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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였다.…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이트 피이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 스위이트 피이는 아사코 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처음 만났을 때 아사코는 성심여학원 소학교 1학년이었다. 스위이트 피이 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돼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때 그는 성심여학원 3학년이었다. 10여년이 흘러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세 번째 만남은 뾰족한 지붕과 뾰족한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 진주군 장교를 뽐내는 남자와 결혼한 아사코의 집에서였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 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이라는 소설 이야기를 한지 십년이 더 지났었다.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한 생에 한 여인을 세 번 만나는 피천득의 ‘인연’, 우리 수필문학의 교과서로 꼽히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스위이트 피이로, 또 한 번은 목련으로, 그리고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세 번째는 시든 백합으로. 스위이트 피이는 콩과의 한해살이 식물로 꽃말이 ‘우아한 추억’이다. 목련의 꽃말은 ‘이루지 못할 사랑’이고, 백합은 ‘순결, 변함없는 사랑’이다. 한 여인을 세 꽃으로 묘사하면서 한 생과 그 세월이 빚어놓은 인연을 아름다우면서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새벽안개처럼 아스라한 풍경으로 그리고 있다.
언어는 시의 상태를 동경한다는 말처럼, 그의 ‘인연’은 수필이면서 시처럼 읽힌다. 인연 속에 등장하는 꽃과 꽃말들을 따라가 보면 작가가 얼마나 여리고 섬세한 사람인지, 그 마음이 읽는 사람에게 잘 와 닿는다. 그리고 말미에 그 감정의 수습까지 우리 수필의 백미다운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피천득은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나 100년을 3년 앞둔 2007년, 향년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종로에서 양재동까지 서울의 좋은 땅을 두루 소유했던 구한말의 유명한 거부(巨富)였다. 아버지를 7세에, 어머니는 10세에 여의고 삼촌 집에서 자랐다. 호 ‘금아(琴兒)’는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이광수가 붙여주었다고 한다.
피천득은 16세에 중국 상하이로 유학, 호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거기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받은 가르침을 오래 간직했다. 1945년 경성제대 예과 교수를 지냈고, 1946~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녀 서영은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를 지냈고, 외손자는 바이올리니스트다.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발표하고 <소곡>, <가신 님> 등을 내놓으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어 수필 <눈보라치는 밤의 추억>, <나의 파일> 등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47년 시집 <서정시집>, 1960년 <금아시문선>, 1969년 문집 <산호와 진주>를 간행, 투명한 서정으로 일관한 작품세계를 선보였다. <산호와 진주>에는 그리움을 꿈으로 승화시킨 <꿈>이나 <편지>, 소박하면서도 전통적인 삶의 서정을 노래한 <사랑> 등 동심과 자연을 기조로 한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다. 1976년 수필집 <수필>과 번역시집으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시집>을 출간했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수필은 흥미를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않는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다.’ 수필 형식으로 쓴 수필론, <수필>은 은유를 통해 수필의 정수를 잘 표현한 그의 대표작이다.
<은전 한 닢>,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 <기다리는 편지> 등의 작품에서는 서정적이면서 섬세한 필치로 삶의 깊은 의미를 보여준다. 1996년 수필집 <인연>을 출간했는데 표제작 <인연>이 국어교과서에 실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엄마>, <유순이>, <아사코>, <서영이>, <구원의 여상> 등의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연민의 정을 아름답게 풀어놓고 있다.
피천득 기념관은 잠실 롯데월드 3층 민속박물관에 소박한 규모로 들어서 있다. 당초 이곳은 ‘이순신 기념관’ 자리였는데 전시품들이 낡아 문을 닫았었다. 롯데 측은 어떤 용도로 쓸까 고민하다가 아산병원 의사였던 금아의 둘째아들 수영씨와 연이 닿아 2008년 기념관으로 꾸미게 되었다고 한다.
기념관은 5개의 테마로 이뤄져있는데 ‘금아를 만나다’에서는 그의 일생과 연보를, ‘금아의 이야기’에서는 그의 유품과 책들을 만날 수 있다. ‘금아의 서재’는 그가 쓰던 작은 침대와 낡은 책상, 아끼던 인형 등 생전 반포동 아파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금아를 추억함’에는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영상관이 마련되어 있고, ‘금아의 인연’에는 어머니, 딸 서영, 아사코, 그리고 지인과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장식해 놓았다. 기념관에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청신한 얼굴이다.…신록을 바라다보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수필 「오월」 중에서)’ 이런 글도 있고,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어느 점집에 갔더니, ‘여자를 멀리하면 60까지는 살겠다’고 했는데 아마 너무 멀리해서 90까지 사는 모양이다.’라는 재미난 글귀도 걸려있다.
피천득은 ‘순수하고 고결한 정신세계를 참신하고 영롱한 언어로 풀어 한국현대수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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