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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현대 문명을 비웃는 전복(顚覆)의 굉음

[대중음악 A to Z, 장르를 관통하는 26개 키워드] ⓝ노 웨이브, 노이즈 록

2022.05.27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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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을 필두로 케이팝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팝 음악’으로써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다 다양한 장르로 케이팝의 확장이 필요하다. 정책브리핑은 케이팝의 발전과 음악감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중음악의 다채로운 장르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① 노 웨이브(No Wave)

1970년대 후반, 뉴욕 언더그라운드 씬은 전위적인 음악과 시각 예술의 산실이었다.

노이즈와 불협화음을 주로 활용하는 밴드들과 재즈 연주자들, 그리고 디스코 아티스트들은 괴팍하고 허무주의적 세계관으로 점철된 음악들을 만들어 나갔고 이런 큰 움직임을 두고 ‘노 웨이브’라 칭했다.

이는 상업적인 ‘뉴 웨이브’ 음악을 거부하는 말장난이었지만 음악적 특성들이 모두 제각기였기 때문에 음악적 정의로 보기는 어렵다.

이보다는 전통적인 대중음악, 그리고 스타들의 신화를 부수는 일종의 운동에 다름 아니었다. DNA의 멤버 알토 린제이의 경우 “우리는 뮤지션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198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댄스 펑크 밴드 ‘리퀴드 리퀴드’, 색소폰 연주자 ‘제임스 챈스’, 그리고 첼리스트 ‘아서 러셀’ 등이 각자의 분야에 디스코를 섞어냈고 이것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갖춰냈다. 때문에 아무 장르에나 디스코를 엮어 놓는 방식을 노 웨이브라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전히 컬트적인 인기를 이어 나가고 있는 아방가르드 훵크 밴드 ‘ESG’의 경우 이들의 곡 ‘UFO’가 제이 딜라, 투팍, N.W.A 등 대략 500여 곡의 힙합 트랙에 샘플링되면서 힙합 씬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후 시간이 조금 지나부터 ‘글렌 블랑카’와 그의 음악에 영향 받은 ‘소닉 유스’, ‘수어사이드’ 등의 노이즈 음악들이 노 웨이브로 분류됐다.

이런 움직임을 두고 ‘2세대 노 웨이브’라 칭하기도 했는데, 이후 2000년대 무렵 등장한 ‘스트록스’, ‘예예예스’, ‘라이어스’, ‘랩처’ 등을 3세대로 분류하기도 했다.

소울 재즈 레코즈에서 발매된 2003년도 모음집 <New York Noise> 시리즈, 그리고 1978년 노 웨이브가 한창 뜨거웠을 시기 브라이언 이노의 주도 하에 완성된 모음집 <No New York>이 이 당시의 흔적들을 성공적으로 정리해내고 있다.

영국인이었던 브라이언 이노는 이 무렵 토킹 헤즈의 앨범 <More Songs About Buildings and Food>를 프로듀스하기 위해 뉴욕에 있었다.

그리고 마침 노 웨이브 펑크 록 밴드들의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아 이 움직임이 자료로 남겨져야 한다고 확신하면서 <No New York>을 만들었다.

1950년대 프랑스 영화 계의 새로운 조류였던 누벨 바그(Nouvelle Vague)는 영어로 뉴 웨이브였다. 만물의 이치가 그렇듯 새로운 것은 낡은 것이 되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뉴 웨이브의 기수 중 한 명이었던 끌로드 샤브롤 감독은 “파도는 없고 바다만 있을 뿐”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바로 노 웨이브가 끌로드 샤브롤의 이 말에서 가져왔다는 의견도 있었다.

뉴 웨이브와 노 웨이브, 테제와 안티테제는 보기와는 달리 서로가 공생하는 관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64년 뉴욕에서 결성된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에서 기타리스트,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했고 1970년 밴드를 떠난 뒤에는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한 루 리드. (사진=저작권자(c) AP/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1964년 뉴욕에서 결성된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에서 기타리스트,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했고 1970년 밴드를 떠난 뒤에는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한 루 리드. (사진=저작권자(c) AP/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② 노이즈 록(Noise Rock)

‘노이즈 록’은 앞서 ‘2세대 노 웨이브’라 언급했던 부류의 아티스트들을 정리하는 용어로도 사용됐다.

펑크 록에서 파생된 노이즈 지향의 실험적 밴드 음악을 두고 노이즈 록이라 불렀는데, 미니멀리즘, 인더스트리얼, 그리고 뉴욕 하드코어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노이즈 록 아티스트들은 주로 전기기타와 디스토션 페달을 활용한 극악무도한 굉음과 피드백 노이즈를 내면서 파괴적인 소리 만들기에 집중했다.

빅 블랙의 기타 연주자이자 유명 프로듀서이기도 한 ‘스티브 알비니’는 기타가 전혀 기타처럼 들리지 않게끔 하는 것이 목적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여기서 요점은 음악의 경계를 넓히는 것이다.

노이즈 록의 중심에는 아마도 ‘소닉 유스’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노이즈 록을 대중화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실제로 게펜과 계약하면서 최초로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한 노이즈 록 밴드가 됐다.

지금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스완스’ 또한 중요한 밴드인데, 소닉 유스가 얼터너티브로 뿌리내리는 역할을 했다면 스완스의 경우 포스트 하드코어와 인더스트리얼 등으로 전이되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1968년도 걸작 <White Light/White Heat>에서 비롯됐다는 의견도 있다.

노이즈 록이 주류 시장에서 인기를 얻은 적은 없었지만 다양한 곳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끄러운 퍼즈 톤과 피드백 노이즈의 경우 1990년대 영국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슈게이징에 영향을 끼쳤고, 1990년대 시애틀의 그런지 그리고 얼터너티브로 이어지면서 미국의 음반시장을 간접적으로 장악하게 된다.

이후에는 대체로 시끄러운 록을 하면 노이즈 록이라 부르는 경향이 있었는데 ‘다이노소어 주니어’(인디 록), ‘보리스’(메탈) 등도 노이즈 록으로 분류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이후에도 ‘라이트닝 볼츠’같은 훌륭한 밴드들이 노이즈 록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활약을 보였다.

유독 일본에서 다수의 노이즈 록 밴드들이 활동을 이어 나갔고, 이는 일본 노이즈 뮤지션들의 씬을 지칭하는 ‘재패노이즈(Japanoise)’라는 용어가 존재할 정도였다.

1960년대부터 활동해온 ‘하다카노 라리즈’, 음악을 들을 때 스트레스를 받거나 혹은 풀리게 되는 ‘게로게리게게게’, 그리고 세계로 뻗어나간 ‘보어덤즈’나 ‘멜트 바나나’, ‘루인즈’, 그리고 ‘애시드 머더스 템플’ 등이 여전히 맹렬하게 활동해 나가고 있다.

결국 많은 선구자들이 그러했듯 노이즈 록이란 음악의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 혹은 발상을 전환시켜가는 과정이었다.

“만일 듣기 힘든 소리를 지칭하는 단어가 ‘노이즈(소음)’라면, 나에게는 싸구려 팝송이 그렇다”는 어느 예술가의 말처럼 소음으로 정의 내리는 것에 대한 구분은 결국 개인마다 다르다.

결국 무엇이 소음이고 무엇이 음악인지를 가르는 행위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차 무의미해질 것이다.

한상철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On the Pulse>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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