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73년 동백림사건, 1975년 주한미군 철수와 긴급조치9호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외교문서들이 30일 공개됐다. 외교통상부는 이날 제13차 외교문서공개를 통해 생산 또는 접수된 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 1206건 11만7000여쪽을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에는 일본 요도호 납북사건(1970년), 국군 현대화계획(1970년), 미국의 대한군사원조 자료(1970년), 김대중 납치사건(1975년), 캄보디아 주재 한국대사관 및 교민 비상철수(1975년),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문제(1975년) 등이 포함됐다. 외교부가 공개한 자료들은 지난해 12월 16일 외교문서공개심의회의 의결을 거친 것으로 외교부 외교사료과 외교문서연구실(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내)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열람이 가능하다. 국정브리핑은 이날 공개된 외교문서 가운데 ①동백림사건 ②김대중 납치사건 ③주한미군 철수문제 ④긴급조치9호 등을 소개한다.
‘동베를린간첩단사건’이라고도 불리는 ‘동백림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 발표로 세상에 알려진 건국 이래 최대규모의 공안사건이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지난 1월 26일 재독 음악가인 고 윤이상 선생 등 200여명이 연루됐던 ‘동백림사건’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부정총선 규탄시위 등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했던 ‘대규모 간첩사건’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날 공개된 동백림사건 관련외교문서만도 총 14권, 4421쪽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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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통상부가 30일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서 공개한 동백림사건 등 외교문서들. |
외교문서 공개를 통해 새로 밝혀진 사실들은 당시 서독 정부가 한국 정부에 대한원조중단 등의 압력을 통해 사건관련자들의 감형을 집요하게 요청했으며, 결국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특사의 방한을 계기로 양국 정부가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은 관련자들의 석방과 감형에 합의했다는 점 등이다. 현대음악의 거장 고 윤이상 씨 부부에 대해 서독 정부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의 예술인들이 진정서를 통해 석방을 직간접적으로 촉구한 사실도 드러났다.
당시 서독 정부가 동백림사건 관련자의 석방과 조기 독일귀환 등을 요구하며 대한원조중단 또는 보류를 경고한 사업에는 △영남 화력발전소 2호 건립을 위한 차관 1750만 달러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차관 1500만 달러 △농업개발센터에 대한 기술원조 30만 달러 등이 포함됐다.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외상은 한국과의 외교관계 중단까지를 요구하는 서독 국회의원들의 질의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이 같은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서독 특사 파견에 전원 석방 합의
서독 정부의 외교적 압력에도 윤이상 씨 등에 대한 검찰 구형과 재항소심 판결(1968년 12월)에서 중형이 선고되자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은 최후의 수단으로 1968년 12월 12일 브란트 외상을 통해 외무부의 파울 프랑크 제1정치국장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특사로 보내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당시 김영주 주독대사는 한국 정부에 “독일 측으로서는 이번 특사파견을 본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최후 기회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보고했다.
한국 정부는 이에 1969년 1월 8일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갖고 ‘동백림사건’과 경제협력문제는 관련시키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한·독 간의 우의와 특수성을 고려해 마지막 남은 사건관련자 6명을 석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같은 해 1월 17일 작성된 ‘독일 특사와의 교섭결과 및 현안 타결’ 문서에 따르면 양국은 관련자 6명중 형이 확정된 임석훈 씨(징역 15년)와 박성옥 씨(징역 5년)는 15일 이내에 석방하고, 재판 계류 중인 정규명·윤이상·최정길·김성칠 씨 4명은 형 확정 후(사형 포함) 늦어도 1971년 말까지 석방한다는데 합의했다. 양국은 또 석방된 이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독일에 돌아갈 수 있다는데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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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독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이 1969년 1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
박 전 대통령과 뤼프케 서독 대통령 간의 합의는 최규하 외무부 장관과 프랑크 특사 간에 구두로 이야기하되 백지에 서명없이 기록하는 ‘Oral statement’ 형식으로 이뤄졌으며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서독은 그 대가로 경제협력은 물론 정치, 문화면에서 한국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대한민국 국익에 해가 되는 어떠한 대외차관 보증도 승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중정 주도 G.K. 공작의 실체
당시 서독 정부가 한국 정부에 강력한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 이유는 독일 영토 내에서 한국 중정 요원들이 자국의 사전승인을 받지 않고 활동한 것은 주권침해로 국제법 위반이며 사건관련자들의 귀국이 강제성을 띄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서독 정부는 사건 초기 한국 정부의 소명과 함께 대사관에 파견된 기관원 3명의 즉각 소환을 요구했으며 점차 요구 수위를 높여나갔다.
한국 정부는 3명의 공관원 즉각소환은 물론, 최덕신 당시 주독대사를 김영주 대사로 교체하며 외교적 해결방안을 찾았으나 불법적인 관련자 연행 등에 대한 서유럽 내의 비판 여론과 서독의 외교적 압력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당시 동백림사건으로 한국 정부는 서독은 물론 사건관련자들이 불법연행된 프랑스 등으로부터도 공식적인 항의를 받았다.
동백림사건관련 외교문서에는 독일 프랑스 등에 거주하던 사건관련자를 국내로 연행하기 위한 중정의 ‘GK-공작계획’에 대한 대목도 들어있다. 주독한국대사관은 ‘G.K. 사후처리에 관한 보고’라는 문서에서 1967년 6월 12일 G.K.활동을 위해 본국에서 파견한 관계관들이 도착했으며 외무부로부터 “G.K.활동에 적극 협조하라”는 지시 전문이 왔다고 명시하고 있다.
주독대사관이 협조한 내용은 △관련자 주소확인과 기타 행정적 지원 △대사관 노무관들의 필요한 광부(7명) 동원과 기타 협조 △현지 노무관의 차량제공 △대사관 서기관급 3명의 교통편(차량, 운전) 제공 등이다. 중정 특수공작팀은 6월10일부터 해외혐의자 체포를 위해 서독· 프랑스 등에 파견된 뒤, 6월 18일 대부분의 혐의자를 연행한 후 대사관에 집결시켜 6월 20일부터 국내로 이송하였으며, 해외 5개국에서 총 30명이 연행됐다.
카라얀 등 윤이상 씨 석방 촉구 탄원
이날 공개된 외교문서는 또한 사건 초기 서독 외무성 바슬러 과장이 사건관련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관용(Act of Grace)을 요구하며, 특히 작곡가 윤이상 씨 부부에 대한 추가석방을 강력하게 촉구했다는 사실도 드러냈다.
바슬러 과장은 그 이유로 첫째, 뤼프케 대통령이 윤이상 씨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둘째 브란트 외상 등 베를린 출신 정부 요인들의 압력, 셋째 동백림사건에 대한 문화 예술인들의 관심이 남다르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이에 대해 주독한국대사관은 “윤 씨는 간첩사건의 주동적 인물의 하나로서 이미 기소까지 된 실정에 비추어 석방은 어려울 것”이란 입장을 전달했었다.
베를린 필하모니를 이끌던 상임지휘자 카라얀 등 동료 음악가와 독일 문화예술인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2년 뒤 석방된 윤이상 씨는 후일 동백림사건에 대해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분노의 사건”이며 “이를 극복하고 소화시키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동백림사건’이란
동백림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은 당시 철학박사였던 임석진 명지대 명예교수(74)가 1961년과 1966년 평양을 두 차례 방문한 후 1967년 귀국해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당시 중정은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례에 걸쳐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공작단’ 사건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중정이 밝힌 사건 개요는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를 포함한 교수 예술인 의사 공무원 광부 등 194명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행위를 하거나 평양을 방문하고 국내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중정 발표에는 황성모 교수가 서울대에 ‘민족주의비교연구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내란음모와 정부전복을 모의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중정은 당시 사건관련자 중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하는 등 6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법원은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해 조영수·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피고인 가운데 간첩죄를 적용받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는 지난 1월 공개한 중정 문건 ‘동백림 및 통혁당 사건 증거보강 수사계획’을 통해 중정은 1968년 7월 30일 대법원이 사건 피고인들의 일부 혐의에 대해 법적용 잘못을 이유로 파기환송하자 검찰과 재판부에 대한 로비자금 성격으로 보이는 예산을 중정 예산담당 부서에 신청하기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문건에는 ‘검찰 지원비’로 검사 3명, 검사서기 3명에 대해 1인당 5만 원씩 총 30만 원, 재판부 지원비로 판사 4명에 대해 1인당 5만 원씩 총 20만 원을 신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는 1968년 당시 부장판사의 월급이 5만6000원임을 감안할 때 이 돈을 단순한 밥값이나 유흥비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동백림사건으로 고초를 당한 유명인사 중에는 고 천상병 시인도 포함된다. 이 사건으로 ‘국사범’이 된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 당시 서울대 교수에게서 독일 유학 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듣고도 고발하지 않아 간첩으로 몰렸다. 천상병은 중정에 끌려가 3개월, 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 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천상병은 폐인이 되어 기인 같은 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