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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영토, 독도

독도문제, 우리의 슬기로운 대응방향은

[기고] 김병렬 국방대학교 교수

2008.08.11 김병렬 국방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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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4일 일본이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와 관련하여 “한국과의 사이에 주장의 차이가 있는데 대해 북방영토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토·영역에 대해 이해를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내용으로 기술하겠다고 통보해와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낸 바 있다.

무(武)를 홀대한 것이 독도문제의 원인

고려시대 삼별초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던 조정은 삼별초세력의 확장도 막고 왜구의 침탈도 저지하기 위하여 서남해안의 섬 안에 거주하던 백성들을 모조리 육지로 데리고 나오는 정책을 추진한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거제도·진도·남해도 등이 늦어도 1370년까지 모두 빈 섬이 된다.

삼별초세력과 그 동조세력을 역도(逆徒)로 간주했던 고려왕조의 입장에서 만에 하나 삼별초세력이 왜구와 손을 잡는다고 하면 큰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공도조치(空島措置)를 수행하면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려 말의 이러한 공도조치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고 전면화되었다. 일시적인 ‘조치’의 차원을 넘어서서 법으로 까지 규정하는 하나의 국가 ‘정책’으로 자리잡아 갔던 것이다. 허락 없이 섬에 잠입한 자는 장(杖) 1백대의 형을 받는 것으로 규정하였으며, 섬으로 도피은거한 자는 모반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게다가 세종 때 대마도 정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왜구의 침탈 또한 빈번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왜구들이 섬의 백성들과 야합하여 본토를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필요 이상으로 강경하게 공도정책을 추진하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조에서 서남해안의 섬들에 대해서만 시행되었던 공도정책이 동해안까지 확대 추진되어 울릉도 역시 1430년경에는 완전히 빈 섬이 되고 만다.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군현(郡縣)이 철폐되었으며, 몰래 섬에 들어가 살고 있던 주민들은 불법 체류자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졌다.

울릉도가 빈 섬으로 장기간 방치되자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출입을 하다가, 1625년에 독점적인 어로활동을 위하여, 오야 징기치(大谷甚吉)와 무라카와 이치베에(村川市兵衛)가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로부터 독점적인 어로면허를 받게 된다. 이후 두 집안이 교대로 울릉도에 와서 전복을 잡아가는 행위가 1693년까지 계속된다. 이 때 두 집안은 독도를 울릉도로 항해하는 표지로 삼기도 하고 울릉도에서의 어획량이 적을 때는 독도에서 추가적으로 전복을 잡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어로행위는 1693년과 1696년 2회에 걸쳐 도일한 안용복의 활동에 의해 수차례 조선과 공문을 주고받은 끝에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함으로써 일단락이 되었다.

전쟁의 필요성에 의한 독도침탈

메이지유신 후에 다시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살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독도를 재인지하게 되며, 1903년부터 나카이 요사브로라는 사람이 독도에서 강치(바다사자)를 사냥하게 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전투가 계속됨에 따라 해군력의 1/3 이상을 상실하게 된다. 다급해진 일본 군부는 만주로 파견된 일본군의 고립을 면하기 위하여 동해상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함대의 군함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일본 해군은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재인식하게 되며,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편입하고 망루를 설치한 후 일본의 마쓰에까지 해저전선을 부설한다.

무주지의 합법적 편입으로 가장

이처럼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탈취하였음에도 일본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면서 무주지를 합법적으로 편입한 것이라고 강변해왔다.

그런데 당시 「독도 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했던 나카이 요사브로는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편입의 주역이었던 해군성 수로국장 기모스키 가네유키는 자신이 발간한 『환영수로지』·『조선수로지』를 통해서, 외무성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는 독도편입 1년전인 1904년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써서 발간한 『최신한국실업지침』을 통해서, 농상무성 수산국장 마키 보쿠신 역시 자신이 발간사를 쓴 『한해통어지침』 등을 통해서 독도가 조선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당시나 지금이나 무주지를 편입한 것이라고 태연하게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치부를 감추기 위한 끈질긴 노력

이처럼 독도를 편입한 일본은 다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독도가 자기네 것이라고 하는 온갖 표시를 하고자 한다. 마치 도둑질한 물건에 자기 것이라는 표시를 하듯이....

1905년 2월 22일 편입을 고시한 후 동년 5월 관유지 대장에 등재한다.
또한 러일전쟁중임에도 군사적인 목적에 의해 편입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나카이 요사브로에게 강치사냥을 허가하고 사용료를 징수하였다.

1952년 1월 18일 한국이 평화선을 선포하자 의도적으로 동년 7월 26일 미일행정협정 제2조를 빙자하여 독도를 주일 미군의 해상연습 및 훈련구역으로 제공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자국령으로 인정받고자 하였다.

한국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1953년 3월 19일 독도가 폭격연습구역에서 제외되자 독도경비대의 주둔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6월 19일 시마네현 고시 제35호로 독도 주변 수역에서의 강치사냥권을 오키도어업협동조합연합회에 면허하고 동일부로 하시오카 츄초우에게 사냥을 허가한다.

1959년 히고 쿄우가 의도적으로 독도에 주민등록을 하였다가 거주가 불가능한데도 국가가 그 의무를 태만히 하고 있다면서 1960년에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가 패소하였으며, 1961년에는 츠지토미 조우가 1954년 인광석 채굴허가를 받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여 채굴을 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광구세를 부과하고 있다며 ‘광구세 징수의 위법성과 납부의무 부존재의 확인’과 손해배상의 지불을 구하였다가 패소하였다.

우리의 경비대가 있기 때문에 거주나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강치사냥허가를 내주고, 주민등록을 하고, 인광허가를 내주는가 하면 이를 빌미로 소송을 하는 것 등이 모두 독도가 자기들 것이라고 억지로 표시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일본은 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대응이 요구된다

독도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문을 중시하고 무를 천시하는 우리민족의 고질적인 병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구가 침탈하면 수군진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막아야함에도 정반대로 섬에 사는 백성들을 강제로 육지로 이주시킨 것이 오늘날 독도문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공도정책을 틈탄 일본의 울릉도·독도 침범은 2차례에 걸친 안용복의 도일활동을 계기로 하여 양국이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1905년에 무주지라고 강변하면서 독도를 편입했다. 따라서 이는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던 것을 편입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법적이고 원인무효인 행위인 것이다.

또 원인무효인 편입을 근거로 하여 이후에 이루어진 강치사냥 허가, 주민등록 허가, 인광석 채굴허가 등은 모두 법적인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은 이처럼 독도를 편입한 사실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틈만 나면 이를 인정받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에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기술하는 것이나 중의원회의에서 질문하고 답변을 하는 것이나 모두 이러한 행위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마치 훔쳐간 물건에 자기 것이라고 표시를 하지 않으면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하는 행위와 다름없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일본이 이러한 행위를 할 때마다 우리가 흥분하여 화형식을 하고 촛불데모를 벌인다면 오히려 일본의 행위를 홍보해주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차라리 조어도는 중국이 역사적인 권원이 더 강한데도 청일전쟁 때 이를 일본이 약탈한 후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이며, 쿠릴 4개 도서 역시 강화조약에 의해 구소련에 넘겨주는 것으로 자신들이 서명을 하고서도 이제 와서 억지를 부린다는 내용을 우리의 교과서에 수록함으로써 조용히 일본을 아프게 하는 것이 일본의 망동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한다.

또한 그것이 일본 어린이들에게 자신들의 교과서가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의 국력이 강했다면 감히 일본이 1905년에 독도를 편입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일본의 행동 하나하나에 흥분하여 화형식을 하고 촛불데모를 하면서 오히려 우리의 국력을 소모·약화시키고 있다.

일본의 독도영유권주장이 얼마나 제국주의적 욕심에 의한 것인지를 조목조목 알려주는 것이 효과적인 대응책이지 화형식이나 촛불데모는 오히려 일본의 어린이들에게 반한의식만을 불어넣는 방법이 아닌가 한다.

* 외부 기고문은 정부의 공식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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