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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 건국훈장 애국장- 신홍윤 선생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재판투쟁을 이어가다.
1919년 4월 3일, 황해도 해주군 취야장터 만세시위에 선두로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특히, 선생은 재판과정에서 '조선민족으로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죄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며 재판 투쟁을 이어갔으며, 이후 징역 4년의 옥고를 치렀다.
■ 건국훈장 애족장·건국포장- 최창수·김필영 선생
미국 OSS의 냅코 작전에 참여하다.
최창수 선생(애족장)은 미국에 유학하여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에서 활동하고, 1943년 미군에 입대하여 인도·미얀마지구에서 특수공작 작전을 수행하다 미국 전략첩보국(OSS)의 냅코작전에 참여하였다. 김필영 선생(건국포장)은 일본에 의해 노무자로 징용된 후, 사이판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냅코 작전에 선발되어 활동했다.
■ 건국훈장 애족장- 최성오 선생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파견 협상을 이끌고 임정에서 활동하다.
1943년 2월 조선민족혁명당 소속으로 인도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대일선전을 진행하고, 선전부대 파견에 관한 협상을 진행하였다. 선생이 협상을 진행한 선전부대는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였다.
이후 선생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조선민족혁명당의 만현특구 대표와 중앙집행위원, 1945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비서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 건국훈장 애족장- 이상춘 선생
예술인으로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선생은 1932년부터 극단 '메가폰'과 '신건설'을 조직하여 서울 마포 도화극장 등에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연극을 하고, 연극잡지를 발간하는 등 예술인으로서 일반 대중에게 문예활동을 통해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노력하였다.
■ 건국훈장 애족장- 박순부·이해동·최윤신 선생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박순부·이해동 선생은 김동삼 선생(1962년 대통령장)의 배우자와 며느리로서 1911년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두 분은 김동삼 선생의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으며, 김동삼 선생의 집은 독립군의 연락처이자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최윤신 선생은 박시창 선생(1963년 독립장)과 결혼한 후 망명생활을 이어가며, 중국 중경 등지에서 박시창 선생을 내조하며, 임시정부의 활동에도 힘을 보태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 건국포장- 박혜숙 선생
혈서로서 조국 독립을 염원하다.
1913년 중국 길림에서 개최된 제3회 경술국치 결의대회에서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만세' 혈서를 작성하였다.
박혜숙 선생의 활동은 여성으로서 1910년대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던 독특한 사례로, 미주지역까지 활동상이 전달되어 재미한인사회에 큰 귀감이 되었다.
이번 독립유공자 포상은 각종 재판 판결문과 수형 기록 등 국가보훈부의 대대적인 자료 발굴과 수집,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로써 1949년 최초 포상 이후 이번 순국선열의 날까지 총 18,664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습니다.
건국훈장 11,920명
건국포장 1,568명
대통령표창 5,176명
국가보훈부는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억·계승하기 위해 한 분의 독립운동가라도 더 발굴하고 포상하여 모두를 위한 특별한 희생을 기억하고 예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 건국훈장 애국장- 신홍윤 선생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재판투쟁을 이어가다.
1919년 4월 3일, 황해도 해주군 취야장터 만세시위에 선두로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특히, 선생은 재판과정에서 '조선민족으로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죄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며 재판 투쟁을 이어갔으며, 이후 징역 4년의 옥고를 치렀다.
■ 건국훈장 애족장·건국포장- 최창수·김필영 선생
미국 OSS의 냅코 작전에 참여하다.
최창수 선생(애족장)은 미국에 유학하여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에서 활동하고, 1943년 미군에 입대하여 인도·미얀마지구에서 특수공작 작전을 수행하다 미국 전략첩보국(OSS)의 냅코작전에 참여하였다. 김필영 선생(건국포장)은 일본에 의해 노무자로 징용된 후, 사이판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냅코 작전에 선발되어 활동했다.
■ 건국훈장 애족장- 최성오 선생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파견 협상을 이끌고 임정에서 활동하다.
1943년 2월 조선민족혁명당 소속으로 인도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대일선전을 진행하고, 선전부대 파견에 관한 협상을 진행하였다. 선생이 협상을 진행한 선전부대는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였다.
이후 선생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조선민족혁명당의 만현특구 대표와 중앙집행위원, 1945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비서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 건국훈장 애족장- 이상춘 선생
예술인으로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선생은 1932년부터 극단 '메가폰'과 '신건설'을 조직하여 서울 마포 도화극장 등에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연극을 하고, 연극잡지를 발간하는 등 예술인으로서 일반 대중에게 문예활동을 통해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노력하였다.
■ 건국훈장 애족장- 박순부·이해동·최윤신 선생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박순부·이해동 선생은 김동삼 선생(1962년 대통령장)의 배우자와 며느리로서 1911년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두 분은 김동삼 선생의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으며, 김동삼 선생의 집은 독립군의 연락처이자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최윤신 선생은 박시창 선생(1963년 독립장)과 결혼한 후 망명생활을 이어가며, 중국 중경 등지에서 박시창 선생을 내조하며, 임시정부의 활동에도 힘을 보태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 건국포장- 박혜숙 선생
혈서로서 조국 독립을 염원하다.
1913년 중국 길림에서 개최된 제3회 경술국치 결의대회에서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만세' 혈서를 작성하였다.
박혜숙 선생의 활동은 여성으로서 1910년대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던 독특한 사례로, 미주지역까지 활동상이 전달되어 재미한인사회에 큰 귀감이 되었다.
이번 독립유공자 포상은 각종 재판 판결문과 수형 기록 등 국가보훈부의 대대적인 자료 발굴과 수집,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로써 1949년 최초 포상 이후 이번 순국선열의 날까지 총 18,664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습니다.
건국훈장 11,920명
건국포장 1,568명
대통령표창 5,176명
국가보훈부는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억·계승하기 위해 한 분의 독립운동가라도 더 발굴하고 포상하여 모두를 위한 특별한 희생을 기억하고 예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