키스) 등의 명문 묘비명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천상병과 중광스님도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80년대 기인 삼총사로 불렸던 시인 천상병, 화가 중광, 소설가 이외수 등 ‘셋이서 문학관’의 주인공들.
80년대 기인 삼총사로 불렸던 시인 천상병, 화가 중광, 소설가 이외수 등 ‘셋이서 문학관’의 주인공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아일랜드의 노벨상 수상 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는 천상병의 묘비명은 시인의 아름다운 언어이고, ‘괜히 왔다 간다’는 선사(禪師)의 ‘임종게’처럼 한 세상을 달관한 듯한 경지를 보여준다.

승려 중광(1934~2002)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자랐다. 속명은 고창률(高昌律). 너무 가난하여 제주농고 다니다 중퇴하고 31세인 1963년 양산 통도사로 출가했다. 이듬해  동양화가 노수현 선생에게 사군자를 배웠고, 광주 무등산에 토굴을 마련하여 의재 허백련 문하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당시 3년여를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밤낮없이 ‘달마도’에 몰두했었다고 한다.

셋이서 문학관 내부. ‘가을은 여름에 타다 남은 불꽃이다’, ‘겨울은 하얀 천사가 춤추는 계절이다’는 싯귀들이 붙어있다.
셋이서 문학관 내부. ‘가을은 여름에 타다 남은 불꽃이다’, ‘겨울은 하얀 천사가 춤추는 계절이다’는 싯귀들이 붙어있다.

스님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미국 버클리대의 랭카스터 교수였다. 불교문화재 연구차 방한했던 랭카스터 교수는 통도사 박물관장 일을 하던 중광스님을 처음 만났다. 랭카스터 교수는 스님의 방에 널린 수백 점의 달마도를 살펴보고는 ‘한국의 피카소’라며 경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인연은 미국으로 이어져 랭카스터 교수가 1979년 <The Mad Monk(광승)>라는 제목으로 중광의 이야기를 책을 펴냈다. 이어 1980년 중광스님이 버클리대와 스텐퍼드대 등 명문 대학과 미국 선 세터에서 선화와 선시에 대해 특강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첫 개인전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이뤄졌다. 그해 미국 NONC 갤러리에서의 초대전을 열고 이듬해 국내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83년에는 미국 록펠러재단, 하와이 주립대학교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1985년 도자기·도화 전시회, 1988년 신주꾸 카데우 갤러리 초대전, 1989년 가갸거겨 전시회 등 국내외에서 수많은 전시회가 이어졌다. 스님은 1991년 일본 NHK, 영국 SKY 채널, 미국 CNN 월드뉴스 등 해외 매스컴에 소개되면서 일약 세계적인 아티스트 반열에 오른다. 1997년에는 독일 함부르크 미술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강의하기도 했다.

‘괜히 왔다 간다’는 그의 묘비명과 시 <나는 걸레>가 장식된 중광스님의 방.
‘괜히 왔다 간다’는 그의 묘비명과 시 <나는 걸레>가 장식된 중광스님의 방.

“나는 세속의 굴레에서 노예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며 내 생활과 내 작품 안에서 그 자유를 성취하고 싶다”고 했던 그의 말처럼, 그는 체면과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을 비웃고 조롱하며 온갖 기행을 일삼았다. 빈 속에 소주 5병을 들이 붓고는 그림과 시를 짓는가 하면, 격정적으로 춤을 추기도 하고 흥이 오르면 걸친 옷을 모두 벗어 던지기도 했다.

스스로 ‘나는 걸레다’, ‘내 생활 전부가 똥이요, 사기다’라고 했으며, 살아 있는 자신의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성기에 붓을 매달아 선화를 그리기도 했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강연 도중 여학생에게 키스를 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중광스님의 선화 작품.
중광스님의 선화 작품.
중광스님의 선화 작품.
중광스님의 선화 작품.
중광스님의 도자기 작품.
중광스님의 도자기 작품.

80년대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외수와 함께 기인삼총사로 불리던 중광스님은 그런 기행만 남긴 것이 아니라 승속(僧俗)을 넘나들며 물욕으로부터 초연한 성직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97년에 옥시크린 CF를 찍고 출연료로 받은 5천만 원을 모두 지인의 신병 치료비로 기부하기도 했고, 2000년에 열린 마지막 작품전의 수익금도 전부 불우한 이웃에게 기부했다. 그는 집에 찾아온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자신이 아끼는 그림도 스스럼없이 내어주었다고 한다. 그의 저서 <허튼소리>는 1986년 김수용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으며 아시아 영화제에서 한국 우수영화로 선정됐다. 1989년 한국평론가협회에서 최우수 예술인상을 받았다. 1990년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에 주연으로 열연해서 대종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막걸리 통에 소주를 담아 마시는 과도한 음주와 줄담배로 건강이 나빠지자 1998년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선을 수행하며 달마도에 전념했다. 백담사의 오현스님으로부터 ‘바위처럼 벙어리가 되라’는 뜻의 법호 ‘농암(聾庵)’을 받은 뒤 2000년부터 경기도 광주 곤지암의 ‘벙어리 절간’이라고 불리는 토굴에서 살았다. 그해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마지막 전시회가 된 「중광 달마전, 괜히 왔다 간다」를 열었다. 2002년 숨을 거둬 통도사에서 다비식이 열렸다. 그의 승적은 사후 회복됐다. 저서로 <허튼 소리>, <벙어리 절간 이야기>, 천상병 이외수와 함께 펴낸 <도적놈 셋이서> 등이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중광스님.
환하게 웃고 있는 중광스님.

승려이면서 화가였고,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한 생을 기행과 파격으로 일관했지만, 선화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셋이서 문학관 그의 방에는 시 「나는 걸레」가 걸려 있다.

「나는 걸레/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 삼천대천(三天大天) 세계는/ 산산히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레/ 남한강에 잉어가 싱싱하니/ 탁주 한 통 싣고/ 배를 띄워라/ 별이랑, 달이랑, 고기랑/ 떼들이 모여들어/ 별들은 노래를 부르고/ 달들은 장구를 치오/ 고기들은 칼을 들어/ 고기회를 만드오/ 나는 탁주 한 잔/ 꺾고서/ 덩실 더덩실/ 신나게 춤을 추는 게다/나는 걸레」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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