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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이라크에 평화를 심다

파병 통해 한미동맹 굳건히 유지…국내 안보도 ‘튼튼’

[정책리포트] 이라크 파병

2007.04.16 특별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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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빌시 외곽에 위치한 토락마을은 쿠르드족 1,800여명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자이툰 부대가 2005년 2월 10일 이 곳을 처음 찾았을 때 주민들은 차가운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쿠르드족은 “산외에는 친구가 없다”고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이민족을 경원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이툰 부대가 이 마을 찾은 것은 현지 주민의 민심을 확보하기 위한 ‘그린 엔젤 작전’ 때문. 의료지원, 시설보수, 구호활동을 중심으로 한 민사작전이다. 하루 동안 220여명의 환자를 치료했고, 초등학교 담장도 고쳐줬다. 집집마다 이불과 피복 등 구호물자를 나눠줬다.



■ 럼스펠드 “자이툰 부대같은 작전을 펼쳐라”

자이툰 부대가 일주일여 뒤 이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이곳 초등학교 교실에는 “웰컴 코리아 친구들”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임시진료소 앞에는 500여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주민들의 분위기는 처음과는 확연히 달랐다.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주민들도 많았다. 이들은 “바쉬(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며 마치 오랜 친구처럼 한국군을 맞이했다. 종전후에도 테러와 폭격, 전투가 끊이지 않는 이라크에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이라크 현지에서 의료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는 자이툰 부대.

자이툰 부대에 대해 이라크 현지인들은 “한국군은 신이 준 선물”이라 말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이툰 부대의 대민지원사업에 대한 반응이다. 자이툰 부대는 이라크에 파병한 20여개 나라 군대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도널드 럼스펠드 전 미국방장관은 미군 지휘관들과의 회의에서 “자이툰 부대같은 작전을 펼쳐라”(Zaytun-like Operation)라며 벤치마킹을 주문하기도 했다.

우리 군의 이라크 파병은 2003년 4월 의료지원단 제마부대 100명, 건설공병지원단 서희부대 578명이 나시리아 지역에 파견되면서 시작됐다. 그 이후 2004년 9월 20일 2,800여명의 자이툰 부대가 다시 이라크 땅을 밟았다. 2006년 12월 말 현재까지 연인원 1만5천53명이 이라크를 다녀왔다. 이라크에 주둔한 우리 군은 성공적으로 현지 작전을 수행해왔다. 이라크 정부 인사들과 쿠르드 지방정부 관리들, 주민들이 치안유지와 재건을 위해 자이툰 부대의 계속 주둔을 요청하고 있을 정도다.

2003년 4월의 이라크 파병 신고식.

■ 미국의 이라크전 개시와 정부의 파병결정

이라크 파병은 2002년 11월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정부는 외교채널을 통해 우리 정부에 인도적 지원, 전후 이라크 복구, 비전투병 파병 등 대이라크 지원이 가능한지 여부를 논의해왔다. 이라크전이 발발하기 수개월여 전이었다. 정부는 미국에 동맹국으로서 이라크 문제의 해결을 위한 미국의 노력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다음 해인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국가안보와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전을 개시했다. 개전 직후 정부는 대통령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하고 비상대책을 논의했다. 이어 대통령 담화와 청와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이라크전 지지와 건설공병·의무부대를 파견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전쟁 개시 이튿날인 3월 21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파병동의안이 의결됐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서는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찬반논란이 고조되고 있었다. 일부언론에서는 “명분없는 전쟁에 참여해선 안된다”며 정부 결정을 비판했다. 하지만 “파병은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찬성의견도 적지 않았다. 연일 파병반대 시민단체들의 시위가 열렸고, 정치권에서는 ‘반전평화모임’을 결성해 파병반대에 나서고 있었다. 이같은 찬반논란을 잘 알고 있던 정부는 왜, 어떤 과정을 거쳐 파병결정을 했던 것일까.

2003년 4월 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 취임 후 처음으로 국회연설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의 표정은 무거워 보였다. 이날 오후 국회는 이라크 파병동의안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정부의 파병동의안은 3월 21일 국회에 제출됐지만 국회는 찬반논란을 거듭하며 동의안 처리를 수차례 연기했다. 16대 국회사상 처음으로 국회 전원위원회가 열려 이틀 동안 찬반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 오전까지 의원 4분의 1이 반대의사를 표명했고, 100여명이 유보적 태도를 보여 파병안의 처리는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노대통령은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저는 명분을 중시해온 정치인입니다. 정치역정의 중요한 고비마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명분을 선택해왔습니다. 명분을 선택한 대가로 여러 차례 선거에 떨어지는 고통을 겪었지만 또 목전에 승패가 갈라질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저는 명분을 지켰습니다. 그런 제가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저의 결정에 나라와 국민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라크 파병은 우리 군을 전장에 내보낸다는 점에서 정부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파병을 결정하기까지 노대통령의 개인적 고민도 적지 않았다. 청와대브리핑은 2003년 12월 24일 한 기사에서 “노대통령은 1차, 2차 파병을 결정하는 동안 참모들에게 ‘파병문제를 생각하면 잠이 안온다’고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노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우리와의 협의가 없는 한 미국은 북핵문제를 일방적으로 처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결국 이날 오후 국회는 찬성 179표, 반대 68표, 기권 9표로 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국민여론도 정부의 파병결정을 수용하는 양상이었다. 파병동의안의 국회처리 전인 3월 29일 여론조사에서 파병 결정을 내린 대통령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의견이 83.8%였고, 파병찬성은 54.9%, 반대는 42.6%였다.

파병동의안 통과 이후 정부는 신속하게 파병절차를 밟아나갔다. 국방부는 4월 15일 573명으로 구성된 ‘제1100 건설공병지원단(서희부대)’를 창설하고, 이어 17일에 ‘제320 의료지원단(제마부대)’를 100명의 인원으로 창설했다. 두 부대는 현지 적응훈련을 거쳐 5월 14일까지 이라크 현지에 파병을 완료했다.

서희·제마부대는 동맹군 지원과 이라크에 대한 인도적 지원 활동에 집중했다. 학교와 병원 시설을 보수하고, 시가지를 정비했다. 도로나 오하수로 정리, 급수시설 정비와 같은 주민들의 숙원사업도 해결해 나갔다. 제마부대의 진료사업은 현지 주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04년 8월 17일까지 모두 21,000명의 환자를 진료했고, 이중 70%가 현지 주민들이었다.

■ 평화재건부대, 자이툰 부대의 추가파병

2003년 9월 이라크 추가파병이라는 또 한번의 중대결정을 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당시 미국은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회의’(FOTA : Future of the Alliance)를 통해 우리 측에 추가파병을 요청해 왔다. 미국은 이미 5월 1일 개전 40여 일만에 전쟁의 끝났음을 선언했지만, 전후 복구와 재건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8월 19일에 바그다드 유엔본부 건물 폭탄 테러로 24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자국 병력의 추가파병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국제사회에도 자금과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국내에서는 잠시 사그라들었던 파병찬반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정부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정부는 9월 24일부터 11월 26일까지 두 번의 정부조사단, 한번의 국회조사단을 이라크에 보내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범정부차원에서 ‘아랍권 우호여건 조성 계획’도 마련됐다. 노대통령은 4당 대표를 청와대에 초청해 국회의 이해와 지지를 구했다. 국무총리도 수차례에 걸친 정책협의회를 통해 국민의 이해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중동권 국가들에는 대통령 특사를 파견해 한국군의 추가파병에 대한 이해와 지지를 당부했다.

미국이 요청한 파병규모는 당초 1만명 규모로 알려졌다. 당시 일부 언론은 1개 사단규모가 될 것이라 예측했다. 우리 군이 이라크에 파병돼 실제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청와대와 정부는 파병안을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라크의 평화와 재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과 우리 군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미국 측에 우리의 입장과 계획을 관철시켜 파병 규모와 성격이 정해졌다.

정부가 내린 결론은 ▲ 파견부대 규모 3천여 명 이내 ▲ 이라크내 일정 책임지역에 대한 평화정착과 재건지원 등의 임무수행 ▲ 파견부대는 한국 합동참모의장이 지휘하며, 작전운용은 현지 사령관이 통제한다는 것 등이었다. 정부 안의 핵심은 파병부대 성격을 ‘평화재건부대’로 규정하고, 한국군이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추가파병동의안은 2004년 2월 13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라크에 파병될 부대의 명칭은 ‘이라크 평화·재건사단’으로 ‘자이툰 부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자이툰은 이라크 주민들이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좋아하는 ‘올리브’를 뜻하는 말이자, ‘평화’를 상징하는 단어였다. 당초 예상 주둔지역은 키르쿠크였지만 이 지역에 이라크 저항세력의 유입이 증가하면서 주둔지역이 아르빌로 변경됐다. 전투가능성이 적고 독자적인 작전지휘가 가능한 지역으로 바뀐 것이다. 이 지역의 쿠르드 지방정부도 한국군의 주둔을 공식적으로 환영했다.

군 장병들은 자이툰 부대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지원자 모집당시 이 부대는 14.8 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3천494명의 정예장병이 선발돼 2004년 7월 19일 2천800여명의 본진이 아르빌로 진출했다. 이어 11월 26일 700여명이 후발대 이동을 마지막으로 이라크 북부 아르빌 지역에는 약 3천600여명이 파병됐다.

자이툰 부대가 한국을 출발해 주둔지인 아르빌까지 이동하는 과정은 ‘파발마 작전’으로 불렸다. 쿠웨이트의 캠프 버지니아를 출발해 바그다드를 거쳐 아르빌에 이르는 1,115km 지상이동작전이다. 폭염과 모래폭풍, 적대세력의 위협 속에서 서울 부산 거리의 세배 가까운 거리를 단 한건의 전투력 손실이 없이 완수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이는 월남전 이후 최장 거리, 최대 규모의 전장이동 작전으로 평가된다.

■ 이라크 아르빌에 이르는 대장정, ‘파발마 작전’

자이툰 부대는 적대세력의 테러가 계속되는 바그다드, 사마라, 티크리트 등 이라크 ‘수니 삼각지대’를 지나야 했다. 자이툰 부대의 이동로에서는 동맹군들에게 대한 적대세력의 테러공격이 수없이 가해졌다. 그러나, 우리 군은 단한명의 사상자나 단 한건의 장비 손실 없이 당당히 아르빌에 입성, 쿠르드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자이툰 부대가 주둔지 방호훈련만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이툰 부대는 적대세력으로부터 한국군과 교민 차량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는 도로정찰작전(크로마이트 작전), 주둔지 순찰 및 기동매복 작전(가디언 작전), 항공기의 안전한 수송여건을 보장하기 위한 은하수 작전, 다국적군과의 연합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자이툰 부대의 명성을 높인 것은 이라크 주민의 안정과 재건을 돕는 민사작전이었다. 자이툰 부대는 2006년 11월말까지 상당한 민사작전 성과를 거뒀다. 인도적 지원 활동으로 △ 자이툰 병원 운영을 통해 수술 700여명, 진료 5만1천여명, 의사·간호사 인턴십 91명 교육 △ 취약계층 지원 활동으로 고아원, 양로원, 유치원 등 시설 20개소를 개보수했다. 재건지원 사업도 상당하다. 학교 58개소 신축, 보건소 11개소 신축과 함께 치안시설 14개소, 우물공사 83개소, 공공시설 29개소, 전기시설 44개소의 재건지원을 도왔다.

자이툰 부대의 기술교육센터에 대한 주민호응은 아주 높았다. 14억원을 들여 설립한 이 센터는 현대자동차가 지원하는 자동차 정비 과정을 비롯해 가전제품 수리, 중장비 운전, 컴퓨터, 제과제빵 등 모두 7개의 과정이 개설돼 있다. 2006년 12월말까지 이 센터를 거쳐간 이라크인은 1,114명에 달한다. 8주 과정의 교육을 마치면 정부기관이나 외국계 기업등에 취업이 보장되기 때문에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신의 선물”라는 찬사를 받게 된 것은 이같은 자이툰 부대의 땀과 노력 덕분이다.

자이툰 부대는 이라크에 ‘평화를 위한 군대’라는 새로운 군대상을 심었다.

■ 우리 군의 국제사회 기여 활동 계속될 것

우리 군이 이라크에서 흘린 땀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이라크 파병을 통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세계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했다. 그것은 경제규모 세계 11위의 국가라는 국제적 위상에 걸맞는 역할이기도 하다. 우리의 파병은 국제법적 근거에 입각한 것이었다. 유엔 회원국으로서 이라크의 안보와 안전, 인도적 지원과 재건을 요청하는 안보리 결의(제1511호 및 제1546호)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전후 이라크를 정상화하고 재건하는 데 한국군의 역할이 컸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이라크 임시정부는 자이툰 부대의 파병을 환영하고 감사한다는 뜻을 우리 정부에 전해 왔다. 잘랄 탈라바니 이라크 대통령은 한국군 파병에 대해 사의를 표하며 “한국을 진정한 친구로 여기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동 지역에 심은 한국의 긍정적 이미지는 향후 중동지역과의 경제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지난 2월 27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폭탄테러로 인해 전사한 고 윤장호 하사의 희생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아들의 죽음이 세계평화의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윤하사 아버지의 말처럼 우리나라의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참여정부 들어 활발히 전개된 우리나라의 유엔평화유지와 이라크 재건지원활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 고 윤장호 하사의 희생은 가슴아픈 일

자이툰 부대를 비롯한 우리군의 평화유지부대들은 가는 곳마다 완벽한 임무수행으로 가장 우수한 부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헌신적인 사랑과 봉사는 현지인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임무수행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파병부대의 안전을 위한 정부와 군의 노력이 바탕이 되었다.

자이툰부대의 파병을 결정할 당시 가장 우선적인 고려사항은 우리 장병들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파병부대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친 현지답사 및 정부차원의 협의 등을 거쳐 병력 파병 및 파병지역의 변경 등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자이툰 및 다이만 부대는 2004년 9월 파병된 이래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정부는 앞으로 고 윤장호 하사의 고귀한 희생을 거울삼아 파병 장병들이 더욱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과 제반 조치를 취해 나갈 예정이다.

■ 해외 파병 속 국내 안보 태세 흔들림 없어

우리 군의 해외 파병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국내안보는 흔들림이 없었다. 참여정부 출범 이전인 ‘02년 6월,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교전이 발생하면서 이 지역에서는 긴장이 조성됐다. 2006년 7월에는 북한의 실험발사가 있었고, 그해 10월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군은 ‘유사시 현장에서 작전을 종결한다’는 판단으로 북한군 상황을 고려하여 상시 우세한 전력을 운용했고, 북한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시 사전 군사대비태세를 강화하여고도의 작전태세를 유지했다. NLL 월선 등 적 침범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함으로써 위기를 관리했다. 이와 함께 긴장완화를 위해 남북간 장성급 회담을 네 차례 실시했고, 남북간 수시 전화통신문 및 교신을 실시하여 군사적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했다.

이처럼 참여정부는 출범 이후에 확고한 군사대비태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남북간 무력충돌을 억제함으로써 국민이 안보로 인해 불안해하지 않는 ‘조용한 안보’, 안정적 군사 상황 관리로 경제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 파급 영향을 차단하는 ‘경제를 위한 안보’를 성공적으로 구현해 왔다.

이 기간 중 북한의 도발 현황을 살펴보면 의도적인 도발이 현저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DMZ 총격의 경우 ‘00~’03년 3회이던 것이 ‘04년 이후에는 1회(오발로 판명)였으며, MDL 침범은 ‘00~’03년에는 7회 발생하였으나 ‘04년 이후에는 2회로 격감하였다. 해상에서의 NLL 침범은 ‘00~’03년 평균 21회였던 것이 ‘04년 이후에는 평균 16회의 단순 침범 사항만 있었다. 북한의 영공 침범은 ’03년 2월 이후 발생한 바가 없다. 해외 파병 와중에서도 우리의 안보태세는 굳건히 유지됐던 것이다.

■ 이라크 파병 통해 굳건한 한미동맹 재확인

자이툰 부대의 파병은 지난 50여 년간 지속돼온 한미동맹을 더욱 튼튼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미국은 6·25 전쟁에 참전해 사망 3,694명, 부상 9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모두 137,250명이라는 희생을 치렀다. 현재에도 2만 9천여명의 주한미군이 한국과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자 우방이다. 부시 미대통령은 2004년 2월 19일 노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국의 대이라크 지원은 한미동맹관계가 공고하다는 점과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평가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이라크에 ‘평화의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전쟁과 폭력, 압제에 시달렸던 이라크 주민들에게 군대란 공포의 존재였다. 하지만 한국군으로 인해 그들의 군대에 대한 인식은 바뀌었다. 그들은 한국군을 통해 ‘전쟁’이 아닌 ‘평화’를 가져다주는 군대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했다. 쿠르드 민주당 대변인 이브라힘 하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쿠르드인들은 군대에 대해 안좋은 경험을 갖고 있다. 우리는 군대에 의해 억압받았고, 살해되었으며 집단 매장되었다. 자이툰 부대는 군대에 대한 쿠르드인의 오랜 관념을 바꿔 놓았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을 억압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마을을 파괴하지 않고 재건해주는, 폭탄이 아닌 선물을 주는 군대를 마주하게 되어 평생 가장 큰 기쁨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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