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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예술’

‘백성희장민호 극장’서 만난 연극의 대가 장민호 씨

2011.05.12 정책기자 전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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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잔잔한 강물이 인생의 폭풍을 넘어선 것처럼 87세 원로배우의  공연을 지켜보던 관객들 눈에서도 하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11일 서울 용산구 서계동에 위치한 ‘백성희장민호 극장’. 원로배우 백성희(86세), 장민호(87세)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연극 ‘3월의 눈’의 앵콜공연이 한창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극장에서 무대에 선 배우 장민호의 연기는 이미 연기를 넘어서고 있었다. 감독을 맡은 손진책 씨가 그를 ‘한국 연극계의 거대한 산’이라 칭하는 이유가 새삼 마음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지난달 개관 공연 때 부부로 열연했던 배우 백성희(86세)씨는 병환으로 앵콜무대에 함께 서지 못 했지만, 배우 장민호의 존재감은 그의 빈자리조차 충분히 채우고도 남았다.  

장오역을 맡은 87세 원로배우 장민호(앞줄 우)와 이순역을 맡은 박혜진이 커튼콜을 하고 있다
장오역을 맡은 87세 원로배우 장민호(앞줄 우)와 이순역을 맡은 박혜진(앞줄 좌)이 커튼콜을 하고 있다.

【오래 묵은 한옥에 혼자 살던 장오는 이제 그 집을 떠나야 한다. 3월의 눈이 내리던 날 집을 떠난 외아들은 전쟁에서 죽고, 빚더미에 앉아 도망 다니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위해 장오는 마지막 남은 재산인 집을 팔았다......삼월의 눈 내리는 어느 날, 장오는 수많은 기억들이 평생의 일기장처럼 써 있는 집이 앙상한 뼈대만 남은 것을 보며, 이순이 뜨다말아 한 팔이 없는 빨간 스웨터를 입고 홀로 요양원으로 떠난다.】

소리 없이 계속 흐르는 눈물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훌쩍일 때, 이심전심인지 앞뒤 좌우에서 훌쩍거리던 관객들이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아주 크고 긴 박수를 쏟아냈다.

커튼콜에 참여한 후배 배우들 역시 현존하는 거장과 함께 무대에 섰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는 듯 그의 연기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 배우 장민호는 이어지는 박수에 손을 들어 화답했다.
 
커튼콜에서 관객들의 엄청난 환호에 두 손을 든 원로배우 장민호
커튼콜에서 관객들의 엄청난 환호에 두 손을 든 원로배우 장민호

“9살 때 어머니 손을 잡고 장민호, 백성희 두 분이 연기하는 것을 보기 시작했고, 60년 넘게 두 분의 연기를 봐왔는데 이번처럼 잘 어울리는 연극은 평생 처음 봤어요. 오늘은 장민호 선생님 공연을 볼 수 있었다는 게 평생의 보람이고 행운이에요.“

1년 동안 200개 이상의 연극을 보고 평을 썼다는 박정기(70·한국희곡창작워크샵 대표)씨가 흥분된 목소리로 소감을 말했다.

공연을 본 김혜진(21·연세대)씨는 “노인 연기를 원로 연기자가 직접 하니까 굉장히 편안하고, 와닿었어요. 연기를 본다기보다 그의 삶 자체를 보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관객 박정기(70,한국희곡창작워크샵 대표) 씨와 김혜진(21, 연세대) 씨가 공연소감을 말하고 있다
관객 박정기(70·한국희곡창작워크샵 대표) 씨와 김혜진(21·연세대) 씨가 공연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극 ‘3월의 눈’은 지난해 12월 문을 연 ‘백성희장민호 극장’의 개막작이다.

한국연극의 전설 같은 백성희, 장민호 두 원로배우의 이름을 따 지어진 ‘백성희 장민호 극장’은 국립극단 창단멤버로 60년 넘게 국립극단을 지켜온 두 원로배우의 노고와 전통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극장이름에 살아 있는 연극배우의 이름을 올린 것은 연극사 최초의 일이다. 백성희라는 이름이 먼저 나온 이유는 레이디퍼스트와 연극계 1년 선배임을 주장한 장민호 배우의 멋진 신사도 때문이고, 건물이 새빨간 것은 연극을 위한 젊은 시작, 창조적인 혁명을 의미이다.

지난 3월 두 원로배우가 주연을 맡은 개관공연 ‘3월의 눈’이 연일 매진과 폭발적인 기립박수가 이어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닌 듯했다. 이에 힘입어 5월부터는 앵콜공연(2011.5.7.~6.7)이 이어지고 있다.
 
온통 빨간 백성희 장민호 극장 건물
‘백성희장민호 극장’ 외관

3월의 눈 앵콜공연을 알리는 극장 입구의 간판
‘3월의 눈’ 앵콜공연을 알리는 극장 입구의 간판

매주 수요일 공연 뒤에는 ‘관객과의 대화’도 갖는다. 기자가 찾은 날도 손진책 감독과 배삼식 작가가 함께 한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됐다.

“연로하신 명배우와 함께 하셨는데, 어떤 마음으로 감독에 임하셨나요?” 젊은 연극학도가 질문을 쏟아냈다.

“제가 특별히 고칠 것을 주문하지 않아요. 연기를 안 하고 당신의 인생을 그대로 내놓는 존재감만으로도 관객을 확 휘어잡는 ‘연극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시니까요.” 역시 명감독다운 대답이었다.

“장오가 요양원으로 떠날 때 입은 팔 한쪽이 없는 빨간 스웨터가 의미하는 것은 뭔가요?

“삶에서 끝맺지 못한 것을 어딘가에 남기고 떠난다는 것을 팔 한쪽이 없는 스웨터의 형상으로 나타냈어요.”

원로배우들을 만난 뒤 일주일만에 시나리오를 써냈다는 작가 배삼식 씨의 답변이 이어졌다.

손진책 연출가(우)와 배삼식 작가(좌)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손진책 연출가(우)와 배삼식 작가(좌)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무대에 서있는 것 자체만으로 한 편의 ‘예술’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연극 ‘3월의 눈’의 탄생 과정은 의외로 명쾌했다.

“구순을 앞둔 원로배우가 현역으로로, 그것도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 예는 아마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할 거예요.”

감독과 작가 모두 두 원로배우의 연기혼에 매료된 듯했다.

한국연극의 전설 장민호 원로배우가 연극이 끝난 후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연극의 전설, 원로배우 장민호 씨가 연극이 끝난 뒤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배우에게는 인생의 나이가 없어요.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배역의 인생을 사니까요. 커튼콜의 박수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인생을 살아온 것이 60년인데 내 이름의 극장과 내 이름의 주연과 내 이름의 연극을 하고 있으니 이렇게 행복한 배우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이 좋은 극장에서 많은 후배들이 천재적인 연극인들로 탄생하기를 기원합니다.“

구순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대본을 외우셨다는 배우 장민호 씨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오늘 내가 ‘한국연극의 전설을 목격한 행운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백성희장민호 극장 ‘3월의 눈’ 앵콜공연

  - 기간 : 2011년 5월 7일~ 6월 7일
  - 문의 : 국립극단 02)3279-2233, 2201

정책기자 전흥진(프리랜서) hellen6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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