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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 30년]국토녹화에 바친 숨가쁜 세월

1996.08.26 국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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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후(崔玟休)
임업연구원장

필자가 대학 졸업후 공직(농림부 산림국)에 발디딘 것은38년전인 1959년의 일이다.

그 무렵에는 해마다 1월에 전국 임하과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농림부 선발시험이 있었다.

그해에는 모두 3백여명이 응시했는데 요행히도 수석의 영광을 차지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공직생활에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특히 1965년 산림청 발족 작업.

1969년 대단지 조림계획 작성, 1989년 산림의 공익기능 개량화 작업 등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다

산림행정기구 독립방안 지시를 받은 것은 1965년 6월 어느 날, 당시 조한욱(趙漢旭) 산림국장으로 부터였다.

춘기조림사업을 끝내고 행정기구문제가 치산녹화사업추진에 큰 요인이라고 생각한 듯 했다.

그날부터 외로운 작업이 1년여 계속된 끝에 ‘장기임업발전계획’이라는 국토녹화사업계획을 상안했고, 이 민족적 숙원사업을 성공리에 추진하려면 산림기구의 독립승격이 필수적이라고 건의하는 내용을 담았다.

1967년 1월9일 산림청 갱청식에서 초대 전영식 산림청장은 취임사를 통해, ‘산림청이 추구해 나갈 정책의 목표느 국토녹화와 경제임업 달성’ 이라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지금 첫째 목표인 국토녹화는 완수했으나, 둘째 목표인 경제임업은 원점에서 맴돌고 있는 형국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으로 기억하는 남는 일은 1969년에 수립한 대단지 조림계획. 이는 촌락 근처 황폐산지는 사방조림사업을 하는 한편, 황폐되지 않은 오지에는 대단지 경제림을 조성하여 후세 경제자원의 보고가 되도록 조성하지는 취지였다.

69년 ‘조림계획’에 朴대통령 격찬

전국의 시?군 일선 실무자 80여명을 불러 출신지역을 맡기고 전국 14개 단지별로 양묘?조림?무육?벌채?가공에 이르는 계열화 작업을 하도록 했다.

이 사업을 보고받은 박정희대통령은 임업발전을 위한 대작을 만들었으니 정권이 바뀌더라도 계속 실행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국가원수의 지시임에도 1973년 산림청이 내무부 소속으로 바뀌면서 이 장기계획은 3년만에 단명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이 작품도 역시 시작은 화려했으나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일이다.

또다른 일은 1989년 ‘산림의 공익기능 계량화사업’이다.

당시 정부내에서는 국토녹화가 달성된 마당에 산림청이 간판을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심 끝에 임업연구원 인력을 동원, 1987년 산림의 공익기능이 17조6천5백60억원이고 국민총생산의 16.7%에 상당한 것이라고 매스컴에 발표했다.

정부에서도 그제야 산림과 임업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듯했다.

그후 3년마다 새로 공익기능을 계량화하여 발표하고 있으나 아직도 그 공익가치를 내부화하여 임업생산 농민들의 소득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역시 성패를 말하기 어려운 단계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해보면 1950년대부터 1990년까지, 이승만정부부터 金泳三정부까지 기관차처럼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이었다.

여유있는 민간 임업인으로 남을 터

이 과정에서 나름대로 지녀온 공직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나만의 '자리‘관(觀)이다.

“지금 내가 않아 있는 이 자리를 나 아닌 다른 누구라도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언제든지 기꺼이 내 자리를 내주어야 옳다” “내가 이 순간 이 자리에 않아 있어도 되는 이유가 정당화 되려면 내가 이 자리에 죄적임자이도록 평소 각고의 노력을 하는 길밖에 없다.”

어는 시인의 말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살아왔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푸른 산을 오르면 거기에 나의 ?은 시절의 땀방울을 느끼며 미소를 머금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누군가가 노병은 죽지 않는다고 했던가.

필자는 노공직자는 죽지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공직을 면한 후라도 오히려 더 홀가분하고 여유있게 민간 임업인으로 영원히 남아 있고 싶은 것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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