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지도를 좋아했다.
사회과 부도나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세계를 향한 꿈을 품었던 학창 시절.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종이 지도를 펴놓고 루트를 그려보는 일부터 설렘의 시작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돌아볼지 선을 긋다 보면, 마치 그 길을 이미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단순한 안내가 아니라, 지도가 상상과 기대를 자극하는 도화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립지도박물관이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묘하게 마음을 끌었다.
전시실 개편을 마치고 새롭게 문을 연 국립지도박물관.
정책기자단 활동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된 국립지도박물관은 최근 전시실을 개편하고 7월 31일부터 새롭게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역사관에 59점의 유물이 새롭게 공개되었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전시 구성도 강화됐다는 소식에 직접 다녀왔다.
고지도와 함께 시대별 지도 제작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관 내부.
전시장에 들어서자 익숙한 듯 낯선 고지도들이 눈에 들어왔다.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천하고금대총편람도 같은 조선 고지도들부터, 유럽 도서관에서나 보던 서양의 오래된 동양 지도들도 있었다.
조선이 '섬'이나 '해협'처럼 그려진 옛 지도를 마주했을 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그러나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한반도'라는 형상이 뚜렷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서양의 시선이 점점 조선을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인식해 가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조선을 일본 서쪽 해안의 섬처럼 묘사한 16세기 포르투갈 지도.
조선을 독립된 국가로 그려낸 18세기 청나라의 '신중국지도첩'.
1595년 테이세이라의 일본열도 지도에서는 조선이 섬처럼 그려져 있었고, 18세기 신중국지도첩에서는 조선이 단일 국가로서 또렷한 윤곽을 갖춘 채 등장한다.
18세기 프랑스 지도의 한편에 '동해(Mer orientale)'라는 표기를 보았을 때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됐다.
지도를 통해 보는 '타자의 인식' - 조선을 어떻게 보았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세계 속 한국을 바라보는지를 되짚는 경험이었다.
'동해(Mer orientale)' 표기가 담긴 18세기 프랑스 제작 아시아 지도.
이 전시를 보며 자연스럽게 현재와 과거가 겹쳐 보였다.
예전엔 서양의 지도 속 변두리에 조선이 조심스레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K-문화로 전 세계의 중심에서 주목받고 있다.
공간은 그대로인데, 시대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시각장애인도 촉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국내 최초 3D 점자 지구본.
한편 전시장에서는 다양한 관람객층을 고려한 배려도 엿보였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영상 콘텐츠, 시각장애인을 위한 3D 점자 지구본도 인상 깊었다.
울퉁불퉁한 지구본을 만지며 울릉도와 독도를 직접 느껴볼 수 있는 이 체험은 '모두를 위한 전시'라는 방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다.
아이들이 고지도를 활용해 직접 탐험하고 그려보는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 (출처 = 국립지도박물관)
또한 박물관은 8월부터 11월까지 가족 단위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고지도 속을 탐험하거나 지도를 그리거나, 박물관 소장 유물 탁본 체험을 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아이들이 지도 앞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하며 몰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전시를 넘어, 체험을 통해 흥미와 이해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전시물의 캡션 글씨가 작고, 반사되는 재질에 조명이 비쳐 내용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글자 색상과 배경 색상의 대비도 크지 않아 가독성이 떨어졌는데, 관람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사회 시간의 옛 추억을 떠올리게 했던 6.25 전쟁 격전지 지도.
그럼에도 지도는 여전히 유효한 '생각의 도구'라는 사실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시대지만, 그 시작에는 고지도를 펼치고 조선을 기록했던 수많은 손들이 있었다.
조선을 발로 그린 김정호의 집념, 22첩으로 완성된 대동여지도. (원본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그중에서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한국 지도 제작의 정수이자, '공간을 기록한다'라는 일이 얼마나 치열하고도 시대를 앞선 작업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지도는 단순한 위치 정보가 아니라, 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과 생각이 담긴 기록이었다.
국립지도박물관은 그런 시선의 축적을 통해, 과거의 조선에서 오늘의 한국을, 나아가 세계로 향하는 우리의 좌표를 되짚어보게 하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지도를 보면 가슴이 떨리는 사람이라면, 이 박물관은 꼭 한번 들러볼 만하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지도에 대한 마음'이 이번 관람을 통해 다시 떠올랐다.
지도는 늘 나에게 세계를 꿈꾸게 했고, 오랜만에 그 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다시 지도를 펼치고 싶어졌다.
언제나 그렇듯, 길은 지도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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