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유빙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밤 9시 무렵, 어둠 속에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자 되돌아가야 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되돌아갈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
서명원 선장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약 3시간 뒤 다시 뱃길이 보였다.
대한민국 컨테이너선 최초로 북극항로를 통한 유럽 왕복에 성공한 '팬스타 아크로호'가 50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지난 11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국내 컨테이너선이 실제 화물을 싣고 북극해를 거쳐 유럽을 왕복하며 새로운 물류 항로의 가능성을 확인한 첫걸음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3일 부산에서 열린 귀항 환영식에 참석해 선원들을 격려했다.
이 대통령은 격려사를 통해 "이번 항해는 북극항로의 가능성을 실제 화물 운송으로 확인한 뜻깊은 도전이었다"면서 "북극항로 시대를 대비하는 부산과 동남권의 미래도 함께 열어가겠으며 긴 안목으로 북극항로 시대를 준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서명원 팬스타 아크로호 선장(사진=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국경원,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정책브리핑은 이날 부산항 북항 제5부두에 정박한 '팬스타 아크로호'의 선교(브리지)에서 서 선장을 만나 북극해에서 겪은 생생한 순간들과 새로운 뱃길의 미래를 들었다. 이에 앞서 권재근 팬스타엔터프라이즈 대표이사에게도 북극항로 개척의 의미와 향후 과제를 물었다.
◆ 미지의 북극해로…유빙 앞에서 빛난 선장의 판단
서 선장은 해양수산부의 북극항로 시범운항 공모사업에 팬스타라인닷컴이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선장으로 지원했다.
팬스타그룹과는 20여 년 전 인연이 있었다. 당시 여객선 2등항해사와 육상 안전품질 담당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어 회사의 기업문화에도 익숙했다.
서 선장은 "저도 북극해가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막상 가보니 환경이 하루하루 정말 급격하게 변했다"며 "강풍이 불어닥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뜨고 화창해졌다"고 설명했다.
변화무쌍한 북극해에서도 밤하늘을 수놓은 오로라는 장관이었다. 그는 "오로라를 보니 두 딸 다은이와 수진이, 그리고 아내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 선장은 지난 13일 북극항로 시범운항 환영식을 마친 뒤 팬스타 아크로호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국경원,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항해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은 유빙이 항로를 막아섰을 때다.
되돌아가야 한다는 보고를 받은 서 선장은 직접 상황을 확인하고 아이스 파일럿(빙해 항해 전문가)과 논의했다.
그는 "어두워서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면 날이 밝았을 때 다시 확인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며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더니 3시간 정도 뒤 길이 보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아이스 파일럿은 조언자이고 최종 결정은 선장의 몫이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보다 날이 밝기를 기다린 신중한 판단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항해를 이어간 배는 마침내 부산으로 돌아왔다.
서 선장은 "큰 사고 없이 돌아온 것도 기쁜데 대통령께서도 관심을 보여주시고 이렇게 환영받을 줄은 몰랐다"며 "가문의 영광"이라고 웃었다.
◆ 첫 왕복으로 확인한 '가능성'…다음 목표는 '정기운항'
기후변화로 달라진 북극해의 환경은 새로운 물류 항로의 가능성도 열고 있다.
북극항로는 부산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기존 수에즈운하 경유 항로 약 2만㎞를 1만 3000㎞로 줄일 수 있는 뱃길이다.
이번 시범운항에서 일부 구간을 우회했지만, 새로운 물류 항로로서의 활용 가능성을 보여줬다. 항해 거리는 약 35%, 운항 기간은 약 10일 단축됐다.
서 선장은 "2013년 시범운항 선박은 약 13일이 걸렸다"면서도 "선박 종류와 운항 환경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서 선장이 지난 13일 팬스타 아크로호 브리지에서 북극항로를 통한 유럽 왕복 50일간의 여정을 떠올리며 이야기 하고 있다.(사진=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국경원,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과제도 남았다. 해수부의 사전 수요조사에서 파악한 화물은 약 13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였지만, 실제 수출화물은 737TEU였으며, 빈 컨테이너 202TEU를 포함한 총선적량은 939TEU였다. 짧은 화물 유치 기간 등이 영향을 미쳤다.
권 대표는 "이번 시범운항에서 화물 영업 기간이 짧았지만, 앞으로 충분한 준비 기간을 확보하면 더 많은 화물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귀항 때 빈 컨테이너를 실어 온 것은 다시 수출화물을 싣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선사들의 일반적인 운송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서 선장과 권 대표는 이번 시범운항의 가장 큰 의미가 실제 화물을 실은 컨테이너선의 북극항로 운항 가능성을 검증한 데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서 선장은 첫 운항인 만큼 출항 전 동일한 조건에서 비교할 데이터가 부족했던 점을 어려움으로 꼽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아라온호가 축적한 자료와 정부가 지원한 사전 교육이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제 다음 운항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이번 항해에서 얻은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류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지원도 첫 운항에 힘을 보탰다. 권 대표는 "운항 준비 과정에서 관계기관과 협력이 필요한 사안들을 정부가 해결해 줘 원활하게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권재근 팬스타엔터프라이즈 대표이사가 지난 13일 팬스타 아크로호 앞에서 '정책브리핑'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국경원,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제 관건은 시범운항에서 상업운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해수부는 이번에 얻은 경험과 데이터를 토대로 오는 2030년 북극항로 정기 서비스 개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권 대표는 "내빙등급 선박 확보를 위한 정책금융과 투자 지원을 비롯해 유럽 거점항만과 물류 네트워크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북극항로가 활성화되면 운송거리와 시간 단축으로 수출입기업의 물류 경쟁력을 높이고, 친환경 선박 건조와 기자재 산업에도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그는 "부산항이 북극항로의 동북아 물류 거점으로서 새로운 성장 기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 선장도 "북극항로가 활성화되면 부산에는 정말 큰 기회가 될 것"이라며 "부산이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서 선장은 북극항로 노선이 표시된 지도 앞에서 "정기노선이 구축되길 기대한다"고 말하고 있다.(사진=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국경원,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50일간의 항해를 마쳤지만, 서 선장의 시선은 이미 다음 항해를 향해 있었다.
그는 "처음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길을 항해할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며 "무엇이 부족했고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지 계속 연구하고 있고 이번 경험이 좋은 기록으로 남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유빙 앞에서 멈췄던 배는 다시 길을 찾아 돌아왔다.
50일간의 항해는 새로운 물류 항로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 쌓은 경험과 데이터는 다음 항해로 이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정책브리핑 최선영