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한 지 꽤 됐지만, 학교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갈 일이 생겼다.
날이 너무 더워서 계속 망설이던 참에, 도서관에 6·25 참전 호국영웅 디지털 명비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겸사겸사 다녀왔다.
보훈 정책이나 전쟁 기념비 같은 주제는 평소 잘 접할 일이 없었지만, 도서관이라는 익숙한 공간에 설치됐다고 하니 왠지 직접 보고 싶어졌다.
디지털 명비가 설치된 연세삼성학술정보관 출입구. 일상 속 보훈의 공간이 도서관 한쪽에 조성됐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니 '연세 한강 북라운지' 맞은편에 디지털 명비가 설치돼 있었다.
눈에 띄게 꾸며진 공간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이번에 제막된 이 명비는 6·25전쟁 당시 국내에 존재하던 37개 대학 중 최초로 설치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출신 6·25 참전 호국영웅 1,363명의 이름이 디지털 화면 속 기둥에 빛으로 각인돼 표출되는 방식이다.
모든 이름을 석재에 새기기 어려운 현실을 기술로 보완한 사례로, 이름 하나하나가 천천히 화면을 타고 내려갔다가 올라오며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오래도록 시선을 붙잡았다.
연세대학교 출신 호국영웅 1363명의 이름이 디지털 화면에 빛으로 표출되는 방식으로 구현됐다.
이 기념비는 단순한 추모를 넘어, 보훈의 가치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일지라도, 그 이름 앞에 잠시 멈춰 서는 순간부터 과거와 연결될 수 있다.
특히 학생들이 자주 드나드는 도서관 안에 자리한 만큼,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기술과 기억이 만나는 이 조용한 기념비는 정책적 의미는 물론 교육적, 사회적 상징성까지 함께 품은 공간이었다.
화면 옆에 부착된 QR코드를 통해 참전 유공자의 상세 정보를 조회할 수 있다.
디지털 명비 앞에 서자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나 역시 전쟁이 한참 지난 뒤 태어난 세대로서, 6·25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은 없다.
다만, 국가유공자이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통해 들은 이야기들 덕분에 간접적으로나마 그 시절을 상상해 볼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보다 어린 세대들은 이제 그조차 접하기 어렵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은 점점 더 먼 일이 되어가고 있다.
군별, 계급, 입대·전역 일자, 연세대학교 입학 일자 등이 기록돼 있다.
그렇기에 학교 안, 그것도 도서관처럼 일상적인 공간에 이 명비가 자리한 사실이 더욱 인상 깊었다.
일부러 찾지 않더라도, 지나가다 이름 하나를 보고 잠시 멈출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되새기는 일은 특정한 날에만 하는 기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지를 돌아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보훈 방식이 아닐까.
후배로서 선배들의 이름 앞에 직접 서보는 이 경험은 나에게도 뜻깊은 시간으로 남았다.
출입 동선에 설치돼, 도서관 이용 시 항상 시야에 들어온다.
한편, 국가보훈부는 지난 2016년부터 학교, 지자체 등과 협력해 6·25 참전유공자 명비 건립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현재까지 총 90곳에 명비가 설치됐으며, 올해도 조선대학교, 여수고등학교, 서산 부석초등학교, 김해 장유중학교, 대구광역시 남구 등과 함께 새로운 명비 건립이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지역과 공간에 명비가 세워지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보훈을 마주하게 되기를 바란다.
전쟁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그 시간을 살아낸 이들의 이름들은 오래도록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 (보도자료) 국내 첫 연세대 6.25참전 호국영웅 디지털 명비 23일 제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