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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아닌 물로 휴전에 공헌한 ‘파로호’

[6월 호국보훈의 달 특집] 한국전쟁 66주년, 휴전의 큰 획 그은 ‘화천전투’

2016.06.24 정책기자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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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강원도 화천엔 전투가 치열했다. 유엔군을 비롯한 국군, 중공군, 북한군 모두 10만여 명이 전사했다. 서해쪽을 포기하며 피아 모두 화천전투에 총력을 기울인 이유가 있다. 화천발전소 탈환 때문이다.  

산 속의 바다 파로호, 숱한 아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속의 바다 파로호, 숱한 아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일본은 경인공업지구 군수공장에 공급할 전력이 필요했다. 1944년, 주민 3000여 명을 강제 동원해 화천댐을 완공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1000여 명이 사망했다. 시신처리를 위해 별도 화장터를 만들 정도로 일제의 만행은 잔인했다.

댐 건설 전, 그곳엔 대붕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었다. 한번 날갯짓을 하면 구만리를 난다고 믿었다. 인근 마을 이름이 구만리(九萬里)인 이유다. 

일제는 댐 건립 후, 호수 이름을 대붕호로 정했다. 1986년 정부는 평화의댐 건립을 위해 화천댐 방류를 시작했다. 그때 드러난 표지석. ‘대붕제’라 쓰여있다. 언뜻 보기엔 그랬다. 조선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격하시켰던 일본이 호수란 이름 대신 제방을 뜻하는 ‘대붕제’로 썼다. 그러나 한자를 자세히 보면 그것도 아니다. 대붕이란 이름이 거슬렸던 일본은 대붕을 뜻하는 붕(鵬)자 대신 비슷한 한자인 초명새 의미의 명자로 표기했다.

1955년 1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이 호수에서 중공군 3만 명을 궤멸시켰다는 의미로 파로호(깨뜨릴 破, 오랑캐 虜, 호수 湖)란 이름을 붙일 때까지 화천 사람들은 이 호수를 대붕호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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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제가 아니다. 봉황이란 이름을 붙이기에 인색했던 일본은 한자인

대붕제가 아니다. 봉황이란 이름을 붙이기 꺼렸던 일본은 ‘대명제’라고 썼다.


1945년 8월 10일, 폐망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자, 미국은 한반도에 38선을 긋고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분할 관리하는 데 합의했다. 화천댐은 38선 이북에 놓였다. 초기 서울로 전기를 공급했던 북한은 한국전쟁 2년 전부터 전기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전기의 중요성을 인식한 피아 모두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이유다.

한국전쟁 66주년을 맞았다. 꽃 같은 젊은이들의 조국수호 희생 대가로 지금 우리는 선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안타까운 건 그들의 값진 희생이 점차 잊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한민국 곳곳엔 크고 작은 전투사가 있으나 그렇지 못한 곳이 있다. 강원도 화천 파로호 전투다.

화천이 38선 이북에 위치해 있다는 것과 험준한 산악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종군기자들의 출입이 원천 봉쇄됐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치열했던 파로호 전투사는 구전으로 전해지다 당시 참전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그마저 우리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다.

한국전쟁 66주년에 즈음해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분들 증언을 들으려 했지만, 연로해서 정확한 기억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따라서 화천 전투 연구에 몰두해 온 DMZ 스토리센터 한상룡 대표를 통해 파로호 전투에 대해 인터뷰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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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스토리 센터 한상룡 대표
DMZ 스토리센터 한상룡 대표


“파로호 전투는 두 장면으로 나뉜다. 하나는 화천댐 폭파 작전이고, 또 하나는 대규모 중공군을 섬멸한 화천발전소 탈환 작전이다.”

- 한국전쟁 당시 화천댐을 폭파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 작전을 위해 최초로 공중에서 어뢰를 사용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 또한 최근에 밝혀진 것으로 안다.  

1.4후퇴 직후인 1951년 1월, 미8군은 공군에 화천댐 폭파를 요청했다. 몇 대의 B-29 폭격기가 유도탄 6톤을 투하했지만 댐 폭파에 실패했다. 적 고사포를 피하기 위해 높은 상공에서 투하했기 때문이다. 단 한 발도 댐 수문을 명중시키지 못했다.

미8군이 북진하자 북한군은 수공작전을 실행했다. 불시에 화천댐 수문을 열어 북한강 하류의 교량 붕괴와 아군에 심각한 피해를 끼쳤다. 수공을 막기 위해 미군은 제9군단 소속 레인저 중대를 투입, 댐 폭파를 시도했으나 중공군의 저항에 밀려 실패했다.

1951년 4월 30일, 미8군은 미해군 77기동함대 사령관 오프스티 제독에게 화천댐 수문 두개를 파괴해 줄 것을 요청했다. 2000파운드 자유낙하폭탄 2발씩을 탑재한 AD-1스카이레이더 6대와 적 대공화기 제압을 위한 F-4U 코르세이어 전투기 5대가 동시에 출격했다. 스카이레이더기의 급강하 폭격으로 수문 한 개에 구멍을 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미8군 추가 공격 요청에 해군은 공격무기를 어뢰로 바꿨다. 다음날 11시, 8대의 AD-1 스카이레이더기들이 어뢰를 장착하고 동해에 떠있던 항공모함인 프린스턴호에서 이륙했다. 공중에서 파로호로 떨어져 화천댐 수문을 향해 날아간 어뢰 6발은 댐 수문에 명중했다. 결국 수문 한 개는 완파됐고 다른 하나는 수문 하단을 파손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적은 더 이상 수공을 할 수 없게 됐다. 이 작전은 한국전쟁 중 해상이 아닌 내륙 호수에서 어뢰를 사용한 유일한 전투로 꼽힌다.  

한국전쟁 당시 화천댐 수문 파괴 장면(출처=DMZ 스토리센터 한상룡 대표]
한국전쟁 당시 화천댐 수문 파괴 장면(출처=DMZ 스토리센터 한상룡 대표)
 
- 화천 발전소 탈환에 사활을 걸었던 것은 전후 복구나 재건을 위해 전기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우리나라 전력 상황을 설명해달라.  

서울 재점령이 목표였던 중공군 제1차 춘계공세(1951.4.22.~4.29)를 저지한 미8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은 노네임선(서울-홍천-인제-양양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일제 반격했다. 중공군을 화천전투를 통해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 휴전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낸다는 것이 핵심 의도였다.

이 작전은 군사적 목적 외에 화천발전소 탈환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민의 간절한 염원도 배어 있었다. 해방 당시 한반도 전체 발전설비 용량은 172만3천KW였으나 그 중 88.5%인 152만4천KW가 북한에 있었다. 남한엔 19만9천KW 생산시설이 유일했다. 그나마 실제 전력생산은 4만3천여KW에 그쳤다.

부족한 전기는 북한에서 송전해준 전력으로 충당했는데, 5.10 남한 단독선거를 빌미로 북한은 1948년 5월 14일 소위 5.14 단전조치를 취했다. 남한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전차운행 중단, 격일제 송전, 전열기 사용 금지와 같은 조치가 불가피했다. 지금은 화천발전소 의존도가 낮지만, 당시 그곳에서 생산된 발전용량은 남한에 절대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에게 발전소 탈환을 신신 당부했던 이유다.  

파로호 카페리. 구만리 선착장에서 평화의 댐까지 1시간 30분 소요된다.
파로호 카페리. 구만리 선착장에서 평화의 댐까지 1시간 30분 소요된다.


- 발전소 탈환을 위해 중공군 3만 명이 몰살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다.  

유엔군 반격에 밀린 중공군(제3병단 및 제9병단 예하 5개 군단) 패잔병 3만여 명은 미 제1해병사단으로부터 양구방향 퇴로를 차단당하자 461번 지방도(화천군 간동면 오음리~구만리 구간)를 따라 철원방면으로 퇴각로를 정해 밀집대형으로 북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철원쪽 퇴로는 국군 6사단이 막고 있었다.

미 제8군사령부는 중공군 완전 섬멸을 계획하고 그 임무를 국군 제6사단(사단장 장도영 준장)에 맡겼다.

1951년 5월 27일 아침, 공격개시 명령이 떨어졌고, 제6사단 제2연대는 매봉과 화천발전소 탈환 임무를, 제7연대는 부용산-병풍산-설악재봉 공격 임무를 부여받았다.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벌어진 전투는 엄청남 살육전이었다. 지휘체계가 붕괴된 중공군은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이 무리를 지어 파로호 옆 도로를 통해 철원 방면으로 이동했다. 이들 중공군은 국군 6사단에게 관측되어 궤멸됐다.

461번 도로를 통한 탈출이 불가능해진 중공군 수천 명은 대붕호를 헤엄쳐 건너다 익사했다. 겨우 살아남은 패잔병은 떼를 지어 백기 투항했다. 국군 1개 소대가 중공군 1개 대대를 생포한 기록도 있다.

6사단이 461번 도로주변 수색을 벌일 때 중공군 시체가 도로, 능선, 계곡마다 널려 있었다. 불도저를 동원해 차량이 통과할 수 있도록 시체를 길 옆으로 밀어내야 할 정도였다. 수만 명의 중공군 시체를 화천군 간동면 유촌리 서쪽 산기슭에 묻었다.

대붕호란 이름을 가진 호수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로호로 바뀌었다.
대붕호란 이름을 가진 호수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로호로 바뀌었다.

- 말한 내용을 증명할 객관적 자료가 있나?

1968년 홍콩에서 발행된 <중공군인지(中共軍人誌)-황진하 黃震遐 편저>는 화천지구 전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5월 20일부터 진사병단(陳謝兵團 : 중공 제3병단)은 미 제 10군단으로부터 유례없는 대량의 포사격, 즉 1일간에 100만 발을 쏘는 포격을 받고 공격이 돈좌되었다. 이어 5월 22일에는 미 제9군단이 미 제10군단 좌측으로 진출함에 따라 팽덕회(彭德懷)가 총퇴각 명령을 하달했다. 그 뒤로 진사병단은 미 제9군단과 미 제10군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전선이 붕괴되면서 사상자 10만, 포로 1만, 그리고 병단의 모든 장비를 잃어버린 미증유의 참패를 당했다.’라는 자료가 뒷받침하고 있다. 


신광태
정책기자단|신광태naul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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