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배터리를 보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제가 생각한 콘셉트는 ‘벽’이에요. 사무실 파티션으로 쓸 수 있을 만큼 얇게 만든 거죠. 앞으로 목표는 이걸 벽 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더욱더 얇게 만드는 거예요.”
성인이 두 팔 벌려 가볍게 들 수 있을 만한 쇠로 된 ‘상자’ 두 개를 앞에 놓은 채 설명하는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상자의 정체는 대용량 에너지 저장장치(ESS : Energy Storage System), 즉 배터리다. ESS는 발전소에서 야간에 버려지는 전력을 저장해뒀다가 전기 사용량 피크시간대나 전기 배송이 어려운 지역에 송전해주는 저장장치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자연재생에너지가 기상에 따라 일정하게 전력을 공급할 수 없는 데 비해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어 필수적인 미래 신재생에너지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충전이 필요한 전기자동차의 상용화 역시 대용량 배터리 개발에 명운이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대표는 “그간 배터리는 휴대전화나 자동차에 사용되는 소형 배터리 위주의 시장이 지배했지만, 앞으로는 한 마을이나 나라 전체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대용량 배터리 시장이 주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때문에 ESS의 관건은 얼마나 부피를 줄이느냐에 있다. 그가 꺼내온 각각 5kW, 1kW 용량의 배터리는 기존 대용량 배터리보다 3~10배까지 부피를 줄인 것이다. 그는 아직 더 개발 중이라며 정확한 치수는 공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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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는 기존보다 3~10배가량 부피를 줄인 대용량 에너지 저장 배터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
실리콘밸리서도 인정받은 기술력
혁신센터 네트워크 활용해 사업화 성공
김 대표는 얇고 가벼운 배터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 대부분의 배터리에 쓰이는 딱딱하고 무거운 흑연분리판을 대체할 소재부터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3년 자신과 같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출신 동료들과 회사를 설립한 뒤 대부분의 시간을 원천 소재 개발에 투자했고, 무게가 흑연분리판의 5분의 1에 불과해 가볍고 얇으면서 휘어지기까지 하는 복합재료 분리판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소재가 가격은 더 비싸지 않을까. 김 대표는 “휘어지는 복합재료를 사용함으로써 딱딱한 흑연분리판을 일일이 절단해야 하는 공정 과정을 단순화했다. 같은 이유로 공정 과정에서 소재가 깨지면서 발생하는 불량률을 획기적으로 줄여 생산비용을 절반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이 같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7월 개최된 창조경제대상 창업스타 공모전에서 미래창조과학부장관상(은상)을 받았다. 연달아 8월에 개최된 창조경제혁신센터 페스티벌에서 시연한 모의 크라우드펀딩대회에선 참가팀 가운데 최고 금액인 1억8700만 원을 투자받았다. 창조경제혁신센터 페스티벌은 전국 18개 창조경제혁신센터가 모두 구축된 것을 계기로 혁신센터 주역들이 모여 성과와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대외에 소개해 투자자들과 연결하기 위해 마련됐다. 2014년 3월 설립된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이하 대전혁신센터)는 대전시와 SK그룹의 협업으로 에너지, 정보통신기술(ICT), 반도체 분야의 혁신적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을 발굴해 글로벌 네트워킹과 마케팅을 지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전혁신센터 대표로 참가한 스탠다드에너지는 공모전과 페스티벌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으며 KA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광주과학기술원(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등 4개 과학기술 특성화대학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미래과학기술지주와 리튬전지 관련 회사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지난해 9월 대전혁신센터의 드림벤처스타 2기에 선발된 스탠다드에너지는 올 7월까지 대전혁신센터의 인큐베이팅(수출 전 과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지원을 받게 됐다. 김 대표는 드림벤처스타를 통해 가장 큰 도움을 받은 부분은 ‘네트워크 구축’이라고 말했다.
“우리 회사의 직원들은 개발자이기 때문에 사업을 하며 가장 부족한 게 비즈니스적인 부분이에요. 소재나 배터리를 사고팔 때 필요한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건 저희 힘으로 하기 어렵죠. 대전혁신센터에서 주선한 정부 관계자들과의 미팅은 거의 성사됐고요, SK에선 계열사 등 공식 채널뿐 아니라 임직원의 개인적인 인력망까지 총동원해 사업 미팅을 주선해줬어요. 기업의 투자를 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주변의 평판인데, 많은 투자처가 드림벤처스타에 선정된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안심하고 투자하죠.”
스탠다드에너지는 대전혁신센터와 대전테크노파크의 지원으로 지난해 실리콘밸리를 방문할 기회도 얻었다. SK가 현지 네트워크를 활용해 지원해준 덕분에 소재 판매처를 찾을 수 있었다. 며칠 전엔 배터리 공급 계약도 성사시켰다.
전국 혁신센터 연계되면 엄청난 시너지 나올 것
탄소섬유 주력하는 전북혁신센터와 협력 구상 중
이제 해외 사업자들이 스탠다드에너지를 먼저 찾는다.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마케터는 미국 지사 설립에 도움을 주겠다며 함께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와 현재 적극 검토 중이다. 3월에는 태국 경제사절단이 대전혁신센터를 찾아 스탠다드에너지의 기술을 점검하고 창업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김 대표는 “태국은 천연가스로 전기를 만들어 쓰고 있어 전기값이 비싸 신재생에너지에 관심이 높다. 태국과 같이 전력 공급에 어려움을 겪는 아시아 시장에도 진출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에너지시장이 급속히 확대될 걸로 예상되면서 해외 사업에 집중했던 스탠다드에너지는 국내 사업 활로도 모색 중이다. 김 대표는 “휴대전화 배터리 등 전통적 소형 리튬 배터리 사업자들이 단순히 많이 파는 것만을 목표로 했다면 대용량 배터리는 남은 전기를 사고파는 시스템이 중요하다. 우리가 개발하고 SK텔레콤 등이 유통 서비스를 하는 식으로 협력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이같이 국내 사업이 성공하려면 “혁신센터 간 연계가 핵심열쇠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 아주 잘돼 있고 우린 그 혜택을 맘껏 누렸죠. 아직까지 대기업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배터리 분야에서 우리처럼 이제 시작하는 기업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정부 지원 덕이 큽니다. 그 덕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기술 개발에 매진할 수 있었죠. 다만 아쉬운 건 각 부처, 지역별로 하는 사업이 분산돼 있어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지역·기업별로 특화된 사업을 지원하는 전국 혁신센터가 연계해 사업을 진행하면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탄소섬유 분야를 집중 지원하는 전북혁신센터와 소재 공급 거래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김 대표는 끊임없는 기술 혁신을 통해 ‘벤처다운 벤처기업’을 만들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위클리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