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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삶을 바꾼 것들 ⑧] 대중가요

유행가 마디마디 시대가 녹아있고…

2005.07.06
우리나라 대중가요는 서민의 삶과 궤적을 같이해 왔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은유적 가사들이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고, 트로트는 지친 삶에 활력을 불어넣듯 우리들의 흥을 돋웠다. 조용필과 서태지는 대중가요의 혁명을 이끌었다. 발라드가 소녀들의 가슴을 적시더니 지금은 현란한 댄스음악이 신세대 젊은이를 사로잡고 있다.


해방 후 한국가요사는 1945년 8월 말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군 장교들이 입국해 여장을 푼 조선호텔에서는 이들의 환영 파티를 위해 한국인 연주단을 초청하게 되었다.
이때는 정식 악단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수소문 끝에 실내악단을 급조했는데, 당시 멤버로 전희봉·이동춘·김준덕·김희조·김호길·전봉열 등이 미국 민요와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 <카르멘 실버 왈츠> <창공> 등을 연주했다. 이들은 격식을 갖춘답시고 모닝코트에 일본 신발인 ‘치카다비’를 신고 연주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갑작스럽게 맞은 해방이었기에 우리 사회의 질서는 엉망이었고, 생활이 어려웠던 음악인들은 자연스럽게 미군부대 주변을 맴돌았다. 이때 널리 불린 곡들로 등이 있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가수가 거의 드물어 영어발음을 한글로 토를 달아 가사의 뜻도 모르고 외워 부르고는 했다. 가수 김해송은 을 유독 잘 불렀고 레코드까지 취입했다.



6·25전쟁은 비극이었지만 한국가요사에는 새로운 전기로 작용했다. ‘미8군 쇼’는 우리 가요계의 스타를 배출하는 등용문 역할을 했다. 6·25 후 전국 각지에 미군부대와 기지촌이 생기고, 근처에 미군 클럽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미8군 쇼 단체가 등록됐다. 처음에는 악단 위주로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음악을 연주하다 곧이어 ‘플로어 쇼(패키지 쇼)’라는 명칭으로 노래와 춤이 섞인 무대가 자리 잡았다.

‘미 8군 쇼’는 스타 등용문

미8군 쇼를 통해 성공한 인물로 첫 손꼽는 김시스터즈가 있다. 이난영의 자제인 숙자·애자·민자로 구성된 이들은 당시 미국에서 인기 있던 앤드루 시스터스·맥과이어 시스터스의 노래를 잘 불러 미군들을 열광시켰다. 초기 미8군 쇼에서 활약한 팀은 김시스터즈 외에 김보이즈·패티김·이금희·서수남, 그리고 코리안키튼즈의 윤복희, 한명숙·임희숙·신중현 등을 들 수 있다.

전통적인 트로트를 구사하던 가수들도 빼어난 실력을 보였다. 트로트와 신민요 쪽에서 인기를 누렸던 가수는 한복남·박재랑·이해연·현인·명국환·권혜경 그리고 이미자였다. 이미자는 이미 1950년대 후반 <열아홉 순정>으로 인기를 누렸고, 이후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으로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1961년에는 한명숙의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노래를 통해 유행이 번져 노란 셔츠는 택시운전사들의 유니폼으로도 정착했다. 이 무렵 최희준은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로 인기를 구가했고, 1963년에는 현미가 <밤 안개>를 불러 군사혁명 후 억압적인 한국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드러냈다.

1965년 남일해는 <빨간 구두 아가씨>를 발표했고, <동숙의 노래>를 들고 나온 문주란은 허스키한 음색으로 한 시기를 풍미했다. 1966년 배호는 <만나면 괴로워>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마지막 잎새> 등을 노래했다. 레코드 회사 역시 20여 개로 늘어 오아시스·대도·유니버설·지구·아세아·성음 등 유수의 레코드사가 탄생했다.

이때 신성처럼 나타난 음악인이 바로 작곡가 겸 가수 신중현이다. 그는 1960년대 초 미8군 쇼 무대에서 활약하며 주옥같은 곡을 선보였다. 1963년 <빗속의 여인> <커피 한 잔> 등을 발표했고 ‘에드 4’라는 그룹을 조직해 서정길(보컬 리듬)·한영현(베이스기타)·권순권(드럼)과 함께 당대 최고 그룹을 이끌었다. 신중현의 후반 작품들은 더욱 깊어진 원숙미를 보여줬다. <미인> <거짓말이야> <님은 먼 곳에> 등은 현재까지도 꾸준히 불리는 명곡으로 남아 있다.

남진·나훈아 공연 때는 공장 휴무

1960년대 중반에는 중창단들의 저력이 돋보였다. 초반부터 활약한 블루벨즈는 <검은 장갑> <미워도 한세상> 등을 발표했고, 비슷한 성격의 자니브라더즈가 활약했다. 이와 함께 솔로 가수로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의 차중락, 민요풍의 김세레나의 활약도 두드러진 시기였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는 한국 트로트 음악의 전성기였다. 1966년 최희준의 <하숙생>, 1967년 남진의 <가슴 아프게>, 정훈희의 <안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1969년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대중의 심금을 울린 ‘명곡’들이 잇따라 발표됐다.
이 시대의 애창곡들은 중년에서 청년세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에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당시 가요계는 트로트가 대세였는데, 남진이 월남에 갔다 온 사이 나훈아가 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에 남진은 새로운 트로트를 선보이며 정통 트로트를 표방하던 나훈아에게 맞서며 트로트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남진은 그 유명한 허리춤과 함께 <님과 함께> <그대여 변치마오> 등의 노래로 대중을 열광시켰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렸던 그는 트로트에 로큰롤을 가미한 댄스곡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이 리사이틀(극장 쇼)을 할 때면 해당 지역 공단 여공들이 단체로 결근해 그 지방 공장들이 모두 자동 휴무할 정도였다.

트로트의 건너편에는 <커피 한 잔>의 펄시스터즈에 이어 <님은 먼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의 김추자가 슈퍼스타 대열에 올랐다. 그들 뒤에는 곡을 준 신중현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음악을 ‘소울’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 초부터는 재즈계 출신의 음악인과 그들의 음악을 노래했던 가창력 있는 대형가수들이 출현했다. 패티김·정훈희·현미·최희준 등 당시 대형가수들의 다수가 재즈 계열의 음악인이다. 이들 뒤에는 이봉조·정성조·길옥윤 등의 작곡가가 있었다. 이들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재즈와 다양한 가요 스타일로 가요시장을 석권했다.
이들은 대부분 미 8군 무대에서 재즈풍의 노래를 하던 가수들이거나 색소폰이나 피아노 등으로 연주하던 빅밴드 출신들이다.

한편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통기타 붐은 청바지와 생맥주로 표상되는 청년문화 아이콘과 더불어 급속히 세력을 넓혀 나갔다. 1971년 초, 라나 에로스포의 <사랑해>와 은희의 <꽃반지 끼고>의 단순한 아르페지오 선율은 대학가의 담을 넘어 시장으로 진군해 갔다.

그해 여름, 그 뒤로도 오랫동안 청년문화의 송가가 된 <아침이슬>이 김민기와 양희은 짝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리하여 통기타 음악은 김정호·송창식·이장희·어니언스 같은 포크 계열 스타들에 의해 1970년대 중반 주류의 최정상에 등극하는 열광적 에너지를 분만했다.

하지만 이 절정기는 아쉬울 정도로 짧았다. 유신정권은 1975년 가요 규제 조치를 내린다. 그러나 사랑과 자유를 향한 청년 지식인들의 복화술은 1970년대 후반의 암흑기에도 여전히 계승되었다. 진지한 자연친화력을 오선지에 옮긴 이정선, 질박한 전통적 서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정태춘, 은둔주의의 고요함을 펼친 조동진 같은 거목들이 전 시대의 영광을 내면적으로 성숙시켰다. 이는 1980년대 한국 포크음악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을 예고하는 징후였다.



1979년 윤시내는 가요제 스타일의 곡 <열애>로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 곡의 핵심은 윤시내의 ‘핏발 서는 가창력’과 현을 주로 쓰는 팝 오케스트라 편곡의 광대한 스케일이다. <열애>는 이후 1980년대 초 주류 성인가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초의 빅 히트곡인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이용의 <잊혀진 계절>,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등의 사운드와 스타일은 모두 <열애>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대중음악 혁명가 조용필과 서태지

1980년대 한국가요사는 조용필에서 시작된다. 그는 1980년 <창밖의 여자>와 <촛불> 등을 통해 한국 성인 발라드를 ‘조용필식’으로 바꾸었다. 그는 이 해 모든 가요제의 대상을 휩쓸었고 <창밖의 여자>는 최고의 인기를 얻은 최고의 가요가 됐다. 그는 현 중심의 오케스트라 연주 대신 피아노와 신시사이저를 사용해 1970년대 말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1980년대의 새로운 사운드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후 이용의 <잊혀진 계절>과 임병수의 <약속>, 그리고 이선희의 의 성공으로 발라드는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가요 장르가 됐다.

1980년대 음악의 주류였던 발라드는 이문세·변진섭·윤상·신승훈이 이끌어갔다. 이들은 발라드 곡을 타이틀로 하고 당시 약간 비대중적이라고 인식되던 팝 발라드를 다양하게 포진시키며 앨범의 완성도를 높였다. 상품성이 높아진 이들의 앨범은 수십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방송이나 앨범 판매시장에서 가요가 팝뮤직을 포위하며 우위를 점하게 된다.

1980년대는 많은 평자들이 우리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로 부르는 시기다. 많은 음악이 공존했던 바람직한 시대였고, 라이브의 강자들이 방송에 출연하지 않으면서도 나름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놀라운 시기이기도 했다. 김현식·들국화·한영애·봄여름가을겨울·동물원 등이 TV를 통하지 않고도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을 입증했고, 그들이 보여준 음악적 수준 역시 만만찮은 것이었다.

1990년대 서태지의 등장은 가수가 노래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서태지는 약관의 나이에 작사·작곡에서부터 편곡·프로듀싱·엔지니어링에 이르기까지 음반 제작 전 과정에 관여했다. 당시 서태지는 음악계의 ‘혁명’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나아가 그는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통해 본격적으로 ‘힙합’이라는 장르를 대중에게 알린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1990년대 말부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룹이 힙합을 표방하고 가요계에 등장했다. 미국 교포들로 구성된 업타운은 기존의 가요와 차별되는 본토 힙합에 비교적 가까운 곡들을 선보였고, 이현도도 자신의 솔로 앨범 몇 곡에서 힙합을 시도했으며, 지누션은 한국적 힙합을 통해 많은 인기를 끌었다.

댄스음악이 요즘 대중음악계 지배

김진표는 국내 최초로 랩으로만 구성된 열외 앨범을 내놓았다. 특히 그는 자신의 가사에서 ‘라임(rhyme)’의 중요성을 강조해 화제를 끌었다. 이후 힙합은 단순히 댄스음악의 중간 중간에 가미되는 용구적 성격을 벗고 독자적 장르로 인식되어 힙합만을 추구하는 가수들이 늘어났다. 그들의 음악은 본토의 정통 힙합에 가까워졌을 뿐 아니라 이를 한국적으로 수용하려는 독창적 시도가 이뤄지기도 했다.

2000년대 한국 대중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연장선 위에 존재한다. 10대의 음악적 기호가 발라드에서 댄스로 전향한 것이다. 좋아하는 가수가 이문세·변진섭·신승훈 등에서 서태지·듀스·룰라 등으로 바뀐 1990년대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화려한 춤솜씨와 열정적 가창력을 필요로 하는 댄스음악은 10대들이 가장 쉽고 편하게 받아들이기 쉬운 장르로 한국 대중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다.

(자료 : 코리아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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