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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익숙해서 인식 못했던…길 위에서 만난 ‘도교’

[국립중앙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연재] ① 서울 종로 ‘한국의 도교 문화’

2014.03.20 정책기자 진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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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월의 아침은 때론 쌀쌀하고 때론 따사롭기도 하다. 15일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서울에서 맞이하는 ‘길 위의 인문학’은 익숙한 곳에서의 알 수 없는 설렘을 가져다줬다. 조금은 더디게 가더라도 충분히 교감할거리가 산재한 서울에서 도교를 만난다고 하니 그 설렘이 배가 된다. 일상에서 너무 익숙해져서 종교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하지만 너무나 깊숙이 밀착돼 있는 민간 신앙의 흔적을 찾아 서울 동묘로 향했다.

올해로 5년차를 맞는 국립중앙도서관의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의 2014년 첫 행선지다. ‘한국의 도교 문화’라는 주제로 서울 동묘에서 출발, 소격동과 삼청동과 소격동·자하문·부암동·사직단·단군성전 등을 돌며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가 아로새겨진 유적지를 따라 걷는 것이 그 시작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번 주제를 접하며 여실히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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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년차로 접어든 국립중앙도서관의 ‘길 위의 인문학’ 올해 첫 행선지는 동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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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들의 발랄함이 동묘를 깨운다

여중생들의 발랄함이 동묘를 깨운다.

‘길 위의 인문학’은 현장 탐방과 연계한 사전 강연회를 열고 추천도서의 독후감을 바탕으로 탐방객을 선별한다. 독서문화 진흥과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 아래 만인이 공감하고 느끼는 인문학의 길로 안내하기 위한 취지이다. 자신의 위치와 나아갈 길을 찾고자 하는 듯 날씨가 조금 쌀쌀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탐방객들의 얼굴에는 진지함과 설렘이 묻어나왔다. 

10대 중학생부터 70대 어르신까지 각계각층의 탐방객들은 두 대의 버스에 나눠 탔다. 참고문헌으로 받아든 ‘한국의 도교문화 요약본’을 건네받은 탐방객들은 첫 방문지인 동묘로 가는 내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동대문구 숭인동은 오래 전부터 전통시장과 골동품 시장이 성행하던 곳이다. 지하철 3호선의 동묘역으로도 명명돼 있지만 동묘가 왜 동묘인지,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는 많은 이들이 모르고 지나친다.

필자도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만 동묘의 역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언젠가 TV에서 관우왕의 사당이 서울 어딘가에 있다는 걸 들었는데 그곳이 동묘인 줄은 몰랐다. 그만큼 많은 이들의 의식 밖에 자리한 동묘라는 곳에 다다르니 감회가 새롭다. 동묘는 ‘동관왕묘’의 줄임말로 관우의 사당을 모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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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어수선함과는 달리 동묘의 현판과 단청이 새롭다

주변의 어수선함과는 달리 동묘의 현판과 단청이 새롭다.

관우는 충의가 뛰어나 죽은 뒤 중국의 민간에서 숭배돼 도교의 신이 되었다. 임진왜란에 명의 장수로 활약한 이여송은 관우가 꿈에 자주 등장해 전투에서 이겼다고 한다. 선조가 명의 요청으로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 또는 관왕묘를 서울과 지방에 세웠고, 마침 중국소설 삼국지가 인기를 끌면서 민간에서 숭배하기 시작했다. 고종 때는 관우와 관련된 ‘도교경전’을 널리 배포하는 등충절의 상징이라며 관우신앙을 민간에 널리 전파하기도 했다.

근대에는 정치적인 영향으로 거의 폐가 수준으로 방치되다가 서울의 동묘만이 남았는데 그동안은 잡상인의 장터로, 취객의 실수터로, 부랑자의 잠터 등으로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것을 최근 종로구청에서 보수해 동묘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실제로 외관과 경내 모두 깨끗하고 말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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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빙강사 정재서 교수의 열강에 귀귀울이다

초빙강사 정재서 교수의 열강에 귀기울이고 있는 탐방객들.

정재서 교수가 이번 탐방의 초빙강사로 나섰다. 지난 3월 5일 ‘한국의 도교문화’란 주제로 진행된 사전 강의에 이어 이번 탐방길에 함께 오른 정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에서 ‘도교는 우리 문화의 뿌리이기에 다시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묘와 관우장군의 이야기. 그리고 고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한중 문화의 연결고리까지 하나도 흘릴 것이 없는 그의 달변에 모두가 빠져들었다.

나도 모르게 차렷 자세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멀리 사당 앞에 빨간 상의의 한 아주머니가 연신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재를 올린다. 살그머니 일행에서 벗어나 그 분 곁으로 갔다. 망우동 집에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숭인동 동묘에 와서 관우신께 재를 올린다는 아주머니는 18살에 시집 와 한 번도 재를 거른 적이 없다. 시어른들 하던대로 초하루엔 진지(밥)와 나물, 보름엔 돼지고기에 과일 안주에 약주를 올린다고 한다. 한 번도 걸러본 적이 없기에 가족 모두 무탈하다며 재를 올리는 그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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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사당 앞에 빨간 상의의 한 아주머니가 연신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재를 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사당 앞에 빨간 상의의 한 아주머니가 연신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재를 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 교수는 “한중 역사의 현장인 동묘가 좀 더 많은 중국 관광객에게 알려지고, 우리 민간신앙의 근간이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한중의 오래된 역사 왜곡도 우호의 문화로 잘 풀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동묘의 겉모습을 보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내재적 의미를 드러내고, 진정성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오늘의 한중 관계를 신뢰와 우의의 토대 위에 구축하는 역사적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동묘를 떠난 버스는 이어 삼청동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만난 탐방객 최동인 씨와 김치경 씨는 ‘길 위의 친구’이다. 최동인 씨는 작년 탐방 중에 강화와 원주로 떠난 길 위의 인문학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집이 태릉이지만 단 한 번의 지각 없이 매번 참여한다는 그는 “탐방 때마다 매번 기대되고 설렌다.”고 말했다.

이어 도착한 곳은 삼청동. 필자는 삼청이 그냥 세 가지의 청색을 뜻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상청(上淸)’, ‘태청(太淸)’, ‘옥청(玉淸)’을 일컫는 말이란다. 삼청동은 예부터 물 맑고 산 깊고 사람 인심 좋아서 살기 좋은 동네라고 불렸지만, 그보다도 도교의 삼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삼청전(三淸殿)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다.

자하문
부암동에 있는 창의문.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삼청공원은 예전 선남선녀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했다. 그 선인들이 옛 삼신의 정체를 알았을까?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성지에서의 데이트가 뭍 정령들의 정기를 통해 후대로 이어졌다면 아마 그들의 자손은 번창했을 것이다. 성신이 읊조리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소격서로 향한다.

소격서는 조선시대 국가의 안녕과 재액을 쫓는 도교의 제사의례, 재초(齋醮)를 거행하던 장소였다. 삼청동 파출소 앞에 자리잡았다. ‘자리 한번 잘 잡았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조광조는 익히 알았고 소격서도 역사시간에 배웠지만 심심하면 나들잇길로 드나들던 삼청동에 소격서가 있는 줄은 몰랐다. 참으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와닿는 순간이었다. 

소격서는 국립 도교기관으로 조광조에 의해 폐했다가 기묘사화 이후 회복됐지만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없어졌다. 유학을 숭상하고 떠받들어 일찍이 이상 사회를 꾀하고자 했던 조광조는 소격서를 폐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달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청동 파출소 자리에 ‘소격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삼청동 파출소 자리에 ‘소격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점심 잘 먹고 당도한 곳은 자하문. 자색은 ‘신선의 색깔’이라고 한다. 자하는 자색 구름의 기운이라고 한다. 자색을 색 중의 최고라고 해 ‘창의문(彰義門)’이라고도 하며, 자하동의 유래와 함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자색을 불러 구름처럼 넘나든다. 자하문을 드나들면 신선과의 놀음도 가능할까? 함께 온 여중생 7명이 연신 발랄한 웃음을 자아낸다. 일일이 역사와 지리적인 위치는 외우지 않아도 친구들과 열심히 거닐며 나누었던 정담들이 이들에겐 또 하나의 기억으로 자리할 것이다. 

자하문을 지나 부암동의 백석동천 백사골로 가는 길은 야트막한 산을 하나 넘나드는 길. 서울시티투어버스도 들르는 ‘환기미술관’부터 백석동천까지 걷고 또 걸었다. 이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일본인 나츠키양은 “서울 역사 탐방을 한다기에 따라나섰는데 무슨 말인지 100% 이해는 안되지만, 한국과 일본의 문화에는 닮은 점이 많다.”며 시종 미소를 잃지 않았다. 

부암동의 백석동천은 경치 좋은 북한산을 배경으로 중국의 명산 ‘백석산’을 본떠 이름붙인 ‘백석동천’이다. 그만큼 풍경이 수려해 옛 고관들의 건물지와 연못지가 남아있는 곳이다. 건물 위로는 백석동천이라 크게 새겨진 바위가 있어 백석동천, 또는 백사골이라고도 불린다. 

백석동천은 도교의 신선이 사는 곳이다. 천하에는 36동천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이고, 경치와 산수가 모두 빼어난 곳이라서 많은 이들의 수양터이자 고관들의 집터, 별장터가 많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항복과 김정희의 별장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겸재 정선도 백석동천을 배경으로 팔경을 그렸다고 한다. 신선이 사는 곳이라니 왠지 호젓해지는 기분으로 도교를 익혔다.

사직단에서 마지막 강의를 듣다.
일본인 나츠키(가운데) 양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에 닮은 점이 많다.”며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사직단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사직공원에서 많이 놀았다. 이모댁이 근처라서 자주 오가며 공원과 수영장에서 한여름을 새카맣게 그을리기도 했다. 그랬던 공원이 사직단(社稷檀)이라는 제 명분을 찾았다. 일제 강점기에 사직단을 공원으로 만들고 훼손했던 것을 1963년에 대한민국의 사적 제121호로 제정하고, 2011년도에는 사직단으로 완전히 명칭을 바꿨다.

정재서 교수는 “종묘란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사직단이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1년에 네 차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만큼 조상을 숭배하는 정신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가장 중요한 제례를 지내는 곳으로 고려 도교의 문화를 그대로 본떴다.”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경복궁의 서쪽에 지은 제단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사직단이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사직단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도교는 유·불교처럼 세력을 떨친 적도 없고, 실제로 교단과 같은 종교 조직을 갖춰본 적도 없지만 한국문화의 내면 혹은 잠재의식을 지배해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도교는 무속과 민속, 그리고 신종교의 밑바탕에 강력한 영향을 드리우고 있으며, 심지어 유교와 불교 속에도 스며들어가 있다. 한국의 도교는 아직도 발굴하고 검토해야 할 자료가 풍부하다. 세계 도교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 도교는 새로운 보고일 뿐 아니라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이렇게 한나절에 걸친 길 위의 인문학이 끝났다. 동묘에서 단군성전까지 다소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열심히 보고, 느끼며 가슴 속에 잘 담아왔다. 동천도 자하도 모두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것은 그저 느끼지 못해서라는 것. ‘알고자 하면 다 보이고 느낄 수 있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었던 의미 있는 탐방길이었다.

참가 신청은 ‘길 위의 인문학’ 홈페이지(nl.go.kr/tour)에서 하면 된다. 추천 도서 독후감(100자 이상 1000자 이하) 제출자에 한해 선발한다. 참가비는 당일 탐방의 경우 어른 3만 원, 청소년(18세 이하) 2만 원, 1박2일의 경우 어른 7만 원, 청소년 5만 원.

정책기자 진혜선(프리랜서) carolei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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