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를 꿈꾸던 20대 청년의 목소리는 위기의 순간 값지게 쓰였다. ‘초인종 의인(義人)’ 고(故) 안치범(28) 씨는 지난 9월 9일 오전 4시 20분쯤 불이 난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5층짜리 건물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와 119에 신고한 후 건물로 다시 들어갔다. 화재가 난 줄 모르고 자고 있던 이웃들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안 씨가 초인종을 누르며 이웃들에게 “나오라”고 외친 덕분에 원룸 21개가 있는 이 건물에서 다른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안 씨는 건물 5층 옥상 입구 부근에서 유독 가스에 질식해 쓰러진 채 발견됐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사고 발생 11일 만인 9월 20일 오전 목숨을 잃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9월 23일 사단법인 한국성우협회는 안 씨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명예회원으로 선정했고, 10월 16일 서울 마포구는 안 씨에게 ‘용감한 구민(區民)’상을 추서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박대호(32) 씨는 9월 23일 플라스틱이 타는 냄새를 맡았다. 이미 자신이 살고 있던 다가구주택 복도에는 연기가 자욱한 상태. 그는 이웃에게 화재 사실을 알리기 위해 초인종을 누르며 대피했다. 그때 건물 지하층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길이 치솟아 들어갈 수 없자 건물 외벽으로 돌아가 지하층 방범창을 뜯어내고 여학생과 다른 방에 있던 오빠를 구출했다. 박 씨는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로서 학생들이 불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며 “위급한 상황에 괴력이 발휘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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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안치범 씨가 초인종을 누르며 “나가라”고 외치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잡혔다. 덕분에 서울 서교동 화재에서 추가 인명 피해는 없었다. (사진=동아DB) |
화염 속 남매 살리고 보이스피싱 할아버지 승객 돕고
이름·연락처 없이 사라지거나 포상 고사
이웃을 향한 작은 관심은 사기에 노출된 어르신을 구했다. 9월 29일 오전 10시 택시기사인 이종석(62) 씨는 승객 이모 할아버지가 누군가와 여러 차례 짧게 통화하는 것을 유심히 들었다. 이 할아버지가 보이스피싱 사기에 노출됐다고 판단한 그는 서울 강북구에 위치한 수유1파출소에 신고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할아버지는 “자신의 정보가 유출돼 통장의 모든 금액을 인출하라”는 전화를 받고 2억 원 가까운 현금을 챙겨 범인이 알려준 목적지로 가던 중이었다. 할아버지를 파출소에 데려다준 이 씨는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서울지방경찰청은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시민 영웅’을 찾는다는 글을 올렸고, 10월 10일 이 씨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사라진 이유에 대해 “내 일을 다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강원 동해시 묵호고등학교 윤리 교사인 소현섭(30) 씨는 ‘윤리 교육’을 몸소 실천했다. 10월 13일 밤 경부고속도로 언양나들목 부근을 지나던 소 씨는 70m 앞 지점에서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는 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관광버스에서 부상자 4명을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병원으로 옮긴 후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떠났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 사회 각계에서 소 씨에게 포상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고사하고 있다. “포상금은 자신이 아닌 유가족을 위해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이유에서다.
자신을 던져 남을 구한 의인들의 살신성인의 정신은 각박한 세상에 ‘이웃과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위클리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