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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기적, 고래의 꿈이 세계유산이 되다

"1970년 12월 24일은 내 인생에서 하나의 획을 그은 날이자 우리나라 선사 역사 연구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신라 승려인 원효대사의 흔적을 찾아 울산 언양을 찾았고, '절벽에 이상한 그림이 보인다'라는 말에 내 눈은 번쩍 뜨였다. 신라 마애불(磨崖佛)일 수 있다는 마음에 서둘러 간 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암각화가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71년 12월 25일에는 인근 대곡리에서 고래,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 다양한 동물과 사냥 장면이 실감 나게 표현된 또 다른 암각화가 발견됐다. 이날 아침 연구진과 마을 사람을 태운 배를 타고 하류 계곡으로 출발한 지 10분 만에 윤기가 나는 암벽이 보였다.."
문명대 저, <울산 반구대 암각화> 중에서(2023)
대략 반세기 전, 1년 사이에 크리스마스 전후로 반구천 암각화를 발견한 문명대 교수의 회고담이다. 초기에는 먼저 발견된 '천전리 암각화'와 나중에 발견된 '대곡리 암각화'를 묶어서 '반구대 암각화'로 기술하다가 지금은 '반구천 암각화'로 통칭하고 있다. 이번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공식 명칭도 '반구천 암각화'다.
천전리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대곡리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인데 순서를 바꾸어 발견되었고, 나란히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반구천 암각화는 선사 시대부터 무려 6000년을 이어온 인간의 상상력과 예술성, 자연과의 교감이 바위 위에 새겨진 '역사의 벽화'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선사 시대부터 6000여 년에 걸쳐 지속된 암각화의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인 증거"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사실적인 그림과 독특한 구도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성을 보여준다"라고 말하고 "선사인의 창의성으로 풀어낸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키워드는 사실성, 예술성, 창의성이다. 제대로 평가한 것으로 생각한다. 2010년 잠정목록에 오른 지 15년이 지나서야 세계유산으로서 빛을 보게 됐다.
천전리 유적에는 높이 약 2.7m, 너비 10m 바위 면을 따라 각종 도형과 글, 그림 등 620여 점이 새겨져 있다. 청동기 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마름모, 원형 등의 추상적 문양이다. 후대인 신라 시대에 새겨진 명문(銘文)도 보인다.

한편, 반구천 암각화엔 새끼 고래를 이끄는 무리, 작살에 맞아 배로 끌려가는 고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호랑이·사슴 같은 육지동물과 풍요를 빌던 제의(祭儀)의 흔적도 생생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견된 이 놀라운 유적은 고미술학계에서는 '크리스마스의 기적' 혹은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실제로 이 암각화를 '실물영접'으로 본 적이 있다. 1987년 3월, MBC 다큐멘터리'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서'를 제작하며, 동국대 문명대 교수 연구팀과 함께 그 현장을 찾았다. 계곡을 따라 깊이 들어가 처음 마주한 그 암각화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해가 넘어가는 오후에 햇살이 비치는 암벽에 50여 마리의 고래들이 살아 움직이듯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동물의 묘사가 아니었다. 집단의례의 도상이며, 인류 예술의 기원이며, 오늘날 다큐멘터리의 스토리보드였다. 반구천은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의 기록이자, 고래가 직립해 뭍과 하늘을 연결하던 신화의 공간이었다. 연구진과 함께 암각화를 눈앞에서 목도하고 만져보고 할 기회는 그 뒤로 다시 오지 않았다.
6000여 년 전 무렵, 동해 연안의 거주민이 바다에서 집단으로 고래를 잡았다. 그리고 뭍으로 올라 반석 같은 바위를 찾아 고래를 새겼다. 반구천 암각화는 선사인이 하늘로 띄운 기도이며, 공동체의 삶을 기록한 생활 연대기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라스코 동굴벽화, 스페인이 자부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부럽지 않았다.
고래 옆에 새겨진 호랑이와 사슴, 여전히 해석되지 않은 기하문들은 미지의 코드를 품고 있다. 천전리 암각화의 다섯 개 다이아몬드 형상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추상시다. 2022년 울산MBC는 3부작 다큐멘터리로 이 신비를 탐구한 바 있다. 문화유산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시간의 언어다.
반구천 암각화는 지난 반세기 동안 수몰 위협과 싸워왔다. 고래의 유영이 기록된 바위는 댐의 수위에 잠겨 박락이 떨어져 나가고 어설픈 탁본으로 원본이 상실되기도 했다. 최근 가뭄이 잦아 암각화가 비교적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점증하는 기후변화와 댐 운영의 변수 앞에서 언제든 '반구천'은 '반수천(半水川)'이 될 수 있다. 물속 유산은 세계유산이 아니다. 등재 이후의 보호·관리 계획이 부실하다면 유네스코는 등재를 철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적의 현장'을 '수몰의 현장'으로 되돌리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된다.
진짜 과제는 지금부터다. 그동안 울산시는 '고래의 도시'를 표방하며 고래 축제를 개최하는 등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암각화를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체험형 테마공원과 탐방로, 교육 프로그램, 워케이션 공간까지 아우르는 생동하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
이번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계기로 AI 기반의 스마트 유산관리 시스템, 암각화 세계센터 건립 등 미래형 전략도 병행된다고 한다. 그러나 혹여 관광 인프라라는 명분 아래 생태 환경이 훼손되거나, 과잉개발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유산의 본질을 배반하는 일이다.
앞서 말한 프랑스 라스코 및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의 보존사례를 참고하는 것도 좋겠다. 뛰어난 입체감과 색채감으로 '선사 시대의 시스티나 성당'이라 불리는 라스코의 경우, 1948년 일반 공개 이후 관람객 증가로 이산화탄소, 습도, 곰팡이 등이 발생하자 1963년 진본 동굴을 폐쇄하였다. 인근에 재현 동굴을 설치하였고 2016년에는 디지털 기술로 구현한 복제본을 개관했다고 한다. 실제 동굴은 철저히 밀폐 및 감시 상태에 있다고 한다.
인류 선사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알타미라 동굴도 20세기 중반 이후 관광객 급증하면서 벽화의 균열, 박리, 곰팡이 등의 훼손 발생해 2002년에 전면 폐쇄했다. 이후 동굴 입구 인근에 정밀한 복제 동굴인 '새 동굴(Neocueva)'을 설치해 교육과 관광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원본 동굴의 경우 2014년 이후 극소수 인원만 추첨제로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라스코와 알타미라의 경우는 문화유산의 공개와 보존 간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들은 동굴벽화로서 애로로 인하여 둘 다 결국 복제품을 통한 '간접 관람'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해야만 했다. 물론 문화유산은 원본이 주는 '아우라'가 최상이다. 그렇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후대에 잘 물려주어야 하는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때마침 현대 기술은 3D 스캔, 디지털 프린트, AI 제어 등을 능히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유산은 그 자체로 우리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장치다. 반구천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의 꿈은 유네스코의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이제 이 거대한 바위의 장엄한 서사는, 인류와 함께 나누는 이야기로 승화되어야 한다.

◆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원장
MBC 교양PD로 '인간시대', 'PD수첩' 등의 프로그램 연출을 맡았다. '중남미 한류 팬덤 연구'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MBC중남미지사장 겸 특파원을 거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으로 K-콘텐츠와 한류정책을 연구하면서 '공감 한류' 전파에 기여하고 있다. yonso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