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강신철입니다.
먼저, 이번 회의를 훌륭하게 준비해 주신 길베르토 테오도로 필리핀 국방장관님과
필리핀 국방부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국의 전략가 리델 하트는 '전쟁의 목표는 보다 나은 평화'라고 했습니다.
인류가 오랜 세월 전쟁을 했고,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지만,
과연 세상에 보다 나은 평화가 찾아왔을까요?
아니 심지어 전쟁이 없는 나날에조차 평화가 있기는 한 것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라는 공동체는 생존을 위해 형성되었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국가 간 안보협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막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래 세대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 자리에는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아우르는 국가의 국방장관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대화와 협력이 미래 세대의 평화를 만들어 가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이번 회의는 더욱 뜻깊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6년간 ADMM-Plus는
역내 평화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안보협력의 장으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회원국들은 서로 다른 안보환경 속에서도 아세안 중심성을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오며,
상호 이해를 높여 왔습니다.
또한, ADMM-Plus는 대화에 그치지 않고 이를 실질적인 협력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회원국들은 전문가분과회의를 통해 공동의 안보과제를 발굴하고,
연합훈련을 함께 실시하며 상호운용성과 협력의 경험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안보환경은 여전히 엄중합니다.
5년째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북·러 군사협력으로 이어졌고,
이는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오늘 바로 이 시간에도 북한은 미사일을 다수 발사하면서 한반도와 역내 안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AI와 무인체계 등 첨단기술의 군사적 활용은
전장의 모습뿐만 아니라 핵무기로 유지되던 억제의 질서마저 바꾸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무력 사용의 문턱은 낮아진 반면,
결정적인 승리와 전쟁의 종결은 더욱 어려워지는 '경쟁의 시대'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적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국가 간 영원한 평화를 위한 6가지 예비조항과 3가지 확정조항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을 압축해 보면 첫째가 국가 간 '신뢰', 둘째가 국제질서를 지탱하는 '규범',
그리고 셋째로는 국제연대로 '안보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늘날의 안보환경에서도 이 세 가지가 여전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먼저, 신뢰의 균열입니다.
지난 9월, 군사분계선 이남에서 정상적인 임무를 수행하던 우리 장병들이
북한이 설치한 지뢰의 폭발로 큰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자, 도발 행위입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서로 묻고 확인할 소통 통로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소통이 단절된 상황에서는 상대의 의도를 확인하기 어렵고,
상호 간 불신과 긴장은 추가적인 충돌과 위기로 확대될 위험이 더욱 커집니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남북 간 대화 채널을 마련하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화는 위기를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신뢰를 회복하는 출발점입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은 작년과 올해 두 차례에 걸쳐 남북 군사당국 회담을 제안하였으며,
북한이 이에 호응하여 대화의 장으로 나오길 기대합니다.
둘째로 국제규범에 대한 도전입니다.
규범은 국가들이 서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하고,
작은 갈등이 충돌로 번지지 않도록 막는 공동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금 도처에서 도전받고 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는 '자유롭고 안전한 항행'이라는 국제법 기본 원칙을 훼손하며
전 세계 에너지와 식량 안보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닷길은 하나로 이어져 있기에, 한 바다에서 발생한 붕괴는
결코 그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국제규범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지역에서 원칙이 무너지면, 다른 지역에서도 원칙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결국 국제규범 자체가 존재적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힘이 아닌 국제규범이 국가 간 관계의 기준이 되고,
공동의 원칙이 일관되게 지켜질 때 평화와 안정의 토대도 굳건해질 것입니다.
셋째로 역내 안보 안전망의 느슨함입니다.
신뢰와 규범이 갈등을 예방하는 토대라면,
예기치 못한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안보 안전망도 필요합니다.
인공지능을 악용한 사이버 공격과 대규모 재난, 초국가 범죄와 같은 비전통적 위협이
국경을 넘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위협은 점점 복합화되고 있지만, 국가별 대응 역량 차이와 국가 간 공동 대응의 한계로
국경을 넘나드는 위협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데 한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함께 대응할 수 있는 협력의 안전망을 더욱 촘촘히 엮어 나가야 합니다.
각국 국방장관님과 참가자 여러분!
칸트는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으로 구축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어느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책임을 나누고 함께 행동할 때 비로소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그 평화를 아세안과 함께 구축하고자 합니다.
이재명 대통령님께서는 지난 9월 유엔총회에서 '건설적 기여국 연대' 구상을 제안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상을 바탕으로 우리의 역량과 강점을 글로벌 공공재로 제공하고,
아세안을 비롯한 역내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은 아세안 중심성을 존중하며
다음 세 가지 방향으로 국방협력을 구체화해 나가겠습니다.
첫째, 신뢰를 확대하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역내 안보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에 기반한 굳건한 연합방위태세를 유지하면서도,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책임 있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한·아세안 CSP 비전에 따라
아세안과의 국방협력으로 확대하여 상호 신뢰를 공고히 해나가겠습니다.
지난 9월 서울안보대화에서는 많은 아세안 국가들이 함께한 가운데
'공존'을 주제로 역내 안보 현안을 논의했습니다.
앞으로도 아세안 회원국의 목소리가 더 많이 담기는 다자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고위급 교류와 정례 협의체를 통해 양자 간 소통도 확대하겠습니다.
신뢰는 결국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고, 관계 속에서 깊어집니다.
대한민국은 미래의 협력을 이끌 젊은 장교들의 교류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세안의 새 회원국인 동티모르를 위한 사관학교 수탁교육과정을 신설한 것처럼,
아세안 국가들과의 교육훈련 협력을 더욱 확대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협력할 수 있는 미래의 국방 지도자들을 길러 나가겠습니다.
둘째, 국제규범의 준수를 행동으로 뒷받침하겠습니다.
규범은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의 기준으로 작동할 때 힘을 발휘합니다.
대한민국은 남중국해를 비롯한 주요 해역에서 항행과 상공비행의 자유가 보장되고,
유엔해양법협약을 비롯한 국제법과 규칙에 기반한
해양질서가 준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합니다.
아울러 남중국해 행동준칙 도출을 위한 아세안의 노력을 지지하며,
행동준칙이 국제법에 부합하고, 제3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들의 정당한 권익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타결되기를 기대합니다.
대한민국은 이와 함께, 역내 해양에서의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아세안과의 실질적인 협력을 확대하고자 합니다.
그 일환으로 2027년 최초의 한·아세안 해양연합훈련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미래가 바다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바다 위에서 함께 쌓은 경험은 서로의 행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는 협력의 토대가 될 것이며,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셋째, 함께 대응하는 안보의 안전망을 확충하겠습니다.
튼튼한 그물은 촘촘하고 견고한 그물코 하나하나가 모여 완성됩니다.
역내 안보의 안전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국의 대응 역량이 튼튼해지고, 그 역량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때
안보의 안전망은 더욱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우리의 강점을 아세안 각국의 다양한 역량과 연결하여,
개별 국가의 대응 능력과 역내 공동 대응 역량을 함께 높여 나가겠습니다.
올해 처음 개최한 '한·아세안 방산협력 컨퍼런스'는 각국이 국방역량 강화 방안을 함께 모색하고,
협력의 가능성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대한민국은 2027년부터
ADMM-Plus 평화유지활동 전문가분과 공동의장국을 수임할 예정입니다.
동명·한빛부대 등 유엔 평화유지활동을 통해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를 아세안과 공유하고,
이를 통해 위기 상황에서 함께 행동할 수 있는 협력 기반을 더욱 튼튼히 다져 나가겠습니다.
각국 국방장관님과 참가자 여러분!
지난 16년간 ADMM-Plus가 쌓아온 대화와 협력의 경험은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변화하는 안보환경에 걸맞게 각 국가가 서로의 장점을 나누고 협력할 때
우리는 역내 평화와 안정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열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아세안과 그 항해를 함께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