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책 쓰기는 작가나 유명인 등 특정인의전유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누군가에겐 인생의 로망이자 버킷리스트였다. 하지만 최근 소셜미디어와 인쇄술의 발달, 더불어 삶의 여유와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맞물리면서 그 ‘꿈’을 실현하는사람들이 늘고 있다.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만의 책. 직접 책을 쓰고 만드는 사회와 사람들을 들여다봤다.
지난 11월 1일 전북 전주 시립 완산도서관에서는 ‘삶의 자리를 보다’라는 이름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16명의 전주지역 중·장년들. 이들은 책 속에 각자의 삶을 기록했고, 16명의 인생이 담긴 글은 한 권의 책에 담겼다. 글쓰기 교육에 참여한 김봉준 씨는 “소박한 내 글이 이렇게 멋진 책으로 나와서 누구나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렌다”며 “내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감동을 줄 수 있다면 행복할 뿐이다”라고 전했다. 이번에 발간된 자서전은 전북 지역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에 배포될 예정이다.
김 씨를 비롯해 16명의 시민은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완산도서관에서 40시간의 ‘나만의 자서전 쓰기’ 교육을 받은 뒤 ‘저자’로 거듭났다. 자서전 쓰기 교육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도서관협회가 주관한 ‘2016 공공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공모사업으로 진행됐다. 이 사업은 올 한해 전국 12개 도서관 등 20개 기관에서 진행됐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책 쓰기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가장 먼저 활기를 띤 분야가 바로 자서전이다. 자서전 쓰기는 인생 후반기를 준비하거나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선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각 지역의 도서관, 지방자치단체, 대학의 평생교육원과 문화센터 등이 관련 강좌를 마련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도서관협회 손지혜 팀장은 “자신의 삶을 책으로 남기고 싶은 바람이 일상화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교육에 참여하는 분들은 40대부터 70대까지 연령이 다양해요. 평균 연령이 높아지고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자서전을 쓰고자 하는 이들이 많죠. 책을 쓴다는 게 이전에는 대단한 일이었지만 이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개인도 큰 돈 들이지 않고 쉽게 할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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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학대학교 도서관에서 시민들이 자서전 쓰기에 관한 수업을 듣고 있다. (사진=한국도서관협회) |
중장년층 자서전 쓰기 강좌 인기
젊은이들 자기 브랜딩 수단으로 책 쓰기도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책 쓰기 열풍이 번지면서 시중에는 책쓰기와 출판방법을 소개한 책이 넘쳐난다. 출판사나 교육·컨설팅 회사들은 각종 책 쓰기 강좌를 마련하고 있다.
책 쓰기를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직업도 생겨났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책 쓰기 강좌를 진행하는 이혁백 ‘책으로 인생을 바꾸는 사람들’ 대표는 “3년 전 사업을 시작했는데 현재 인터넷 카페 회원이 300명, 실제 출간까지 한 수강생이 100명이나 된다”면서 “수강생 중에는 대학생, 주부, 직장인 등 연령과 직업도 다양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책을 쓰는 이유는 다양하다. 사업가가 자신의 전문성과 사업을 홍보하기 위한 일종의 ‘브랜딩’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고, 경력이 단절된 주부가 출간을 사회 재진입의 발판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반면 금융회사에 다니면서 낚시에 대한 책을 쓰거나 20대에 자서전을 쓰는 이도 있다. 이 대표는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물음이 책 쓰기에 불을 지폈다”고 평했다. “사회의 틀에 맞춰 살던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기 시작했어요. 독서 토론이나 심리 치유 활동에 참여하고 스스로 정신과에 가기도 하죠. 그런 게 책 쓰기로 넘어왔다고 봐요. 실제로 많은 이들이 책을 쓰면서 심리 치료를 받은 것 같다고 말해요. 책을 쓰는 건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른 채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보고 그걸 제자리에 돌려놓는 작업이거든요.”
소셜미디어 발달하면서 글쓰기 일상화
온라인 출간 플랫폼·독립잡지 등장으로 이어져
한편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2015년 성인 중 1권 이상의 책을 읽은 국민의 비율은 65.3%로 20년 전에 비해 21.5%포인트 떨어진 역대 최저치를기록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책을 쓰는 사람은 늘어나는 셈이다. 이 같은 기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많은 전문가들은 소셜미디어의 발달에서 그원인을 찾는다. 실제로 누리소통망(SNS)를 통해 글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일상화되면서 온라인을 통한 책 쓰기 열풍도 생겨났다. 다음카카오가 개발한 ‘브런치’는 퍼블리싱 온라인 플랫폼을 표방하며 3년 전 등장했다. 여기에 연재된 글 가운데 잘된 것은 도서 출간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작가 발굴을 위해 브런치가 개최한 ‘브런치북 프로젝트’에는 올해 4만1000건의 글이 접수됐다. 지난해보다 40%나 증가한 수치다. 여기서 선정된 7명의 글은 곧 출간될 예정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과거에는 소수가 쓰고 다수가 읽었지만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다수가 쓰고 다수가 읽는 시대가 됐다”면서 “글이 쓰는 이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시대에 책은 한 사람의 포트폴리오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과거에 한 사람이 1년 동안 쓸 글의 분량을 지금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하루면 다 쓰죠. 이에 따라 전통적인 책 읽기는 줄었지만 단순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오히려 범람하고 있어요. 이같이 일상화된 글쓰기 행위가 고차원으로 발달하면 책 쓰기로 귀결되는 겁니다. 블로그나 페이스북, 트위터, 팟캐스트를 통해 출간된 책들이 쏟아집니다. 이를 통해 유명해진 사람도 많고요. 그런 현상이 일반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거죠.”
소셜미디어를 통한 자유로운 글쓰기는 다양한 콘텐츠를 양산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개인이나 소수의 그룹이 발행하는 독립잡지는 책의 스펙트럼을 넓힌 것으로 평가되며 젊은이들 사이에선 하나의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비만인을 위한 패션, 혼자 놀기 방법 등 기발하고 파격적인 주제로 무장한 것은 물론 기존 잡지를 능가하는 고퀄리티의 책부터 연습장을 연상케 하는 작고 얇은 책까지 형태가 다양하다.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등록하지 않고 동네 서점이나 인터넷을 통해 발행하는 것이 일반적. 개성으로 무장한 독립잡지는 한 해 100종 이상 쏟아진다.
책 쓰기 전문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비투비교육연구소의 정형권 소장은 “책은 자신을 브랜딩하는 최고의 콘텐츠”라고 분석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그것들을 하나의 콘텐츠로 묶어 자신을 브랜딩하는 데는 책만 한 것이 없죠. 소셜미디어의 글은 논리성이나 체계성이 부족하고 순간적이니까요. 요즘처럼 자신을 브랜딩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 책 쓰기가 유행하는 것은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싶은 현대인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라고 봅니다.”
[위클리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